풍류 기행

풍류기행(39) - 함양 남계서원

아미타온 2025. 4. 4. 05:43

< 풍류기행(39) - 함양 남계서원 >

 

 

 

1. 좌안동 우함양

 

함양은 조선 시대 때 '좌(左) 안동 우(右) 함양'으로

불릴 정도로 명한 선비의 고장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경상도가 경남, 경북으로 행정 구분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좌도, 우도로 구분되었습니다.

 

함양은 낙동강 오른편의 고을 중

선비의 고장으로 첫 손가락에 꼽혔습니다.

 

선비의 고장답게 함양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정자나 누각이 80여개나 남아 있습니다.

 

함양이 낳은 유명한 선비 중에

일두 정여창 선생(1450~1504) 이 있습니다.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 선생과 관련된 두 장소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정여창 선생을 모신 '남계 서원'과

또 하나는 정여창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일두 고택'입니다.

 

먼저 남계 서원을 들렀습니다.

 

남계 서원은 세계 문화 유산 서원 중 하나입니다.

 

홍예문 뒤로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서 있는

서원의 모습이 범상치 않고 정갈하게 느껴졌습니다.

 

 

2. 풍영루와 풍류

 

풍영루입니다.

 

'바람(風풍)',  '읊을(咏영)'자 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지금 어떻게 살고 싶냐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니 증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시)를 읊으며 살고 싶습니다."

 

(기수와 무우는 경치 좋은 중국의 지명)

 

바람쐬고 노래(시)를 읊으며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바람을 쐬고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풍류가

공자 선생의 유학 가문의 가풍과 일맥상통한다는 뜻입니다. 

 

 

풍영루를 올라가 보았습니다.

조망이 좋았습니다. 

 

바람을 쐬면서 서원 앞의 넓은 들판과 

서원 안의 정갈한 전각을 감상하니 내가 곧 풍류객이 됩니다.

 

 

3. 정여창 선생의 불행

 

남계 서원.

 

'남계'는 남계 서원이 자리 잡은 마을을 흐르는

내천 이름입니다.

 

남계 서원은 1552년 명종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의

학식과 덕행을 존경했던 함양 지방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남계 서원 옆에는 정여창 선생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이 있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어떤 분일까요?

 

조선 성종 때 밀양의 유명한 유학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있었습니다.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세 분은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 때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었습니다.

 

김일손 선생은 스승인 김종직 선생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었습니다

이를 빌미잡은 유자광과 이극돈, 연산군에 의해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이때 나이가 35세였다니 한창 때였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연산군이 세자였을 때

잠시 연산군을 가르치던 사부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연산군은 사부들을 몹시 싫어했는데 정여창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부들은 대개 사림파에 속해 있었고,

연산군은 사림파들을 미워했습니다.

 

사림파의 반대편에 서있던 훈구파들은

이런 연산군의 취향을 당연히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유자광은 김종직 선생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고,

이극돈은 김일손 선생에게 원한을 가졌었습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 선생이

꿈에 중국 초나라의 항우에 의해 죽은

초나라 왕 의제를 만난 후 꿈에서 깬 후

느낀 바가 있어 의제를 위한 제문을 지은 글입니다.

 

이 글을 지은 시기가 세조 3년인데,

이 시기에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죽였습니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은 세조의 친손자이고,

연산군에게 세조는 증조 할아버지입니다.

 

증조 할아버지라고 해봤자 당시에는 자식을 일찍 두었기에

연산군은 세조가 죽은 후 8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조의제문'은 명문장이든 어쨌든 문제로 삼게 되면

크게 화가 될 글이었습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스승의 명문인

'조의 제문'을 사초에 실었습니다.

 

사초란 역사 편찬의 최초 자료로써

사관이 그날그날의 정치행정의 득실과

기타 사회의 모든 비밀을 보고 듣는대로 직필해서

비밀리에 가지고 있다 실록을 편찬할 때 자료로 제출하는 기록물입니다.

 

김일손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이 사초를 제출한 건데,

이것이 사림파의 급소를 노리던 훈구파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습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풀이를 달아 연산군에게 보냈습니다.

사초를 쓴 김일손조차 이런 식으로 해석할줄 몰랐을 것입니다.

 

연산군에게 조의제문은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관계된 사림파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김일손 선생은 능지처참형을,

이미 고인이 된 김종직 선생은 부관 참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손보다 15년 위이지만 같은 김종직의 제자였던

정여창 선생은 귀양을 갔습니다.

 

또한 김종직 선생의 제자이자

정여창 선생의 친우였던 김굉필 선생도

이 일로 귀양을 갔다 4년 뒤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게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 사화입니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가 발단이 되어

스승인 김종직과 동문들이 모두 큰 화를 입었고,

이에 연류된 사림들도 피해를 입은 조선 4대 사화 중 최초의 사화입니다.

 

연산군이 4대 사화중 2개를 만들었으니

어떤 의미로 보자면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였으나 그 말로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악몽과 종기로 고통 받았고 이를 벗어나

평안을 얻고자 불교에 귀의했지만,

그래서 얼마나 평안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김종직 선생은 조의제문을 통해

그의 신분이 왕이든 어떻든

사람으로서의 살이를 제대로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딱히 세조를 힐난하고자 제문을 지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김일손 선생은 스승의 고상한 뜻을 드러내 펼치고자

사초에 실었던 것이었지만 시절 인연이 나빴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도 시절 인연이 나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조의제문을 둘러쌌던 악연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후손들에 의해 여전히 남아있을까요?

아니면 모두 사라지고 잊혀 졌을까요?

 

아무튼 정여창 선생은

유배지에서 6년동안 학동들을 가르치며 공부하다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인 함경도에서 죽었습니다.

 

그 제자들이 함경도에서 2달에 걸쳐

스승인 정여창의 유해를 모셔와서

이 곳 남계 서원 뒷산에 장례지내고 모셨습니다.

 

그런데,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연산군 때 두번째 사화인 갑자 사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갑자 사화로 정여창 선생의 절친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은 죽임을 당하고,

이미 죽은 정여창 선생은 스승 김종직처럼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한때 정여창은 연산군에게 글을 가르치던 스승이었습니다.

그 스승을 귀양보내고 부관참시를 했던 연산군이니 참 징한 인간입니다.

 

 

 

4. 정여창 선생의 덕행

 

생전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정여창 선생은 매화와 연꽃을 좋아했답니다.

 

스승 정여창의 꽃을 좋아하는 취향을 기리기 위해

동재와 서재를 각각 '영매헌(咏梅軒)'과 '애련헌(愛蓮軒)'으로 이름했습니다.

 

'매화를 노래하는 집'과

'연꽃을 사랑하는 집'인데,

참 멋진 작명입니다. 

 

 

 

동서의 영매헌과 애련헌 아래로는 연못이 있습니다.

 

연꽃 필 때 오면 더 운치있을 것 같습니다.

 

 

 

정여창의 덕행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불행하게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애통한 사랑 때문인지 

꽃 문양 채색과 붉은 글씨로 덕행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채색된 비석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스승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느껴지는 비석이었습니다.

 

 

5. 정여창 선생의 효성

 

언덕 제일 꼭대기에 일두 정여창의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 올라가는 길이 고풍스럽고 예뻤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시대 5대 성현으로 추존된다고 합니다.

 

정여창과 같은 성리학자를 보통 '도학자(道學者)'라고 합니다.

성인이 되는 도를 공부하는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정여창은 55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말년은 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살았고

남긴 책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조선 5대 성현 중 한 분으로 추앙됩니다.

 

물론 조선 시대 도학의 종조인 김종직의 직제자로서

정치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도학자로서 이 분의 덕행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의 덕행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정여창 선생이 17살 때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함경도 관리로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아버지 유해를 찾기 위해

경상도 함양에서 함경도까지 달려가

부패한 시체 더미 속을 뒤지고 뒤져서 

끝끝내 아버지의 유해를 발굴해서 모시고 장례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술을 좋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픔에 잠겨 술을 퍼 마시고 취해서 자주 울곤 했답니다.

 

아들의 이런 모습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 술을 끊고

그 뒤로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역병에 걸려 이질로 힘들어할 때

어머니의 병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어머니 대변을 직접 맛보았다고 합니다.

 

결국 역병으로 10일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하고 크게 슬프했고,

3년간 초막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죽만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부모에 대한 효행과 비교해 보자면

가히 성인이라고 할 만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정말 특별했던 분입니다.

 

 

 

사당에서 바라본 남계 마을입니다.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아주 멋집니다.

 

사당에서 바라보니 참 좋은 곳에 자리잡은 서원입니다.

 

일두 고택이 있는 정여창 선생 생가 마을도 저 산 자락입니다.

 

시절 인연이 안 좋아 나쁜 왕을 만나 불행한 죽음을 맞았지만,

양지 바른 곳에 고향을 내려다 보며 좋은 곳에 누워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 청계 서원과 김일손 선생

 

남계 서원 바로 옆에 청계 서원입니다.

 

청계 서원은 조의제문 사건으로 참형을 당한

김일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 있는 서원입니다.

 

김일손 선생이 젊은 시절 이 곳에 머물면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여창 선생과 김일손 선생.

 

두 사람은 스승 김종직 선생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스승의 문하에서 함께 도학을 배운 도반 지간입니다.

 

좋은 스승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받을 인연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연산군 치하의 사바 세계에서 험한 꼴 보고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죽은 후에는 남계, 청계 서원으로

사이좋게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청계 서원 마당에는 품격 있는 늙은 노송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남계, 청계 서원에서 공부했을 학동들은

소나무에 올라 장난도 치고 그늘 밑에서 놀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지난 밀양 답사 때 내가 가이드를 하면서 스승 김종직을 공부했었는데,

이번 함양 여행을 통해 그 제자인 정여창과 김일손과 만날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