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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10)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0) - 야단법석

by 아미타온 2024. 3. 23.

<불교 인물사(10)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0) - 야단법석>

 

<양산 천성산 내원사>

 

1. 야단법석 의 전설

 

이번 시간에는 원효 대사의 전설 중에

원효 대사의 신통력으로

중국의 수많은 스님들을 살린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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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선정삼매에 들어있던 원효는

중국 운제사의 뒷산인 종남산이

여름 장마로 인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을 관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운제사의 1천 명의 대중 승려들이

법당에 모여 법회를 열고 있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원효는 자신이 깔고 있던 널빤지를 그 곳으로 날려 보내었습니다.

 

운제사 법당 앞에 이상한 널빤지가

하늘을 뱅글뱅글 돌고 있자

대중들이 법당에서 모두 나와 그 신기한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 뒷산이 무너져 내려 법당을 덮쳤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공중에 떠 있는 널판지를 내려 보니

“해동(신라)의 원효가 널판지를 던져 대중들을 구하노라.

 

이 글을 본 대중들은 원효의 은혜에 감사 드리고

원효의 도력을 흠모하여 모두 신라 땅으로 건너와 제자되기를 청했습니다.

 

<원효 대사의 전설>

 

원효는 그들과 함께 수도할 곳을 찾다가

경남 양산 원적산의 왼쪽 계곡에

내원사를 창건하고 산중에 88암자를 두어

1천명 승려들이 머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효는 1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원적산 꼭대기에 있는

넓은 벌판으로 대중들을 모이게 한 뒤에 <화엄경>의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그 때 그 많은 대중들을 함께 모을 수 있는 방이 없었으므로

야외에 법석을 마련하여 설법을 한 것이 야단법석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화엄경을 설하였다고 하여 그 벌판을 화엄벌,

법회를 알리기 위해 북을 쳤던 봉우리를 집북봉이라고 하였습니다.

 

<내원사와 천성산>

 

그리고, 원효의 가르침을 통해 수도했던

1천명의 대중들이 모두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어

이후 원적산은 1천명의 성인이 나온 산이라 하여

천성산(千聖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공양과 잡역을 담당했던 여러 승려들 중에

8명이 대구 동화사에서 도를 깨쳤으므로

그 앞의 산 이름을 팔공산(八公山)이라고 하고,

4명은 문경 대승사에서 도를 깨쳤으므로 그 산 이름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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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내원사 계곡>

 

2. '원효'라는 지명

 

 북한산에는 원효 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전국의 명산이나 사찰에는 원효 대사가 창건한 절들과,

원효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절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원효의 포교와 영향력이

우리나라 불교에 준 파급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산 천성산 내원암의 설화도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원효 대사의

도력을 나타내는 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말년에는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원효 대사는 70세가 되던 신문왕 9년(686년)

혈사(지금의 골굴사)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전합니다.

 

현존하는 원효의 저술은 모두 22부 24권이 있는데,

전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99부 240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승려 가운데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기신 분이 바로 원효 대사입니다.

 

<내원사>

 

3. 화쟁 사상

 

원효 대사가 수많은 저술을 하고,

중국 스님들이 넘어와 원효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배경에는

원효가 살았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효 대사가 살았던 7세기의 중국 불교는

발전 속에서도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삼장법사 현장 스님이었습니다.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 유식 불교를 배우고

많은 새로운 경전들을 가지고 귀국한 현장 법사는

당 태종의 후원 하에 새롭게 경전을 번역하고

유식에 입각하여 기존과는 다른 불교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현장 법사가 주석했던 장안의 대자은사를 중심으로

치열한 불교 사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기존에 해석된 불교 경전과

현장 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새로운 경전들,

그리고 다양한 대승 경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새로운 종파 불교가 생겨나며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종파의 경전을 중심으로

다른 경전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며

각 종파간의 대립과 사상적인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불교계는 사상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고,

불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적이 대해서도 모두 큰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혼란과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당시 시대의 과제였는데,

최초로 그 시대 과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원효 대사입니다.

 

원효 대사는 수많은 경전과 논서에 대한 주석서를 쓰며

자신의 견해를 일관되게 제시한 대학자였습니다.


이때 원효가 제시한 것이 '화쟁 사상'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도

결국 대승기신론의 '한마음(一心)'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원효의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고,

원효는 이러한 다양한 저술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사상적 혼란에

일관된 논지로 그 해답을 제시했던 한국을 넘어서는

세계적인 대학자였던 것에 또한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