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학과 불교 / 승려 출신 서장옥의 삶

1. 스님 출신의 동학 지도자, 서장옥
동학 교조 최제우 선생이 죽은 후
동학 교단은 최시형 선생이 주가 되어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최시형 선생과
노선을 달리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의 지도자가 바로 서장옥입니다.
동학 혁명을 일으킨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서장옥의 제자였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매천야록>을 지은 유학자이자,
을사조약이 일어나자 자결한 황현이 지은
<오하기문>이라는 책에 의하면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처음 동학이 그 무리를 포(布)라고 불렀는데,
법포(法布), 서포(徐布)가 있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들었는데,
그의 호가 법헌(法軒)이었기 때문이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들었는데,
그는 수원 사람이었다."
이처럼 최시형 선생과 대등하게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정도로
동학 교단 내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서장옥은 "서인주"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승려 출신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동학 남접(전라,충청 서부)의 지도자로
남접 가운데서도 호서(충청 서부) 지방
동학교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따르면
서장옥의 경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월 선생 시대에 서장옥(徐璋玉),
호는 일해( 一海)라는 사람이 있어
동학 교단의 제의(儀制) 등 모든 것을 많이 만들었다.
그는 본래 불도(佛道)에 있었으며,
30여 년간 많은 수양을 닦던
선객(禪客)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
그의 사람됨이 신체는 비록 조그만하나,
용모가 빼어나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지심(敬畏之心)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사람은 도승(道僧)이라거니,
이인(異人)이라거니,
진인(眞人)이라거니
세인들에게 한참 동안 말이 많았다.
그러나, 갑오난(甲午亂:동학 혁명) 때를 당하여
남접(南接)이라고 지목을 받는 전봉준과
서로 밀통(密通)이 있다 하여
한참 동안은「사문의 난적이오 국가의 역적이라」는
성토를 받아 온 일이 있었다."
이처럼 서장옥은 약 30년동안
불교에 몸담은 스님 출신으로 동학에 입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승려 출신답게 불교 의식을 채용하여
동학 의식을 새롭게 정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가 스님 생활을 그만두고 환속하여
동학에 입교한 이유와 시기는 정확치는 않으나,
1885년 이전으로 판단됩니다.
1884년에 서장옥은 청주에서 주로 살았으며,
이때 충청도 일대에서 포덕에 열중하던 최시형을 알게 되었고,
1885년 9월 최시형이 상주에 은거할 때
서장옥, 황하일이 봉공했다는 기록을 볼 때
1885년 이전에 입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장옥은 1889년 10월 관에 체포당하는데,
최시형은 윤상오 등의 요청에 보석금을 마련하라 지시하고,
밥 먹을 때마다 서장옥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교도들에게도 따라 할 것을 지시할 정도로 서장옥의 영향력은 컸다고 합니다.

2. 독자 투쟁 노선
그런데, 1890년대 이후로 서장옥은 최시형 선생과 노선을 달리하게 됩니다.
최시형 선생이 온건적이고 종교적인 노선이었다면,
서장옥은 강경하고 사회혁명적인 노선을 취합니다.
1892~93년도에 일어난 동학의 삼례, 금구, 보은의
최제우 교조 신원 운동도 그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돈화의 <천도교창건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임진년(1892) 정월에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이
동학을 엄격히 탄압하고
동학도인을 해치고자 하는 등 탄압이 극심해지자
이해 7월에 서장옥,서병일 두사람이 최시형을 만났다.
그들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구실로 일어설 것을 굳게 요청하였으나
시기 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가
다시 이해 10월에 위 두사람이 다시 요청하고
여러 도인들이 함께 청하니
최시형도 어쩔 수 없이 입의문(立義文)을 지어 전국 각지에 보내었다.
이에 서장옥, 서병학 등이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에게 상소문을 보내고
동학도인들에게도 격문을 보내어 11월 1일을 기하여
각지 접주들로 하여금 자기 포내 도인들을 이끌고
전라도 삼례역에 모여 교조 신원 운동과
동학 탄압을 중지하라는 집회를 가지도록 하니
이 때 수천명의 교인이 모여들었다."
서장옥은 이 때 격문을 띄울 때에
특히 불교의 예를 들며
"불교 같은 경우도 서산,사명 같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을 배출하지 않았느냐"
면서 동학을 사도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동학교조 최제우와 구속자의 석방, 동학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양인과 일본인들의
개항장에서의 횡포를 비난하며 천하인민이
"광제창생 보국안민(널리 민중을 구제하고 나라를 도움)"을
목타게 바라고 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서장옥는 그가 주동이 된 삼례 집회를 해산하러 온
전라도 감영군 앞에서 당당하게 처신하여 이름이 높았습니다.
삼례 집회 당시 솟장을 받은 전라 감사는
감영 장수인 김시풍에게 명하여
병사 삼백여명을 거느리고 집회를 해산케 하였습니다.
삼례에 와서 김시풍이 좌우에 병졸을 거느리고
"태평성대에 어찌 도당을 이끌고 민심을 현혹시키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서장옥은 "우리 도는 충군효부모(忠君孝父母)의 도로
안심수도(安心修道)하거늘 탐관오리가 도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살상하기에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를 금해 달라는 글을 올린 일이지 어찌 민심을 현혹케 한 일이냐?"
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김시풍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자 서장옥은 웃으면서 답하기를
"칼 받기야 어렵지 않다. 치려면 쳐봐라?"라고 당당하게 나오자 김시풍이
"동학이 난당(亂黨)이라 들었는데 금일에 와보니 그게 아닌 것을 상관에게 고할 테니
각자 해산하여 귀가하여 수도(修道)에 힘쓰라"고 설득하자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삼례 집회 후 자신감을 얻은 동학 지도부는
서울로 올라가 왕에게 직접 상소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1893년 2월 동학지도부는 광화문 복합 상소를 결정하고
박광호 등 40여명의 교인들로 하여금
과거보러 가는 유생인 것처럼 가장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광화문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때 서장옥과 서병학은 동학 지도부의 뜻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내세움으로서 틈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서장옥, 서병학 두사람이 내세운 다른 주장이란
교도로 하여금 병복(兵服)으로 환복(換服)하게 하고
관군과 협동하여 정부 간당을 소탕하고
크게 조선 조정을 개혁하자는 것으로서
복합 상소보다는 무력을 통한 항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간의 의견 대립은
당시 포도대장 신정희에게 비밀리에 전해져
경계가 심해지고 수사가 엄중해지자
결국 서장옥 등의 주장은 최시형을 비롯한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 교단 상층 지도부의 반대로 불발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한편, 1893년 서울 상소에 즈음하여
동대문, 남대문, 교회, 선교사의 집 등에는
격문이 붙어 민심이 동요하였습니다.
서양교회와 일본상인들을
주대상으로 하여 붙인 격문의 내용은
"너희는 너희 나라로 떠나라.",
"3월 7일까지 떠나지 않으면 토벌하겠다."는 내용으로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외국인 거류민들을 철수할 움직임까지 보였는데
서장옥의 행동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경파인 서장옥 일행은
기존의 지도부와 갈라서기 시작했습니다.
1893년 2월의 서울복합상소에 이어 열린
3월의 보은 집회에서도 서장옥은 동학 강경파의 대표자였습니다.
보은집회에서는 이들 강경파에 의해
"왜놈들과 양놈들을 몰아내자(斥洋斥倭)"라는
공식적인 반외세 구호가 나왔습니다.
"... 지금 왜놈들과 양놈들의 도적떼가
나라 한복판에 들어와 크게 어지럽힘이 극에 달했으니
...
임진년(임진왜란)의 원수와 병인년(병인양요)의
치욕을 어찌 말로 다하고 어찌 잊을수 있을손가.
..
우리 수만 명이 죽음을 서약하고
왜놈들과 양놈들을 소탕하여 나라에 크게 보답하고자 한다."(보은 집회 발문)
당시 그는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 때문에
전봉준 등이 지도하는 남접 호남 조직과 노선을 같이 하였습니다.
북접이 주도한 충북 보은 집회와 별도로
호남 지역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중심이 되어 개최한
전라도 금구 집회 때는 약 3만명이 참여하여
훨씬 과격한 척양척왜의 주장이 외쳐졌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동경 아사히 신문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1895년 5월 11일자 신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서장옥의 제자로 호남의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이 있는데
이들은 최시형보다 서장옥의 능력이 위에 있다고 믿고 따름으로서
마침내 남접(南接)이라 부르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최시형의 제자들이 최시형에게 권하여
북접(北接)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계기로 동학의 남접, 북접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고 있다."
1893년 11월, 드디어 전봉준 등의 지도 하에
고부 일대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린 동학 농민군이 일어났습니다.
최시형은 남접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임금님께 근심을 안기고 생령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하늘을 거스르고 스승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운이 아직 열리지도 않고 때도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경거망동하지 말고 진리를 더욱 열심히 연구하라."고 반대하였습니다.
한편, 1894년 2월 19일 당시 고부군 동음면 신촌리에서
동학농민전쟁 1차 행동준비를 구체화하였는데,
서장옥은 전봉준,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모여 기병 모의를 하고
호서 지방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출격하였습니다.
이렇게 1차 농민전쟁이 계속되자 최시형은
서장옥을 전봉준과 한 통속으로 치면서
"우리 교를 핑계 대고 속으로 역적의 마음을 품고 있다."고 비난하며,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니 빨리 모여 그들을 쳐야겠다."까지 하였습니다.
1894년 3월 농민전쟁이 본격화되고
충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서장옥은 불행히도
그해 6월경 관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 소장의
「한국동학당봉기일건(韓國東學黨蜂起一件)」이라는 문서가 있는데,
그 중 "정두재"라는 농민군 간부 한 사람이 1894년 7월에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그 본문의 취지는 최시형 등 북접파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 뒤
일본 침략에 항거하고자 전봉준의 지휘를 받아 바로 거병하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문의 서두 부분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습니.
"一海兄(서장옥)은 지난 22일 옥문을 나왔으나,
동일 4시경 좌포도청에 재수감되어 고문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의외로 천은은 끝이 없어 지난 28일 4시경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감축이 한이 없다."
그뒤 석방되어서도 아마 사경을 헤맬 정도의 고문을 받아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9월 장위영 영관 이두황 등이 변절한 동학지도자 서병학을 앞세우고
경기도와 충청도 동학농민군 토벌을 다닐 적에
"동학당을 표방하는 허문숙, 서장옥 등의 5~6만명이 충주 용수포에 모여 있다."라는
정탐보고에서 그의 행보는 나타납니다.
고문으로 인해 몸이 피폐한 속에서도 계속 싸움을 계속해나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 2차 봉기 때에 청주 병영을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청주 병영은 함락되지 않고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동학 혁명이 실패로 끝난 직후에도
서장옥은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0년 동지 손사문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1894년에 그의 나이 55세였으니, 환갑인 61세에 목숨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3. 스님들의 동학 혁명 참여
한편, 동학 혁명 시에는 서장옥 뿐만이 아니라 많은 승려들이 참가하였습니다.
보은 집회 당시 전라도 금구에서 전봉준 등의 남접 집회에
불갑사의 인원, 선운사의 우엽, 백양사의 수연 등의
호남 지방의 승려들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남접 쪽에는 북접이 주최하는 보은 지방의 동정을 살피려고
'긍엽'이라는 승려를 파견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 혁명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격전지였던 공주 전투에서
승려 대장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그 이름과 활동상황은 제세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장성 백양사 승려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우금치 패전후 전봉준의 도피 행로가
입암산성에서 백양사를 거쳐 순창의 피로리로 들어간 것을 보아
전봉준은 여러 모로 백양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울러, 공주 우금치 패전 이후 동학 농민군의 투쟁에 호응하여 일어난
진산 지방의 봉기에 승장이 활약한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동학 혁명 전반에 걸쳐 스님들이 다수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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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혁명은 단순히 동학 교도들만의 봉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동학이 가진 평등의 사상, 새로운 세상인 개벽에의 희망,
반외세의 구호가 구질서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반체제, 양심적 지식인들이 농민들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범 김구처럼 후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떨친 인물도
청년기에 동학 혁명에 참여하고 실패후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한 것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승려로서 30여년간이나 선객으로 수행을 닦던
서장옥도 비슷한 부류의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어떤 계기로 승려를 그만두고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 교단을 이끌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는 세상과 유리되어 절에만 머물던 승려는 아니라
세상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승려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고통받는 세상을 구원할 현실적인 대안으로
탈세속적이었던 불교보다는 동학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동학 관계 기록에서 동학은 유불선 3교를 합일하였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다음의 측면을 취했다고 합니다.
"자비 평등을 마음에 두고,
몸을 버려 세상을 구하고,
도량을 정결하게 하며,
신주를 외고 손에 염주를 쥐는 것"
동학이 주장하는 "보국안민, 광제창생,평등사상"이
불교의 중생구제, 평등사상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장옥은 동학에서 불교적 가치를 구현하려 했으며,
불교적 의식을 활용하여 동학 의식 확립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그는 동학에 입교하여 대사회적인 면에서
반외세, 반봉건에 철저한 무장 항쟁을 주장하였습니다.
동학 입교시에는 교주인 최시형에게 큰 기대를 받았지만,
그의 적극적인 사회 변혁적 노선이 종교적인 포교에 열중했던 최시형보다는
오히려 전봉준 등과 노선을 같이했던 것입니다.
무력적인 방법보다 종교적인 수양으로 도인을 양성하고
때를 기다리려했던 최시형의 주장이 옳았을런지는 모릅니다.
동학 혁명이 반봉건,반외세라는 시대 정신에
부합하는 올바른 주장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성공을 담보할 물적, 인적 토대가 성숙되지 않은채 일어난
동학 혁명의 실패는 수십만의 동학 교도가 죽음을 당하고
동학도 이후로 꽃이 지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동학의 저항 정신과 시대 정신은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자산이겠지만,
성급했던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고통받던 민중들의 모습 속에서
서장옥은 하루빨리 세상을 바뀌어지기를 바랬는지 모릅니다.
최소한의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막고,
외세의 침략에 두려워하면서도 자국 백성들을 억압하는
당시 정부의 행태에 대해 무력을 써서라도 새로운 세상을 바꾸고 싶었을 것입니다.
서장옥은 동학 혁명이 일어났을 때 55세의 나이였고,
그해 잡혀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 속에 육신이 피폐화된 상황에서도
농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싸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시시비비를 떠나,
그 열망과 강단만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민출신으로 가혹한 군역 등을 피해 입산한
당시 많은 승려들도 동학 농민들과 이해 관계가 같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장옥처럼 환속하여 동학에 입교하여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도 있었고,
집회나 전쟁의 와중에 많은 스님들이 직간접적으로 동학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가 스님들에게도 행동을 요구하는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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