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69 불교 인물사(4)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4) - 파계 원효 대사는 붓을 던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에 충격을 던지는 파계를 행하게 됩니다.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로 백제와의 싸움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로 홀로 살고 있던 20대 초반의 요석 공주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어느날 원효는 미친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가 찍으련다." 태종 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원효가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하는구나.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왕은 궁리들를 보내어 원효를 모셔오게 하였다. 궁리들은 '문천교'라는 다리에서 원효를 만나 대궐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원효는 일부러 다리 가운데 떨.. 2024. 3. 2. 불교 인물사(3)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3) - 회향 원효 대사는 해골물을 마신 체험 이후 당나라로 향하던 발길을 신라로 돌렸습니다. 10년간 두차례에 걸쳐 고생하며 떠나려 했던 중국 유학의 꿈을 접은 것입니다. 서라벌로 다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렀습니다. 분황사는 현재에는 작은 절이지만, 당시에는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와 비견될 정도로 큰 사찰이었습니다. 분황사는 자장 율사를 비롯한 신라의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절입니다. 그래서, 중국 유학승이 가져온 많은 불경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원효 대사는 분황사에서 자신이 해골물의 깨달음의 체험을 기반으로 그동안 공부했던 많은 경전들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원효 대사는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먼저 여러 경전들의 핵심을 요약 정리하는 "종요(宗要)"를 지었습니다. 열반경.. 2024. 2. 29. 불교 인물사(2)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2) - 해골물 원효 대사는 이와 같이 공부에 열중하여 스승을 구하고 경전을 연구하고 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남는 깨달음의 앙금을 해소하지 못하게 되자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 대사와 함께 중국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 때가 원효의 나이 34살, 의상은 25살 때였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육로로 고구려를 통과하여 만주를 거쳐 당나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더 요동성 근처에서 고구려 군에게 그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신라 첩자로 오인받아 고초를 겪다가 결국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법을 구하려는 그의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신라가 백제를 합병하고 당나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린 661년, 원효 대사는 다시 의상과 함께 다시 당나라로 가는 뱃길에 올랐습니다. 그 때가 원효 대사의.. 2024. 2. 27. 불교 인물사(1)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 - 고뇌 1. 탄생 원효 대사. '원효(元曉)'라는 법명은 근원(원), 새벽(효) 자입니다. 원효 대사는 그 이름처럼 우리 한국 불교의 새벽을 밝힌 큰 스승입니다. 원효 대사의 성은 설(薛)씨요, 원효는 법명이며, 어릴 적 이름은 서당이었습니다. 원효 대사는 617년(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지금의 경북 경산시) 불지촌(佛地村)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요, 내마(벼슬 이름) 담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탄생지인 불지촌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근방입니다. 이 곳에는 신문왕 당시에 원효 대사가 지었다는 절터가 남아 있고 그 밑 골짜기에 원효 대사의 아들 설총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학계에서는 원효 대사의 탄생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효 대사의 집은 율곡(栗谷), 곧 밤나무 숲 골짜.. 2024. 2. 24. 이전 1 ··· 14 15 16 17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