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36) - 타력(1)>
1. 타력문
정토문을 '타력문(他力門)'이라고 합니다.
타력(他力)은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타력은 곧 '불력(佛力)'입니다.
타력문은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는
정토불교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타력문은 다른 종파의 가르침의 차이를
분별하기 위해 교판(敎判)이 행해졌습니다.
이행도(쉬운 염불의 길) vs 난행도(어려운 수행의 길),
타력도(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는 길) vs 자력도(자기 힘으로 수행을 성취하는 길),
정토문(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하는 길) vs 성도문(스스로 깨달아 성불하는 길)과 같은
교판이 그것입니다.
타력문은 이행도, 타력도, 정토문의 교판의 특지을 갖고 있습니다.
2. 타력문 교판의 원류, 십주비바사론
그렇다면 타력문 교판의 원류는 무엇일까요?
바로 용수 보살의 <십주비바사론>이란 논서입니다.
<십주비바사론>은 <화엄경> '십지품'에 대한 논서라는 뜻입니다.
보살 10지에 대해서 문답으로 논설하는
<십주비바사론>에는 <이행품(易行品)>이라는 독특한 품이 있습니다.
<이행품>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가지 물음을 통해 <이행품>을 쓰신
용수 보살의 문제 의식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물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묻는다>
이 아유월치 보살의 처음 일은 앞에서
“더 이상 물러섬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은
온갖 난행을 오랫동안 닦아야만 비로소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혹은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기도 하리니,
그렇게 되면 이는 큰 쇠퇴이자 근심이다.”
고 말한 것과 같다.
<조도법(助道法)> (<보리자량론>권3의 뜻)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성문의 경지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진다면
이야말로 보살의 죽음이라 하리니
곧 모든 이익을 잃게 되리라.
만약 지옥에 떨어진다 하여도
이와 같은 두려움은 나지 않겠지만
만약 2승의 경지에 떨어지면
크게 두렵고 무서워지리라.
지옥 속에 떨어지더라도
필경에는 부처까지 이를 수 있겠으나
만약 2승의 경지에 떨어지면
필경에는 부처의 도가 막힌다고
부처님께서 스스로 경전 가운데서
이와 같은 일을 해설하셨느니라.
마치 목숨을 아끼는 사람에게
머리를 베려는 것이 큰 두려움이듯이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만약 성문의 경지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마땅히 크게 두려워해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쉽게 행하는 길이 있어
빠르게 아유월치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말해 주기 바란다.
3. 불퇴전지에 이르는 길
‘아유월치(阿惟越致)’ 는 범어 ‘avivartika’를 소리로 옮긴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불퇴전지’입니다.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경지'로서 '정정취'라고도 합니다.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 한 단계 향상해야 합니다.
<화엄경>은 성불의 계위를 말씀하시면서 52단계을 설정했습니다.
그 중 ‘십지(十地)’는 41단계에서 50단계입니다.
용수 보살의 <십주비바사론>은
이 중 41계단인 '환희지'와
42계단인 '이구지'만 다룹니다.
그런데, 용수 보살이 말씀하신
'아유발치'는 바로 '환희지'를 말합니다.
'아유발치 보살'이란 곧 환희지에 이른 보살을 말합니다.
정토 신앙의 목적 또한 <나무아미타불> 염불해서
극락 가서 불퇴전지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에도 “극락국토에 태어나면
다 아비발치(불퇴전지)에 이른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행품>의 첫 번째 문제 의식은
보살이 다시는 물러섬이 없는 경지,
즉, 보살10지 중의 첫 단계인
환희지에 이르는 방법이 과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난행도(難行道)'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우선 먼저 제시되는 길은 ‘온갖 난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닦아야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인가요?
오래도록 난행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후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수 보살은 어떠한 후퇴를
염려하고 계시는가?
바로 혼자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성문’과 ‘벽지불’의 길로
떨어지는 후퇴를 염려하고 계십니다.
즉, 빨리 불퇴전지를 이루지 못하면
소승으로 떨어지는 것을 용수 보살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용수 보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소승)로
떨어지는 것을 '보살의 죽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문이나 벽지불로 떨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지옥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지옥 가면 갖은 고생 끝에
보살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있지만,
소승으로 떨어지면 소승에 안주하여
보살의 길을 갈 수 없슴을 크게 근심하고 있습니다.
불퇴전지를 위한 첫번째 방법론이
난행을 힘써 오래도록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소승의 경지로 후퇴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난행의 오랜 수행 외에
새로운 방법이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소승으로 후퇴하지 않고
빨리 불퇴전지(환희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첫번째 문제 의식에서
용수 보살은 <이행품>을 쓰신 것입니다.
4. 이행도와 난행도
그러면 그 답을 살펴보겠습니다.
<답한다>
그대가 한 말은 연약하고 비겁하며 큰 마음이 없는 것으로,
이는 대장부로서 기개가 있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원을 세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직 아유월치를 얻지 못한 그 중간에서는 마땅히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밤낮으로 정진하기를 마치 불붙은 머리를 구하듯 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도법(助道法)> (<보리자량론>권3의 뜻)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살이 아직 아유월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적엔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항상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은
보리를 구하기 위해서이니
언제나 부지런히 정진하되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을 구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이익만 이루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거늘
하물며 보살로서
자신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려면
이 2승의 사람들보다
억 배나 더 정진해야 할지니라.
그래도 그대가 만약 반드시
이 방편을 듣고자 한다면 이제 말하리라.
불법에는 한량없는 문이 있다.
마치 세간의 길에 어려운 게 있고 쉬운 게 있어서
육로로 걸어서 가면 괴롭고,
수로로 배를 타고 가면 즐거운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도 있고,
믿음을 방편으로 삼는 쉬운 행으로 빠르게 아유월치에 이르는 것도 있다.
동방에는 선덕불(善德佛)이시고
남방에는 전단덕불(栴檀德佛)이시고
서방에는 무량명불(無量明佛)이시며
북방에는 상덕불(相德佛)이시고
동남방에는 무우덕불(無憂德佛)이시고
서남방에는 보시불(寶施佛)이시고
서북방에는 화덕불(華德佛)이시고
동북방에는 삼승행불(三乘行佛)이시며
하방에는 명덕불(明德佛)이시고
상방에는 광중덕불(廣衆德佛)이신데
이러한 여러 세존께서는
지금 현재 시방 세계에 계시느니라.
만약 사람이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빨리 이르려고 하는 이라면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으로써
시방의 부처님 명호를 지니며 일컬어야 하리라.
만약 보살로서 이 몸으로
아유월치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려고 하는 이면,
이 시방의 부처님들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일컬어야 한다. "
용수 보살은 '이행도'에 대한 답을 쉽게 꺼내지 않습니다.
먼저 쉽게 불퇴전지를 구하려는 마음의 헛점을 경계하십나다.
불퇴전지를 얻기 전까지는 물러섬이 없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전심전력 노력해야 함에도 쉽게 길을 가려는 용렬한 마음의 헛점을 경계하십니다.
그 용렬한 마음은 연약하고 비겁하며,
대장부의 호연지기처럼 어려움 속에서 뜻을 이루려는
큰 마음이 없는 마음으로 쉽게 결과를 이루려는 어리석음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쉽게 불퇴전지에 이르려는 사람 또한
보살의 굳은 보리심을 잃지 말아야 함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보살의 굳은 보리심을 전제로 이행도의 가르침이 펼쳐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행도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용수 보살은 이행도의 핵심을 ‘믿음이라는 방편’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때 믿음의 대상이 되는 분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대승 불교에서 부처님은 당연히 한 분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 시방 세계에 다 계십니다.
용수 보살은 각 방위에 계신 시방의 부처님의 명호를 밝히십니다.
첫번째 문답에서 중요한 것은 시방의 부처님 명호를 밝히시며,
시방의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방편'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즉, 염불입니다.
보살의 보리심을 잃지 않고
불퇴전지(환희지)에 도달하려는 보살은
'염불'이라는 '믿음의 방편'을 통해서
결코 소승의 경지에 빠지지 않고
쉽게 불퇴전지(환희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문답의 핵심입니다.
믿음은 곧 염불입니다.
부처님에게는 본원력(보살 시절 성불을 위해 세운 원력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수 보살은 <보월동자소문경(寶月童子所問經)>을 인용하며
시방의 열 분의 부처님의 본원력을 설하시면서 본원력에 의지하여
반드시 환희지 보살의 불퇴전지에 오르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시방 세계에 계시는 열 분의 부처님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대표적으로 예를 들고 있는 분은 동쪽에 계시는 '선덕불'이라는 부처님입니다.
그 부처님에 대해서 설명하시며
나머지 아홉 분의 부처님에게도 다 통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방의 저 부처님(선덕불)의 본원력으로 인하여,
만약 타방의 중생들이 저 부처님 계신 곳에
여러 가지 선(善)의 뿌리를 심어서
그 부처님으로부터 다만 광명을 몸으로 닿기만 해도
곧바로 다시는 나지 않는 경지를 얻게 된다.
보월 동자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서
능히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곧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다.
나머지 아홉 분의 부처님의 일 역시 모두 이와 같다."
그런 뒤에 부처님 세계의 이름과 부처님의 명호를 설명합니다.
산문과 게송으로 함께 말씀하시는데,
서방의 아미타 부처님을 믿는 입장에서
서방 세계의 무량명불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5. 염불의 쉬운 길
산문과 게송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서방에는 무량명불(無量明佛)이 계신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무량하고 무변하고
강가의 모래 알 수만큼 많은 불국토를 지나서
'선(善)'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으니
'무량명'이라는 부처님께서 지금 계시면서 법을 설하신다.
그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무량하고 무변한 중생들을 비추신다.
서방의 선세계의 부처님은
'무량명(無量明)'이라 부르는데
몸의 빛과 지혜의 밝음은
한량없는 세계를 비추시네.
그 이름을 듣는 자들은
곧 불퇴전을 얻으리니
저는 이제 머리 숙여 예배 하고
생사(윤회를) 다하기 원합니다.
이 글을 통해 용수보살이 이행도의 가르침을 펴게 된
근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보살이 불퇴전지(환희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난행도를 닦아야 하는데,
오랫동안 난행도를 닦게 될 때
보살심이 없는 소승으로 빠져 버릴 위험성이 있다.
그 소승으로 빠질 위험에서 어떻게 벗어나
빠르고 쉽게 불퇴전지에 오를 수 있는가?
그것은 보살의 굳은 보살심을 갖고
불퇴전지에 오르려는 전심전력의 마음을 내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의 믿음의 방편의 이행도를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행품>의 첫번째 문답에서
용수 보살이 진정으로 가르치신 길입니다.
이 길은 쉽고 편하게 룰루랄라 가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두 번째 문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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