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163) 아나함 경지의 비구 스님 이야기
<법구경(163) 아나함 경지의 비구 스님 이야기>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나함의 경지에 있던 한 나이든 비구 스님과 관련하여
게송 218번을 설법하셨다.
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제자들로부터
스승께서는 어느 경지에 이르셨느냐는 질문을 받아도
도무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비구는 아나함 과를 이룬 성자로서
수행의 네 과위 중 아라한과의 아래인 세 번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는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의 경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비구는 결국 아라한이 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비구는 자기가 아나함 과에 도달했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 비구 스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아무런 수행의 과(果)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여 스승을 매우 가엾게 여겼다.
그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스승이 어디에 태어났는지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너희 스승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나함을 이루었기 때문에
지금은 숫다왓사 브라흐마 천상 세계에 태어났느니라.
너희 스승이 그 경지에 올라 있었으면서도
자기의 경지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스스로 그 정도의 경지밖에 성취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생전에 아라한 과를 성취하려 했던 때문이니라.
너희들의 스승은 이제 머지않아
모든 집착과 욕망에서 해탈하는
더욱 향상된 경지로 올라가게 될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그는 으뜸가는 진리 니르바나(열반)를 성취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마침내 그 경지에 이르러
욕망에서 벗어났고, 또 집착에서도 벗어났다.
이러한 그를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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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향사과
초기 불교에서는 수행의 경지, 수행의 단계에 대해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라는 말을 합니다.
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는
수행을 통해 더 이상 중생이 아닌 성자(聖者)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1) 수다원 도(향), 수다원 과
2) 사다함 도(향), 사다함 과,
3) 아나함 도(향), 아나함 과,
4) 아라한 도(향), 아라한 과 의 모두 4단계가 쌍으로
8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향)'는 수행의 단계,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며,
'과'는 수행의 열매, 결실을 성취했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10가지 장애(번뇌)로 구체적으로 나누어
각각의 단계에 따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수다원부터 아라한까지의 단계적인 수행자(성자)의 경지가 결정됩니다.
2. 수다원
첫번째가 '수다원'의 단계입니다.
수다원은 한문으로는 "예류(預流)"라고 번역합니다.
범부 중생에서 이제 성자의 흐름에 들어섰다는 의미입니다.
수다원의 과위에 오르면 7번 정도만 윤회하면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수 있다고 합니다.
수다원과는 다음의 3가지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첫번째 장애는 5온을 영원한 자아로 보는 견해입니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오온을
영속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마이라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중에 부활할 때 자신의 몸도
불멸의 몸이 되어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나중에 부활할 때
자신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고 합니다.
자이나 교의가르침을 보더라도
우리 안에는 아주 깨끗한 순수 영혼이 있는데,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고 욕심으로 때가 끼어
이 순수 영혼을 가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특히 고행)을 통해 이 때를 없애면
영원 불멸의 순수 영혼을 회복한다고 합다.
이렇게 몸이든, 정신이든 뭔가
영속하고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뭐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불교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이런 것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왜 부처님은 몸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보라고 하시고,
수행자들을 무덤에 보내서 퇴색한 뼈를 보며
이것을 관하라고 하셨나요?
삶의 허망함, 무상함을 보아야지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른 수행의 마음이 나온다고 보신 것입니다.
즉, 색,수,상,행,식 의 5온은 영원한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보자면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확연히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자신의 인격이 훌륭하고 좋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이면
그 잘못된 견해에 의해서 바른 수행의 길에서 엇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잘못된 견해가 주는 어리석음,
즉 무명의 타파라는 첫 출발을 중시합니다.
두 번째 장애는 사성제, 연기, 인과에 대한 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이고,
그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
이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믿는가요?
연기란 "조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과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는가요?
인과의 가르침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가르침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믿고 수용하는 마음을 확고히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3번째 장애는 미신적인 제사 의례, 신에 대한 의식,
터부(금기)에 대한 집착이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묘자리를 잘못 쓰면 자손이 불길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부적을 붙이고 연례 행사처럼 사주팔자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이나 조상에 대한 제사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러한 의식과 행위가 자신에게 복과 재앙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을 주는 것도 재앙을 주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인과라는 것을 믿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므로 자신의 마음이
신이나 제사나 점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복락이 신이나 제사나 점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 좋은 인간 관계를 맺음으로서
참다운 복락이 오는 것을 믿고
부처님이 제시하신 다르마에 의지하므로
이러한 말에 귀가 쏠깃하지 않습니다.
불자라고 하면서도 미신적인 제사 의례나
금기(터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수다원은 인과와 연기에 대한 믿음이 있고
부처님의 법(다르마)에 의지하므로
이러한 미신적 의식으로 자신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것에 대해 흔들림이 없습니다.
수다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바른 사유의
기본 틀거리를 확고하게 잡아 나가야 합니다.
수다원은 다른 말로 하면 삼귀의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의지하고
법(다르마)를 믿고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수다원이 될 수 있습니다.
3. 사다함
이 수다원 위에는
두번째 단계인 사다함이 있습니다.
사다함은 '일래(一來, 한번만 오는 자)'라고 하는데,
한번만 더 이 인간계만 윤회하면 해탈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심리적인 면은 성자의 이 두번째 단계부터 들어간다고 하는데,
사다함은 다음의 4번째, 5번째 장애가 현저하게 줄어든 존재를 말합니다.
4번째 장애는 감각적 욕망입니다.
바로 이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좋다, 싫다 는 대상에 지나치게 탐착하고 구별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다함에서는 이러한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이
현저하게 없어지고 평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5번째 장애는 악의(惡意)입니다.
불쾌에서 오는 혐오감을 악의라고 말합니다.
불쾌하면 혐오감이 생기고 그러면 증오와 악감정으로 가기 쉽습니다.
감각적인 쾌락과 악의에서 오는 혐오가 현저하게 줄어들면
복수심, 증오심, 질투심, 원한 등과 같은 거칠고 큰 악의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다함 단계에서도
짜증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다함의 단계는 이와 같이 4번째 장애인 감각적인 욕망,
5번째 장애인 악의가 현저하게 약화되고 줄어든 상태입니다.
4. 아나함
세번째 단계가 아나함입니다.
아나함은 흔히 '불환(不還: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번역하는데,
더 이상 인간 세상에는 오지 않고
천상에 머물다가 바로 해탈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 아나함은 앞의 사다함에서 이야기한
감각적 쾌락과 악의를 완전히 제거한 단계입니다.
5. 아라한
네번째 단계가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한문으로는 '무학(無學)', '살적(殺敵)'이라고 번역하는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자, 또는 번뇌와 장애의 적을 모두 제거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앞의 5가지 장애에 나머지 5가지 장애를 모두 제거한 존재입니다.
6번째 장애는 물질적인 세계인 색계(色界)에 대한 욕망이고,
7번째 장애는 정신적인 세계인 무색계(無色界)에 대한 욕망입니다.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사라진 아나함 단계는 매우 편안하면서도 즐겁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음으로 당당하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고양된 정신 작용과
평화롭고 좋은 것을 추구하는 집착은 존재한다고 합니다.
아라한 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집착마저도 끊어야 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을 비롯한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초연해 있어야 하고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정의 단계가 보다
깊어지고 높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8번째 장애는 아만심, 교만심입니다.
자신이 이만한 수행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하는
아만심, 교만심은 아나함 과에서는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만심, 교만심은 아라한 과에 도달하기 직전 단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아만심, 교만심은 끊기 쉬운 번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9번째 장애는 '들뜸과 두려움'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들뜨거나 처지거나 하는 마음이 생기고,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라한은 이러한 들뜸과 두려우미 없이
마음이 늘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번째 장애는 총체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보통 아라한들은 아라한이 된 후에
자신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자증하는 선언을 하는데,
자신이 아라한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회의나 의심이 없어져야 합니다.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아라한이 되었는데도
아라한인줄 모르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0가지 번뇌의 장애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6. 윤회에서 벗어남
이번 이야기의 스승 비구 스님은
3번째 단계인 아나함에 이른 성자였습니다.
그는 감각적 욕망을 탐하는 것과
불쾌에서 오는 혐오감인 악의에서 벗어난 존재였고
마지막 아라한 과를 얻기 위해 수행했던 진실한 수행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천상 세계에서 수행하면
더 이상 생사의 흐름(윤회)에 들지 않고
아라한 과에 오르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성자였던 것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아나함은 자신이 아나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이 없기에
그 이름을 아나함이라고 부를 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명성, 이름에 대한
명예욕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묵묵하게 수행하는 성자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스승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아나함에 이르러
아라한 과를 향해 나아가는 스승 비구 스님에 대해
최고의 칭찬과 찬사를 보내십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의 향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