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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도량

구례 화엄사

by 아미타온 2023. 11. 2.

<구례 화엄사>

 

<지리산 화엄사 현판>

1. 지리산의 화엄 도량, 화엄사

 

화엄사는 우리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입니다.

 

화엄사 뒤로는 지리산을 지키는

산신인 마고 할매가 있는 노고단이 있고,

화엄사 앞에는 풍요로운 구례 평야와

마르지 않는 젖줄인 섬진강이 흐릅니다.

 

산과 강과 들이 조화를 이루는 좋은 명당에

터를 잡은 도량이 화엄사입니다.

 

<화엄사 효대에서 바라본 구례 평야>

2. 화엄사의 창건과 역사

 

화엄사는 백제 성왕 때인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백제 법왕 때는 수천의 승려들이 머물며

화엄경을 배웠다고 하며,

통일 신라 이후 의상 대사의 제자들이

화엄경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

우리나라 ‘화엄10찰’ 중 대표적인 도량이 화엄사입니다.

 

<효대에서 바라본 눈쌓인 지리산>

3. 화엄경의 신앙

 

화엄경은 부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깨달음을 펼치시는지를,

또한 불국토를 장엄하고 있는 불보살님과 신중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지를 담고 있는 경전이자 사상 체계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신라 시대 이후

화엄경의 사상과 신앙체계를 가장 많이 답습하고 꽃피워 왔습니다.

 

화엄사는 각황전, 대웅전, 관음전, 천왕전을 비롯해 수많은 불보살님과

지리산 산신을 포함한 수많은 신령의 세계를 융합하여

화엄의 세계를 펼치는 특별한 도량입니다.

 

<화엄사 각황전>

4. 화엄사의 사찰 구조

 

화엄사는 사찰 구조가 특이합니다.

 

보통 대웅전이 절의 중심인데,

화엄사의 중심 영역에는

각황전과 대웅전 두 전각이 함께 서 있습니다.

 

2층 전각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목조건물인 각황전은

숙종 28년인 1702년에 중건되었습니다.

 

각황전(覺皇殿)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습니다.

 

의상 대사가 화엄사를 중수하며 처음 전각을 지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등신불만한 황금 부처상인 장육존상을 봉안하고,

벽에는 화엄경을 돌로 새긴 석경을 둘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장육전은 임진왜란 때 다른 전각과 함께 불타버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화엄사 승병들이 왜군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왜적들이 보복으로 화엄사를 불태웠던 것이지요.

 

<효대에서 바라본 각황전과 화엄사>

5. 각황전 재건의 전설

 

임진왜란이 끝나고 장육전의 재건에 고민하던 벽암 스님은

장육전 중건 불사 성취를 위해 대웅전에서

100명의 스님들에게 백일 기도롤 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승을 시봉하는 공양주를 자원해

밥을 짓고 물을 기르며 기도승을 봉양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는 날에 어느 노장 스님이 말했습니다.

 

“어젯밤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장육전 중건을 위해 시주를 책임지는 화주승을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는 사람으로 삼으라고 일러주었소.”

 

이에 따라 모든 스님들이 차례로

손을 물에 묻혀 밀가루를 만져보게 했습니다.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계파 스님이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았습니다.

 

계파 스님은 할 수 없이 화주승을 맡게 되었으나

수행만 했던 터라 시주를 하는 일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대웅전에서

밤새도록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대는 내일 아침 바로 화주(시주를 권선하는 역할)를 위해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각황전 앞 석등과 석탑>

 

계파 스님은 용기를 얻어 날이 밝자

지체 없이 일주문을 나서 마을 어귀로 향하는데,

뜻밖에도 마을 일대를 돌아다니던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노파에게 간곡하게 시주하기를 청했습니다.

 

계파 스님의 청을 들은 노파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더니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는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룩하겠으니

문수보살이여, 가피를 내리소서”

라고 한 뒤 길옆의 계곡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님은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고 죄책감을 못이겨,

그길로 전국을 떠돌다가

5년 후에 한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창덕궁 앞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어린 공주와 마주쳤는데,

공주가 스님을 보더니 반가워하며

달려와서는 옷자락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이후 손을 한 번도 펴지 않았던 공주는

스님이 그 손을 만지자 손을 폈습니다.

 

그 손바닥에는 ‘장육전(丈六殿)’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거지 노파가 공주로 환생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숙종은 계파 스님을

대궐로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고,

이에 감동한 왕은 장육전 중건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전각 이름도

“왕을 깨우쳐 전각을 중건하게 했다‘는 의미로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각황전 부처님>

 

감동스런 스토리텔링이 전하는 각황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 부처님,

다보 여래 부처님, 문수, 보현 보살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각황전에서 바라본 거대한 석등>

6. 석등

 

우리 나라에게 가장 큰 각황전에서

불보살님께 기도드리면 특별한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각황전 앞에는 통일 신라 시대 때 조성한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석등이 있습니다.

 

높이가 6m 40cm로 정말 크고 웅장한 석등입니다.

 

석등 앞으로 탁 트인 넓은 마당은

지리산과 주변의 여러 전각 지붕들이 에워싸고 있어

흡사 연꽃의 우아한 곡선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늑해집니다.

 

<대웅전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삼존불>

 

7. 대웅전과 석탑

 

화엄경의 교학에 입각해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삼신(三身)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의

석단 아래 양쪽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9세기 말에 조성한

서5층 석탑과 동5층 석탑이 굳건하게 세월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각황전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동/서 석탑>

 

섬세하고 화려한 서5층 석탑은 불국사 다보탑을 닮았다면

동5층 석탑은 단순 담백해서 마치 석가탑을 연상시킵니다.

 

<효대>

8. 효대

 

각황전 뒤를 돌아 적멸보궁을 올라가면

 효대(孝臺)가 나옵니다.

 

어느 스님이 석등의 다리 사이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차를 공양 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석등의 앞에는 네 마리 사자가 석탑을 머리에 이고 있고,

석등의 꿇어앉은 공양을 받는 석상이 있습니다.

 

<효대>

 

차를 공양하는 분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라고 하고,

차를 공양 받는 분은 연기 조사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부처님을 상징하고,

공양 올리는 연기조사는 중생을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중생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머니 같은 큰 은혜를 베푸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큰 은혜를 함께 생각하며

부처님과 어머니를 향한 효심(孝心)과 같은

불심(佛心)을 느끼며 감동에 젖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효대입니다.

 

<효대>

 

세상의 아름다운 꽃들은 물론 이름없는 꽃들까지

포함해 온갖 꽃들의 장엄이라는 뜻의 화엄(華嚴)입니다.

 

<화엄 - 산수유 꽃으로 장엄된 지리산>

 

우리가 신앙하는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

또한 한량없는 불법의 화엄의 세계를

장엄하는 한송이 아름다운 꽃입니다.

 

수많은 자연과 인간의 장엄으로 이룩된

화엄의 세계를 화엄의 특별한 도량인

화엄사에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극락회상 - 구례 화엄사>

https://youtu.be/TH8wc9esiOQ?si=pqPGc1IfCD6UrA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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