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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4.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 경허 선사(2) / 경허 선사의 교화

by 아미타온 2025. 11. 7.

4.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 경허 선사(2) / 경허 선사의 교화

 

<합천 해인사 희랑 대사상>

 

후대 사람들은 경허 선사를

‘한국의 달마’, ‘선의 혁명가’,

‘한국 근세선을 중흥시킨 대선장’이라고 칭송을 합니다.

 

경허 선사는 1881년 깨달음을 얻은후

주로 충청·경상 일대의 사찰에 주석하면서

조선 중기 서산 대사 이후 끊겼던 간화선의 명맥을 이어가며

선풍을 진작하게 됩니다.

 

경허 선사는 격의를 벗어난 파계적 모습을 보였지만,

여러 전법 제자들을 길러 내었고

이들로 인해 현대 한국 불교에서 화두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불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경허 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전법의 길을 살펴보며 현대 한국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1) 경허의 삼월(三月) 

 

경허 선사는 1881년 서산 천장암에서 오도송을 지은 후

약 20여년 천장암,동학사, 개심사, 마곡사, 부석사(서산) 등 

충청 지역 사찰에 머물면서 설법과 담론을 통해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경허 선사는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화두를 참구할 것을 주장하며,

그의 지도 아래 여러 유명한 제자들을 길러내게 되었습니다.

 

"부처가 되려면

우리는 자기의 몸에 있는 주인공인

마음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내 마음을 찾으려면

세상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해야 한다.

 

보고 듣고 일체 일을 생각하는

놈(주인공)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

모양이 있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인가,

큰가 작은가, 누른가 푸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의심을 내어 고양이가 쥐잡듯, 닭이 알을 안 듯,

늙은 쥐가 쌀 든 궤짝 쫓듯 하여

항상 마음을 한 군데 두어 궁구하여

잃어버리지 않고 의심하여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 말고

그저 있을 때라도 의심하여 지성으로 하여 가면

필경에 내 마음을 깨달을 때가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모기가 쇠소 등어리를 뚫는 것과 같이,

부리가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경허 선사가 충청 지역에 머물 당시

경허 선사 문하에서 "경허의 세 달(三月)"로 불리는

혜월, 수월, 만공의  세 스님을 길러내었습니다.

 

혜월(1861~1937) 스님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예산 정혜사에 머물때

경허 선사로부터 참선 공부와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가르침을 받고

수행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1890년 경허의 첫 전법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도리사, 파계사, 통도사, 내원사, 부산 선암사 등에

머물면서 근대 선풍을 드높였습니다.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항상 일을 했고,

옷차림도 일꾼 차림이었으며,

까치나 까마귀 같은 산새가 날아와 몸에 앉을 정도로

자비심이 깊은 스님으로 보시하기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부지런한 개간으로 유명하여

부산 선암사 주지 시절에는

손수 2,000여평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어서

당시 교계에는 "만공의 건축, 혜월의 개간, 용성의 역경"이라

평할 정도로 이름 높은 스님이이었습니다.

 

<서산 천장암 벽화>

 

수월(1855~1928) 스님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젊은 시절 머슴살이를 하다가 29세에 서산 천장암으로 출가했습니다.

 

경허 선사는 수월 스님이 비록 글을 배우지는 못해

학식은 없었어도 마음이 순진무구한 법기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가르치지 않고

<천수경>을 외우게 하여

일평생 수행 방편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수월 스님은 <천수경>만 외우는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어

도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언제나 하심하는 언행과 처신을 보였습니다.

 

스승에 대한 공경심이 대단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행하다가

경허 선사가 북쪽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승을 찾아 멀리 함경도와 만주 지방을 유랑하며 교화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스승의 거처를 확인하고 주변을 맴돌다

1912년 경허 선사가 입적하자 장례를 치룬 스님이었습니다.

 

그 후 만주로 들어가 1921년 만주 왕청현에 화엄사를 짓고

8년간 수행하다가 입적하셨습니다.

 

< 경허 선사의 제자 만공 선사 사진 / 공주 마곡사 조사당 >

 

만공 스님(1871~1946)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14세에 동학사에 출가했다가

천장암으로 옮겨 경허 선사의 시봉을 했습니다.

 

경허 선사는 만공 스님에게 글을 가르치고 나서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주고

간화선(화두선)을 참구하라고 했습니다.

 

만공 선사는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3년간 용맹정진했고,

1904년 통도사 백운암에 머물때 깨달음을 얻어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승인 경허 선사를 평생 존경하여

'경허 전법 제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이 일대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후일 한국 불교 조계종의 양대 문중 중의 하나인 

'덕숭 문중'의 개조로서도 유명한 선사였습니다.

 

<덕숭총림 수덕사 일주문>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덕숭 문중은

경허 선사와 그 제자인 만공, 금오(金烏·1896~1960) 스님을 배출했습니다.

 

만공, 금오 선사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법주사, 불국사, 금산사, 마곡사, 용주사 등으로 퍼져나가

오늘날 수덕사 문중을 만들었습니다.

 

수덕사가 덕숭산 아래 있기에

수덕사 문중을 흔히 ‘덕숭문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경허 선사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약 20여년간을 호서(충청) 지방에 주로 머물며

여러 가지 기행으로 유명하였으며, 

혜월, 만공 등의 제자들을 길러내며 선풍을 진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2) 정혜 결사를 통해 선풍을 일으키다.

 

1898년 경허 선사의 나이 50세가 넘었을 때

합천 해인사로부터 참선 지도를 위한 조실로 모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경허 선사는 20여년간을 머물던

충청 지방을 떠나 주로 경상도 지방에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경허 선사는 1898년 부산 범어사에 머물다가

이듬해 법보종찰로 유명한 해인사로 옮겨 가게 됩니다.

  

그 때 경허 선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회를 토로하였습니다.

 

"......내가 지난 기묘년(1879)년 겨울에

계룡산 조사당에 있으면서

조사 활구를 참구하다가 홀연히 뜻을 얻었다.

 

뜻이 맞는 이와 함께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나, 

그 때 유행병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의 의지 또한 굳세지 못하여

여유 있게 노닐며 속에만 쌓아두고 어촌과 주막으로 방황하며

또는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을 찾아 쉬며 방황했다.

 

그 뒤 소요 사태가 잇달아 일어났으며

세상일이 어지러워

몸조차 감출 겨늘이 없거늘 

어찌 다른데 생각이 미치겠는가.

그럭저럭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

 

이에 해인사의 초청을 받고

스스로 부처님 은혜가 막대함을 생각하고,

만 분의 일이라도 그 은혜를 갚고자 

바랑을 짊어지고 합천 해인사로 갔다..."

 

<합천 해인사 장경각>

 

1899년 해인사는 고종 황제의 명으로

팔만대장경 인경 불사를하게 되었습니다.

이 불사에 경허 선사는 증명 법사로 추대되었습니다.

(인경불사 : 팔만대장경 경판에 종이를 찍어 경전을 조성하는 불사)

 

경허는 이 불사를 진행하고

해인사에 새로 선방을 지었으며

새로 지은 수선사(지금의 퇴설당)에 거주했습니다.

 

1899년 겨울 동안거를 하던 도중

화롯가에서 동참한 승려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결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결사(結社)는 수행을 목적을 두고

수행의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모여 수행하는 것으로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가 유명합니다.

 

"..... 마침 선방을 새로 건축하여 여

러 선덕들과 참선을 하다가 겨울 한철을 나게 되었는데,

하루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옛 사람들이 결사(結社)하여 수도하던 일이 화제가 되었다.

 

여러 선덕들은 모두 잊었던 일을 문득 생각해낸듯 그

원력과 신심이 물이 솟아오르듯 산이 빼어나듯

서로 만남이 늦었음을 한탄하면서

곧 결사의 동맹을 의논하여 나를 맹주로 추대하였다.....

 

내가 옛날의 소회를 생각하여

부처님 은혜가 막대한지라

재주의 용렬함과 성품의 단정하지 못함과

도에 충실하지 못함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사양함도 없이 허락하였다..."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 부처님>

 

경허 선사는 해인사 선방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작성하고 결사를 추진하였습니다.

 

"정혜(定慧)를 함께 닦고,

도솔천에 같이 나고,

세세생생 도반이 되어 마침내 함께 정각을 이루며

도력이 먼저 성취되는 이가 있으면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주기로 서약하고

이러한 맹세를 어기지 말자..."

 

정혜는 고려 시대 정혜 결사를 이끌던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의 "정혜쌍수" 입니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인데,

경허 선사는 보조 국사의 결사 정신을 계승하려고 한 것입니다.

 

경허 선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혜결사를 통해 후생불인 미륵 보살이 머문다는

도솔천에 함께 나기를 발원하고 있습니다.

 

경허 선사는 <결사문>에서

당시 교계의 풍토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정법이 침체되고 미약하여 삿된 도가 치성하니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의 불을 끄겠는가 하고 한탄함은

이미 청허(서산) 노사의 교화가 융성하던 그 때도 있었거늘

하물며 오늘날일까 보냐.

....

대개 미혹한 자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조종(祖宗)의 말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을 성인들의 높은 경계라고 밀쳐 버리고

다만 현실적인 것에만 힘을 쓰는데,

혹은 손에 염주를 잡으며 입으로 경을 외우고

혹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그리고 공덕만을 바라니 깨달음과는 틀렸고

도에는 멀어짐이라.."

 

경허 선사는 당시 불사나 염불을 통해

내생의 개인의 공덕에만 의존하는 기복 신앙을 비판하고

간화선을 통한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정혜를 함께 닦아 도솔천에 나며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해인총림>

 

경허 선사는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였으며,

함께 공부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지침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습니다.

 

"대저 사람의 목숨이 무상하여

오늘에는 비록 보존되나 내일을 보존하기 어렵나니

이 결사를 창설하는 이인들 어찌 오랫동안 세상에 머물겠는가.

 

바라건대 후인들이 명심하여

이 정혜결사의 의의를 잊지 말고

오래도록 전하여 미혹한 중생들을 제도하도록 하자."

 

경허 선사의 결사에는 총 18명이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이 분들은 근대 한국 불교에서 선승으로 이름을 떨친 분들이었습니다.

 

그 때 참가한 분들 중에 한암(1876~1951) 선사는

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지낸 선사로서 

주로 오대산 상원사에 거주하였습니다.

 

후일 한국 동란때 상원사가 폭격의 위험에 처하자

좌탈 입멸한 일화로 유명한 스님으로

경허 선사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은 법제자였습니다.

 

남전(1868~1936) 스님은

1883년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1904년 해인사 총섭이 되었으며,

도반인 도봉봉, 석두, 만공, 성월 등의 스님과

선학원을 창설하여 일제 시대때 조선 선불교를 지키려고 노력한 분이었습니다.

 

제산(?~1932) 스님은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평생 수행에 정진한 분이었는데,

후일 김천 직지사에 가서 벽안당에 틀어앉아

평생 장좌불와 수행을 한 분으로

당시 교계에서는 '수행 제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밀양 표충사에서 법력을 드날린

현주, 혜봉 스님 등의 유명한 선승들이

당시 결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오대산 월정사 대적광전>

 

훗날 조계종정을 지낸 한암 스님은

경허 선사의 지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해년 가을에 호서 지방에서 옮겨 주석하시니,

영남 가야산 해인사였다.

때는 고종 광무 3년(1899)이라,

깊은 뜻을 밝히고자 신칙을 내리시니,

경을 인쇄하고, 또한 수선사를 세우시며,

학자들과 거처하시니,

대중의 전부가 경허 화상을 추대하여 종주로 모셨다.

 

자리에 올라 거량(擧揚)하여 본분을 보이사

불조(佛祖)의 이심전심법(以心傳心法)을

명백히 잡아 떨쳐 수용하시니

살활(殺活)과 기틀이 가위 금강보검이요,

사자의 위엄이 온전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다 견처가 있게 하시며,

집착을 끊어 없애고 속된 때를 말쑥이 씻어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는 듯 분명하게 지도하였다."

 

한편, 경허 선사는 이후 의욕을 가지고

전국의 폐쇄된 선방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1899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참선 수행자를 지도했고, 

1900년에는 구례 화엄사의 폐쇄된 상원암을 선방으로 복원했습니다.

 

이듬해인 1901년에는 남원 실상사에서 백장암 선방을 조성했고, 

화재로 불탄 덕유산 송계암으로 가서 암자를 복원했습니다.

 

<부산 범어사>

 

그리고, 1902년에는 부산 범어사로 가서

선방을 개설하고 선풍을 진작시켰습니다.

 

당시 부산 범어사는 통도사, 건봉사와 더불어

3대 부자 절로 알려져 있었으나,

참선하는 이가 없어 선방은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경허 선사는 범어사 계명암 선방에서 동안거 결제를 하며

다음과 같이 청규를 구체적으로 제정해 선원의 규범을 세웠습니다.

 

 1) 결제한 뒤로는 방부를 받지 말고

     방부를 들인 뒤에는 중간에 받지 말 것.

 

2) 방부 들인 뒤에 대중을 어지럽게 한다든지

    불화를 일으킨 이는 세번을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대중 공사를 붙여서 쫓아낼 것.

 

3) 대중이 함께 작업할 때 빠지거나 처지지 말고

     항상 서로 힘을 합쳐서 도와줄 것.

 

경허 선사는 범어사에서 당시 주지였던

성월 스님과 함께 노력하며 선풍을 진작시켰습니다.

 

경허 선사의 감화를 받은 성월 스님은

금강암, 안양암, 계명암, 내원암, 안심암, 원응방, 대성암 등의

부산 금정산 범어사 관내의 암자들을 후일 선방으로 개설하여

범어사를 선풍 진작의 본산으로 만들었습니다.

 

<선찰대본산 부산 범어사 일주문>

 

오늘날 범어사 일주문에 "선찰대본산"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성월 스님 때부터 조성한 참선 불교 수행 전통 때문입니다.

 

한편, 성월 스님 이후 용성, 동산 등 범어사 출신 스님들과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인사, 쌍계사, 화엄사 등으로 퍼져나가

오늘날 조계종 최대의 불교 문중이라고 일컬어지는

'범어 문중'이 후세에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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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보살상>

 

 

오늘날 한국 불교는 경허 선사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경허 선사의 교화 덕분에 한국 불교의 전통인 선불교가 계승되었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두 핵심 문중이 조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는 선 불교의 영향력이 강합니다.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하는 종단이고,

종정 스님이나 총무원장 스님도 대부분 선방 출신입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시민선방도 개설하여

일반 재가 불자들도 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이가 많습니다.

 

신라 말기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한 승려들이 귀국하여

지방에 9산 선문을 개창한 이후 한국의 선불교적 전통은

천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선불교의 전통은 자리를 잡아왔으나,

조선 중기 서산 대사 이후 뛰어난 선사가 배출되지 않아

명맥이 거의 끊겨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명맥이 끊긴 선불교의 전통이

오늘날 다시 자리매김하게 된데는

경허 선사의 공이 지대하다고 합니다.

 

경허 선사는 의상 대사처럼 엄정하게 계율을 지키지도 않았고,

원효 대사처럼 많은 저술을 남긴 스님도 아니었습니다.

 

경허 선사는 출가승의 계율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스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경상도로 넘어와 정혜 결사를 할 때는

청규를 정하고 엄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경허 선사의 문하에는 뛰어난 선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들 제자들에게 경허 선사는 매력있는 스승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공, 혜월, 수월, 한암 스님 등이

경허 선사를 공경하는 자세를 보면

스승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와 헌신을 다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경허 선사는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