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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9)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9) - 금강삼매경론

by 아미타온 2024. 3. 19.

<불교 인물사(9)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9) - 금강삼매경론>

 

<경주 국립 박물관 불상>

 

 

오늘은 원효 대사가 <금강삼매경론>을 짓게 된

전설 이야기를 통해 원효 대사의 위대함을 살펴보겠습니다.

 

<경주 국립 박물관 불상>

 

1. 금강삼매경론을 지은 원효 대사 이야기

 

일찌기 국왕이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인왕경 법회를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100명의 고승으로 원효를 천거하자

다른 승려들은 원효의 인품이 나쁘다고 헐뜯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비가 종기를 앓게 되어

좋은 약을 다 써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한 무당이 사신을 다른 나라로 보내어

약을 구하게 되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은 곧 당나라에 좋은 약과 의사를 구하도록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왕의 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바닷가 한가운데 이르자,

바닷물 속에서 한 노인이 올라와 그 사신 일행을 용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 용왕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라의 왕비는 바로 우리 용궁의 셋째 공주입니다.

우리 용궁에는 일찍부터 <금강삼매경>이라는 불경이 전해옵니다.

<금강삼매경>은 원만한 보살행에 대해 설하여 주는 경전이오.

신라 왕비의 병을 인연으로 신라에 이 경전을 전하여

좋은 인연을 맺고자 당신들을 부른 것이요.”

 

이렇게 말하며 100쪽 가량의 종이 뭉치를 사신에게 주었는데,

순서가 뒤죽박죽 뒤바뀐 책이었습니다.

 

사신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대안 스님을 불러

그 경전의 차례를 맞추게 하고 법을 청했습니다.

 

대안 스님은 경을 받아 차례를 맞추고 

8품으로 만든 후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습니다.

 

“속히 원효에게 강설하게 하십시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이불병좌상 (경주 국립 박물관)>

 

 

<금강삼매경>을 전해받은 원효는 다음과 같이 왕에게 청했습니다.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니

나에게 뿔(角)이 두 개 달린 탈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책상을 두 뿔 사이에 걸쳐놓고 그 위에 필연을 놓아 주십시요.”

 

이것이 완성되자 원효는 뿔이 2개 달린 소 위에서

<금강삼매경론> 5권을 지었습니다.

 

왕이 날짜를 정해 황룡사에서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설할 법좌를 마련할 즈음에,

누군가 도둑이 들어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 5권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원효가 이 사실을 왕에게 말하자

왕은 다시 사흘을 연기하였고,

사흘 동안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새롭게 축약하여 

3권으로 요약하여 완성을 시켰습니다.

 

드디어 법회날이 되어 원효가 <금강삼매경>의 뜻을 풀이하는데,

평소의 걸림없는 태도와는 달리 법회에 임하는 원효는 위엄과 격식이 있었고,

어려운 대목을 해석함에 있어 그 뜻이 명쾌하여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이 법회가 끝나고 나서 원효가 다음과 같은 한 수의 시를 지었습니다.

 

“옛날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내가 참석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있어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

 

그 때 원효의 인왕경 백고좌 법회 참석을

반대하고 원효를 비난했던 많은 고승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운 낯으로 엎드려 참회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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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 박물관 불상>

 

2. '논'으로 승격된 원효 대사의 저작

 

파계승으로 비난을 받아 기존 교단으로부터 축출된 원효 대사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금강삼매경>의 주석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용왕의 이야기나

원효 대사가 소를 타고 <금강삼매경론>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원효 대사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당시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는 법회에

원효 대사의 참석을 반대했던 승려들이나,

원효 대사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훔쳐

원효 대사의 법회를 방해하려고 하였던 일화는

당시 기존 승단 입장에서 원효 대사가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사실 원효 대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당대 신라에서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원효 대사가 살았던 당대보다는

원효 대사가 열반에 든 후대에 주로 재조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국에서 원효 대사의 <금강삼매경론>은

당시 중국 당나라 학승들에 의해 "론"으로 추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보통 경전에 대한 일반 승려들의 주석서를

"소"라고 부르지 "논"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원효 대사의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용수 보살, 세친보살 등의

대보살들이 지은 '논서'와 같다는 명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한편, 원효 대사가 지은 <대승기신론소>는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석서로 가장 유명합니다.

 

중국의 학승들은 원효 대사의 저작을 <해동소>라고 하여

대승기신론에 대한 3대 주석서로 높이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에서 송나라 때의

승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송고승전>을 보면

다른 전기들은 고승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는 것에 비해

원효 대사의 전기는 찬양 일변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선사지 3층 석탑 (경주 국립 박물관)>

 

3.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원효 대사의 가르침

 

특히, 일본에서 원효의 저술은 일본 불교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효 대사가 열반하고 약 100년후 신라 혜공왕 때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이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습니다.

 

이때 그는 일본 고위 관료인 '오미노 미후네'를 만나게 됩니다 .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한 오미노 미후네는

학문의 대가로 당시 일본의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출가했을 때 나라에 있는 동대사의 승려였는데,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승려 시절 오미노 미후네는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신으로 온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을

극진히 대접하고 시까지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신라인들에게 원효 대사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들을 중심으로 

곧 원효를 기리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4. 후대의 원효 대사 재평가 작업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서당화상비>입니다.

 

이 비석이 건립된 것은 원효 사후 120년 뒤,

생전에 원효가 자주 머물렀던 경주 고선사에 세워졌습니다.

 

두 번째는 진흙으로 만든 원효 대사의

소조상을 절에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원효 대사의 소조상은 경주 분황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소조상이 원효의 승려의 상이 아니라,

거사의 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이 비편에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됩니다.

 

더구나, 이 소조상의 건립에

후일 왕이 되는 각간 김언승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 사회 전체에서 원효를 새롭게 평가하고 인식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으로 말해줍니다.

 

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고려시대에 더욱 높아졌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 대사를 인도의 용수보살과 같이 추앙하며

<화쟁국사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를 거치며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원효 대사는 당대에는 파계승으로

기존 승단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효 대사의 저술과 사상은

중국, 일본의 승려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민중들에게 남긴 교화로 인해 후대에 전설과 설화가 되어

우리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