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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2.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6) 김옥균과 갑신정변

by 아미타온 2025. 10. 24.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6) 김옥균과 갑신정변>

 

< 김옥균 >

                 

 

1. 개화파의 지도자, 김옥균

 

김옥균 (1851-1894)은 1851년 2월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 농촌에서 안동 김씨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김병태는 몰락한 양반으로 생계를 위해 그가 어렸을 때

천안읍 변두리인 원대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차렸습니다.

김옥균은 5살 때부터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7살 때는 아버지의 6촌 뻘 되는

김병기(안동김씨 세도가에 줄을 대어 관직에 올라 서울 거주)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서울의 양반 벼슬아치들이 주로 거주하던 남산 인근 동네)에 거주하며

김홍집 등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양아버지가 강릉부사로 가자 강릉에서

6년간 이율곡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수학하다

1866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학문은 물론이고

시문, 글씨, 그림, 음률에 탁월하여 대원군과 조대비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김옥균이 《용(龍)》자를 쓰면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고,

《범 호(虎)》자를 쓰면 범이 산중 수림 속에서

뛰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1872년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벼슬은 총명한 젊은이에게 주어지는 홍문관 교리까지 올랐습니다.

김옥균이 개화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20세 무렵인 1870년 무렵 유대치, 오경석, 박규수 등과 접촉하면서부터입니다.

 

이들은 김옥균, 홍영식(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 박영효(철종의 사위),

서재필(서광범의 조카), 박영교(박영효의 형) 등을 지도하여 개화 사상을 갖게 하였습니다.

 

어느날, 박규수가 지구본을 한번 돌리더니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중국이 어디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中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화가 있느냐?"

 

이 말을 듣고 김옥균은 감동하여

크게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김옥균은 총명하고 아량이 있고 사귐성이 좋고,

특히 변설에도 뛰어나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김옥균은 양반,중인,군인, 상민, 승려 등

신분을 초월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동인 스님 외에도

서울 화계사에 거주했던 강사로서

이름을 떨치던 학승 탁정식(일본 유학까지 감)과

어느 절간에서 심부름하던 아이가 총명한 것을 보고

일본까지 데리고 간 차홍식 등이 대표적인 스님 출신입니다.

 

또한, 국왕이 새 문물, 제도에 관심이 많은 것을 기회삼아

국왕의 신임과 총애를 얻는데도 성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홍영식, 박영교를 비롯한 혁신관료와 유생,

군인, 상인, 승려, 심지어는 왕의 측근자들인 환관과 궁녀 등

각 계층을 망라하여 1870년대초 개화당을 형성하였습니다.

 

개화당은 비밀조직인 <충의계>를 만들고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정 개혁 활동을 힘있게 벌려 나갔습니다.

 

그 준비 사업으로서 자기의 세력을 확대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업을 적극 벌이는 한편

계몽 서적인 《기화근사》를 써서 개화 사상을 보급 선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왕과 정부안의 혁신관료들을 추동하는 방법으로

국가 기구도 점차 개조해 나갔습니다.

 

1880년 12월 국내외의 정치와 군사 관계 사무를

총체적으로 관할할 권한을 가진 <통리기무아문>을 창설하게 하였으며

1881년에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설립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 계열의 청년들로

외국에 유학과 실습을 보내여 근대적인 지식을 배워오도록 하였습니다.

 

김옥균은 이미 근대적 개혁을 수행한 나라들의 정형을 이해하기 위하여

1870년대 말에 자기의 벗인 이동인을 일본에 보내어

여러 해에 걸쳐 그 나라의 형편을 조사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자신이 직접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으며,

일본의 국가기구와 경제 문화 형편을 자세히 살피였고

당시 일본의 이름난 정치 활동가들과 만났습니다.

 

이들은 세계 정세와 동방 정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고

조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은근히 타진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 대한 현지 방문 이후 김옥균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드시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인 개혁을 실시해야 하겠다는 것을

더욱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조선에서의 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일본 세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에 머물러 있는 기간 동안

한 주에 한번씩 그곳에 배우러 와 있던 조선의 사관 학생들을 만나

그들 앞에서 조선에서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들을 애국주의 사상으로 교양하였습니다.

 

그는 천하의 만국이 다 독립하였는데,

우리 나라만이 청나라의 심한 간섭 하에 놓여있으니

하루바삐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과

그를 몰아내지 않고는 독립이란 있을수도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시급히 국정 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 갑신정변의 배경

 

1882년 이후 김옥균은 개혁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여 나갔습니다.

 

이 무렵 그는 통상교섭 사무아문 참의, 이조참의,

호조참판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개화파 성원들을 이끌었습니다.

 

김옥균은 수구파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왕을 설복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국왕을 자주 만나 밖으로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배격하고

안으로는 시급히 국정을 개혁하여 부강 발전을 도모하여야만

오늘의 복잡한 세계정세에 대처하여

나라의 자주적 지위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1882년 7월에 나라의 모든 문제를 토의 결정하는 협의제이며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관이였던 '기무처'가 조직된데 이어

새로운 신문, 서적 출판 사업을 맡아보는 '박문국'이 설치되었습니다.

 

1883년 10월부터는 박문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가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민중들이 세계의 정세를 알고

국내의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울러 김옥균은 동료들이 차지하고 있는 관직을 이용하여

우선 서울에서부터 경순국, 치도국 등을 설치하여

경찰 제도와 도로, 토목사업에 대한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1882년 이후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 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인 개혁 노력은 벽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 정권과

급진 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습니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6천여명의 청나라 병사를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을 속국화하려고 내정을 심하게 간섭하였고,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대적으로 의지하여 정권 유지를 꾀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청국과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약간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정권을 지키려는 민씨 집권세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적 개혁과 만국 공법적 질서를 꿈꾸는

개화당 인사들을 위험시하였습니다.

 

부패한 민씨 정권은 청에서 파견한 고문인

묄렌도르프의 제안으로 당오전 등 재화를 남발하여

재정난을 타개하려 하였으며, 

김옥균 등은 이에 반대하여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개화정책을 추진할 자금난도 타결하고 정치자금도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씨 정권의 방해 공작과 일본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성공하지 못하여 개화당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민씨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84년 봄 베트남 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과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3천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습니다.

 

한편,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일본은

민씨 정권과 대립하던 급진 개화파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이러한 정세 변화와 일본의 접근에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18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옥균은 "우리들은 수년래 평화 수단을 쓰면서 각고 진력하였지만

그 공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금일에는 이미 사지에 들어가 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선수를 써야 한다." 면서 정변을 주장하였습니다.

 

개화파는 이제 민씨정권의 친청 수구 정책에 대항하여,

종래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에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쿠테타적 방법으로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우체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 사관 학교의 유학생, 신식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 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정변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켰을 때

민씨 정권을 비호하는 청군의 반격에 대한 군사 문제와

자신들이 개혁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재정 확보 문제를

일본을 이용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일본 역시 개화파의 군사·재정 문제를 도와,

조선 진출에 걸림돌이던 청나라와 민씨 정권을 내몰고

조선침략에 우위를 차지할 속셈으로 일본 군대의 동원과 차관을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약속하였습니다.

 

< 갑신정변 상황 >

                                           

 

3. 갑신정변의 실패

 

1884년 12월 4일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우정국 인근의 인가에 방화를 하고

그 틈을 이용하여 민씨 정권의 영수인 민영익을 칼로 찔러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곧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일본 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日本公使來護我)고 쓴 친서를 요구하였고,

 이에 의해 일본군 1개 중대가 즉각 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왕의 소명이라 하여 입궐한 3영사(윤태준, 한규직, 이조연)와

수구파의 거두 민태호·민영목·조영하를 처단하였습니다.

 

이 때 정란교 등 사관 생도들은 서재필의 지휘하에 대궐을 점령한 이후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옮겨 일본군 200명과

50여 명의 조선군인으로 호위케 하여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민씨세력을 제거한 뒤

그 동안 민씨정권에게 소외되어 왔던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선을

궁으로 불러 정변의 취지를 설명하고 왕실과 연합정부 구성을 제안하였습니다.

 

개화파와 왕실은 새정부 구성을 위한 인물 배정에 착수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의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하였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이튿날인 10월 18일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하였습니다.

 

새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왕실과 연합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개화파가 개혁추진을 위한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급진개화파의 권력이었습니다.

 

최고 권력기관인 의정부의 좌의정에는 홍영식이,

군사·사법·경찰·외교·통상·인사·재정 등 정부 중추기관의 자리에는

김옥균(호조참판)을 비롯하여 박영효(전후영사 겸 좌포장),

서광범(좌우영사·우포장 겸 외무독판 대리),

서재필(병조참판 겸 정령관), 박영교(朴泳敎:도승지)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 정치의 내용을 담은 다음의 14개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하였습니다.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정강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그 동안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발전시켜온 개화 사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개혁활동의 총체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 황후가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 군인을 철수시켰습니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습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청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민씨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일본측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문책하는 한편

망명한 김옥균(金玉均)의 소환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청을 압도하고 새로운 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공사관이 불타고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는 한편,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는 교섭을 강경하게 진행시켜갔습니다.

 

그뒤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를 조선에 파견해,

조선측 회담대표인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접촉했으나

타결책을 찾지 못하자 외무경 이노우에[井上聲]가 육군 2개 대대,

군함 7척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1885년 1월 2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는

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과 협상해 1

885년 1월 9일 김홍집과 이노우에 사이에

전문 5조의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었습니다.

 

한성조약의 내용 중에는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 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습니다.

 

 한편,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가족이 노비가 되거나 3족이 멸하는 보복을 받았습니다.

 

홍영식은 피살되고 역적죄가 내려져

영의정을 지낸 부친은 자살하고 집안은 멸족되었습니다.

재동에 있던 홍영식의 집은 몰수되어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살해된 집안의 방바닥엔 핏자국이 고여 있고

문짝까지 다 약탈된 채였다고

광혜원을 '접수'한 미국 선교자이자 의사 알렌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서구식 가구로 꾸민 김옥균의 저택은 불타고

의 아버지,어머니는 죽임을 당하고 부인은 노비로 처해졌습니다.

서재필의 젖먹이 아들은 아무도 거둬주지 않아 굶어죽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천세환'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 김옥균이 일본 망명지에 있을 때 쓴 글 >

              

 

4. 일본 도피와 암살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정권을 잡은 민씨 정권은 김옥균에 대해 이를 갈았고

이와 동시에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조선은 역적을 넘기라고 종용하고 일본측도 외교적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김옥균을 직접 넘길수는 없지만,

조선이 암살자를 보내도 막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에 민씨들은 암살자를 몇 보냈지만,

김옥균의 용의주도함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큐(岩田周作)'라는

일본명을 사용하며 숨어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부담스러운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제도, 북해도 등의 외지로 보내버렸습니다.

 

김옥균은 일본 정부에의해 1886년 7월부터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라와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에는 북해도에서 2년 동간 연금을 당하는 등 국제적인 미아로 방황했습니다.

 

갑신정변 실패후 연금을 당한 김옥균은 

그때의 심경을 이미 죽고 없는 아버지에 대한 편지로 대신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양자인 저를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답장을 보내주시지 못 할 곳에 계시기에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키워주신 은혜를 이 못난 아들이 아버지와

그리고 친지 분들을 결국 다 돌아가시게 만들어 갚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만이라도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이 편지보시고 제 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전 가족을 위했고 나라를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엔 조국을 위하다가 조국에서 살지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탓해야 할지 아직도 분간이 잘 가지 않습니다.
.......................

눈앞에 보이는 죽음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펜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를 보고싶은 마음이 더 마음속에 스며들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아버지.

못난 아들의 실수로 죽음을 당하신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밖에서 뚜벅뚜벅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김옥균은 아주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적 재기의 꿈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김옥균과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1890년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습니다.

 

1894년 오사카에 거주하던 중,

청나라의 이홍장에게서 `동양의 장래를 논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고

중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이 때 김옥균을 살해하기로 결심한

홍종우는 교묘하게 김옥균에 접근했습니다.

 

프랑스 유학파인 홍종우와 개화당의 당수인 김옥균은

뜻이 잘 맞았습니다.

 

홍종우는 근대 사상에 박식했고,

프랑스 요리 솜씨도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고베에서 홍종우를 만난 김옥균은

리훙장과의 만남을 기대하기도 했고,

당시 경제적으로어려운 상황에서

'상하이에 가면 돈을 구할 수 있다'는 홍종우의 권유,

그리고 10년간의 망명생활에서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박영효 등의 반대에도 김옥균은 상하이로 건너갔습니다. 

 

‘탕, 탕, 탕’.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동화양행 2층 객실에서 울린

세 발의 총성은 김옥균의  얼굴과 배, 어깨를 관통했습니다.

 

풍운아 김옥균은 그렇게 44살의 나이로 중국땅 상하이에서

홍종우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홍종우는 청나라 경찰에 체포되어

김옥균 시신과 함께 조선으로 이송되지만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당시까지도 정권을 잡고 있던 민씨 일파는

김옥균의 시체를 난도질, 능지처참하여

머리, 팔다리 등을 전국 곳곳에 버렸습니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 중 김옥균을 흠모하는 자들은

시신 일부를 수습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기념비를 만들었습니다.

 

김옥균이 죽은 지 불과 몇 달만에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때,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복권되어 귀국하고

김홍집이 이끄는 내각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김옥균이 불과 몇 달만 더 살아있었다면

그의 능력과 연륜으로 볼 때 총리대신은 그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운명은 김옥균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 홍종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후 국내에 온 뒤 효수된 김옥균(대역부도옥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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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쓴 김옥균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비상한 시대에 비상한 재주를 타고 태어나

비상한 삶을 살다가 비상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 비문에 많이 공감하게 됩니다.

 

김옥균은 시,서,화 등 문예의 다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변설에 능하고 아량이 있고 강한 리드쉽을 갖추었습니다.

 

애국적 열정으로 가득찼고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점이었다면 순리에 따르지 않고 너무 성급했고,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안목이 부족했습니다.

 

갑신정변이 민중의 세력을 규합하지 않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서

김옥균이 소수 양반 자제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한 것이 아니라

상인, 승려 등의 다방면의 사람들과 뜻을 같이한 측면에서 본다면 

김옥균이 신분적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세력을 규합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평가해 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순리를 따르지 않는 성급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화로 가는 것이 역사적인 순리라고 한다면

좀 더 긴 안목으로 조정과 민중들에게 개화의 뜻을 확산시키고

어느 정도 인연이 성숙하였을 때 순리와 절차에 맞게

개화를 추진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합니다.

 

정권을 잡는 방법이 정변(쿠테타)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는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꼭 진행을 했어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로 인해 반대파는 김옥균을 포함한 개화파에 이를 갈았을 것이고,

혁명의 실패는 잔인한 복수극로 이어져 개화파 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개화파의 싹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설사 쿠테타(정변)에 성공했더라도

정적들에 의한 복수의 칼날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혁명이란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리와 절차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김옥균은 일본을 너무 믿었고,

기득권 세력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등

현실 정치에 대한 안목이 너무 순진했습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계속 청일관계를 저울질하며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였고 결정적 시기에 철병을 해 버렸습니다.

 

김옥균은 민씨 일족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일본과의 밀약을 너무 믿어버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잘 훈련된 정병인 일본군 300명이

청군 1,500과 싸웠다면 화력이나 숙련된 전투력에서

일본이 결코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객관적 평가도 나오지만

일본은 머뭇거리며 정면 결전을 피하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과 100여명의 군사들과 일본의 지원만으로

무력 쿠테타를 감행한 자체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청나라 군사의 개입을 예견하였다면

그 정도의 준비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기득권 세력인 민씨 기득권 세력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습니다.

 

민씨 정권은 부패했지만 위기 상황이 닥치자 단결하고

정변이 일어나자 근왕적 충의사상을 퍼뜨려

개화파를 일본과 결탁한 외세 역도라고 부추겨

개화파에 곧 반격을 가했습니다.

 

김옥균을 비롯한 정변의 젊은 주체들은

젊은이다운 급진적인 열정으로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순진하게 일을 서둘러 결국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개화파의 몰락을 가져왔고 자주적 개화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옥균은 갑신 개화 정강 14조에서 밝혔듯

그는 높은 애국적 정열과 개혁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청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이룩하고

근본적으로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자주적인 나라로 거듭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부패한 민씨 세력을 타도하고

제도 개혁을 통해 신기술을 도입하고

묵은 관습을 타파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내고

나라를 새롭게 세우려는 큰 의지를 가졌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단어가 성립하지 않겠지만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정권을 잡고 자주적 개화를 추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튼 무모한 갑신정변으로 인한 개화파의 몰락은

자주적 근대화의 의지의 좌절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