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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159) 손녀를 잃은 위사카 부인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5. 6. 12.

<법구경(159) 손녀를 잃은 위사카 부인 이야기>

 

<중국 난주 병령사 석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뿝빠라마 수도원(녹자모 강당)의 건립자인

여자 신자 위사카 부인과 관련하여 게송 213번을 설법하셨다.


사랑하는 손녀 수닷따가 갑자기 죽자

위사카 부인은  매우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녀는 위안을 받으려고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위사카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위사카여! 그대는 사왓티에서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만약 네가 사왓티에서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너의 손녀로,

혹은 아들로, 손자로 생각한다면

너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잠시라도 마음은 편안치 않으리라.

 

위사카여! 한 어린 아이의 죽음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느니라.

무릇 슬픔과 두려움은 지극한 애정 때문에 일어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귀여워함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귀여워함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귀여워함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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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덕제일 위사카 부인

 

큰 재산을 가진 부자였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과 믿음으로

녹자모 강당을 비롯한 수행터를 부처님께 공양하여

여자 재가 수행자 중에서 "공덕 제일"로 불리웠던 위사까 부인!

 

그녀도 사랑하는 손녀딸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귀여운 손녀딸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손녀딸이 죽자 건강을 해칠 정도로 크게 아파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사까 부인의 큰 슬픔을 보고

위로의 말씀과 함께 불법의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핵심은

귀여운 손녀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은

큰 애정과 애착 속에서 생긴다는 것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고집멸도 사성제 중 집성제(집착으로 인해 괴로움이 온다)의 진리입니다.

 

또한, 부처님은 자신의 손녀딸의 죽음이 주는 슬픔을 통해

사왓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자신의 손자로, 손녀로, 아들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고

고통받아야 할 것인지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며 살아오면서

자신의 부모형제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고

이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흘린 눈물은

이 세상을 적시고도 남을 것이라는 경전의 말씀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 가르침은 죽은 아들로 인해 미쳐 버린 여인에게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를 구해오라는 방편을 통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고자 했던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슬픔의 중도

 

첫번째 화살은 맞더라도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길.

 

그 길은 진리를 공부하고 진리를 직시하여

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한편, 사리불 존자는 병으로

목련 존자는 외도들에게 살해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드셨을 때

"사리불과 목련이 없는 이 자리는 왠지 휑하니 텅빈 것 같이 느껴지는구나."

라고 하시면서 부처님은 신뢰하던 두 제자를 잃은 허전함을 토로하셨다고 합니다.

 

슬픔에도 중도의 선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슬프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클수록

사랑하는 이를 잃을때의 슬픔과 허전함이 크다는 진실도 알아야 합니다.

 

슬퍼해야 할 일은 마땅히 슬프하되,

그 슬픔이 지나친 비탄과 고통과 청승으로,

심각하면 악의와 어리석음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

그 슬픔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부모를 잃었는데도

슬퍼하지 않고 히히덕거리는 상주를 볼 때가 있습니다.

보기 좋지 않습니다.

 

슬퍼해야할 일을 정말 슬퍼하는가?

그 슬픔이 따뜻한 그리움과 자비로서 나아갈 수는 없는가?

 

슬픔의 중도.

 

애정과 애착을 떠난 길만이 아닌

슬퍼해야할 일을 정말 슬퍼할줄 알고,

그 슬픔이 따뜻한 그리움과 자비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도 명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