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3) 역매 오경석의 삶>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로서
오경석·유대치·박규수 세 사람을 꼽습니다.
오경석은 역관(통역관)으로 중국 북경을 13차례나 드나들며
서구 문물의 선진성과 함께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깨달은 개화파였습니다.
유대치(유홍기)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의학 공부를 해서 의원이 되었습니다.
친구였던 오경석과 교유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공감해서
김옥균,박영효 등 젊은 인재를 개화파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침입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켜
대원군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중앙 정부로 돌아온 뒤에
북촌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개화를 역설했던 정치적 후원자였습니다.
이 세 명의 개화파의 아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역매 오경석(1831∼1879)'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경석은 당시 중인이 주도하는 개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를 통해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개화파로 끌어들였던 주요 인물로 그의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역관 집안에서의 성장 과정
역매 오경석은 1831년 1월에 중인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 장교동에서 중국 역관 오응현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해주 오씨의 중시조인 오인유를 거쳐
11대 오인수까지는 문과에 합격자를 낸 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12대 오동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참봉(종9품)을 지냈다가
13대 오구가와 14세 오대종이 무과에 합격하여 무반(武班)이 되었으며,
오대종의 맏아들인 15대 오인량이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 집안이 되었습니다.
오제량의 아들인 16대 오정화까지 의과에 합격하여 의관이 되면서,
해주 오씨는 중인으로 신분이 굳어졌습니다.
17대 오지항부터 23대 오경석까지 대대로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으며,
혼인도 역관 중심의 중인 집안과 하였습니다.
오경석의 아버지인 22대 오응현(1810∼1877)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1825년 역과에 2등으로 합격하였습니다.
그 때 역과 시험 1등이 이상적이었는데,
오응현은 친구 이상적에게 맏아들 오경석의 교육을 맡겼습니다.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의 중인 출신 제자로
중국에 12번이나 다녀온 유능한 역관으로 시서화에 매우 능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국보인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지에 있을 때
찾아온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이상적으로부터 배운 오경석은 16세에 역과에 합격했으며,
동생들까지 모두 합격해 5형제가 모두 역관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위 이창현도 역관인데,
대표적인 중인 집안들의 족보를 종합하여
‘성원록(姓源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처럼 그 무렵 중인들은 커다란 세력을 이뤘으며,
그 한가운데 오경석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응현의 손자 가운데도 역관이 4명이나 나왔는데,
이들이 마지막 역관 세대였습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과거가 모두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학습독관(漢學習讀官)'으로 역관 생활을 시작한 오경석은
18세에 사역원 당상역관 이시렴의 중매로 그의 조카딸과 혼인했습니다.
처가인 금산 이씨 집안도 교회역관(敎誨譯官:역관들을 가르치던 교수 역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중인 집안이었습니다.
이씨 부인이 26세에 유행병으로 요절하자,
3년 뒤에 역시 중인인 김승원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오세창도 역관이고,
딸도 역관 이석주의 아들인 이용백에게 시집보냈는데,
사위 이용백은 산학(算學)을 전공한 중인입니다.

(2) 청나라 골동 서화 구입과 예술적 감각
아버지 오응현은 북경을 드나들며 재산을 많이 늘렸습니다.
당시 역관들은 외교관이자 무역상으로
인삼 등의 중계 무역을 통해 재산을 많이 늘였습니다.
오응현은 맏아들 오경석에게
2,000석 분의 재산과 집 두 채를 상속해 주었습니다.
장교동의 천죽재(天竹齋)와
이화동의 낙산재가 바로 그 집입니다.
오경석은 스승 이상적의 영향으로 시서화에 조예가 깊었으며,
중국과의 외교로 축적된 넓은 식견과 교우 관계로 인해
여러 골동 서화를 많이 수집하였습니다.
그는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이라는 글에서
골동 서화를 모은 과정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계축년(1853)부터 갑인년(1854)에 걸쳐
비로소 북경에 노닐게 되어,
박식하고 단아한 동남의 문사들과 사귀면서 견문이 더욱 넓어졌다.
원(元)·명(明) 이래의 서화 백여 점을 차츰 사들이게 되었고,
삼대(三代)·진(秦)·한(漢)의 금석(金石)과
진(晉)·당(唐)의 비판(碑版)도 수백 종을 넘었다.
......(중략)
내가 이들을 구입하는 데 수십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천만리 밖의 것이라 심신을 크게 쓰지 않고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넓은 중국 천지 곳곳에 흩어진 골동 서화가
북경으로 모여들어 유리창에 가면 구입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새로 발견되는 금석 탑본들은 역시 학자를 통해야 구입하기 쉬웠다.
오경석이 1861년 2월에 북경을 떠나기 직전
청나라 학자 하추도(何秋濤)가 다음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지금 보내드리는 석각(石刻) 한 장은
복건성 태녕현에 있는 주자(朱子)의 수서각석(手書刻石) 탑본입니다.
지금까지 금석가들이 모두 몰랐던 것이므로,
기실(記室)께 드려서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오경석이 이 편지와 탑본을 받고 얼마를 사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청나라 학자 정조경(程祖慶)이 책과 인삼에 관해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면
오경석이 조선의 고서와 인삼을 갖고 가서 팔아 청나라의 골동 서화를 구입했음이 확인됩니다.
역매인형대인각하(亦梅仁兄大人閣下)
며칠 전에 나에게 인삼 값을 묻는 친구도 있고,
지화(紙貨)를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귀국의 서적과 비판(碑版)을 서로 교환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혹 그런 일이 있게 되면 너무 번거로우시겠습니까?
전에 보내온 서목(書目)을 돌려드린 뒤에,
또 어떤 친구가 청구하고 싶어합니다.
아직 구입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서목 한 벌을 다시 부쳐주시면 시기에 따라 모두 구입할 수 있고,
또 포장비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잠연당전서’는 종경이라는 친구가 가져 왔는데,
어제 또 찾아와 “서점에서 파는 값보다 헐하다.”고 하면서
이 서목을 읽어보아야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빌려 주었습니다.
옛날 비판(碑版)은 장황(표구)되지 않은 것을 사야 값이 헐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오경석은 청나라의 골동 서화를 구입해
감상을 할 정도로 예술적 소양이 뛰어났으며,
훌륭한 글씨나 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뛰어난 작품을 여러 개 남겼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이라는
저술을 남기게 된 것도 오경석이 수집한 골동 서화 덕분이었습니다.

(3) 청나라의 망해가는 모습 보며 개화에 눈떠
오경석은 23세 때인 1853년에 처음 북경에 가서
같은 20대의 청나라 지식인들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스승 이상적의 소개로 빠른 시일에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북경에 갈 때마다 선물을 주고 받았으며,
그들로부터 골동 서화만이 아니라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책들도 소개받아 구입하여 왔습니다.
청나라 문사 61명과 주고받은 편지 292통이
현재 7첩으로 장황되어 후손 오천득씨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경석이 사귄 인물인 공자의 73대손 공헌이는
뒷날 청나라 내각 중서를 지냈고,
만청려는 예부상서를 지냈으며,
반조음과 서수명, 장상하 등은 공부상서를 역임했습니다.

오대징은 갑신정변 때에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조선에 왔으며,
장지동은 호광총독(湖廣總督)과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역임했습니다.
따라서 조선과 중국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오경석이 이들의 도움으로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경석이 북경의 청년들 가운데
중국 남방 출신의 양무파(洋務派) 개혁사상가들을
주로 사귄 것은 박제가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오경석이 역과 시험에 합격하도록 지도해주고
예술적 소양을 키워준 스승은 역관 이상적이지만,
아버지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박제가의 저술을 읽도록 했습니다.
오경석 또한 국내 학자 가운데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놓고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
추사에서 이상적으로 내려오는 중인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추사의 스승이 바로 박제가였으니
그의 집안에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교과서로 받드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오경석은 다른 역관들같이 청나라에 드나들며
통역이나 무역으로 재미만 본 것이 아니라,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습니다.
신용하 교수는 오경석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853∼1859년 사이에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각자”라고 평가했습니다.
오경석은 1840년부터 시작된 아편전쟁과 1851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북경 현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서구 문물의 우수성과 함께 자주적인 개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국내 지도층도 이를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해국도지(海國圖志:서양각국의 역사,종교,과학을 해설한 책),
영환지략(瀛環志略:세계 각국의 지리서),
박물신편(博物新編:서구의 여러 선진문물을 소개한 책),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서구열강 여행기) 등의
청나라에서 간행된 여러 주요 개화 서적을 구입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경석이 구해온 세계 지도와 자명종이
이동인이 주석했던 서울 봉원사에 최근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경석은 이러한 서적을 친구 유대치(1831~?)에게 주어
당시 나라 밖 세계의 문물과 정세를 알려주었습니다.
오경석과 유대치는 동갑인데다
같은 중인 출신으로 집도 가까운 죽마고우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오세창의 스승으로 유대치를 초빙할 정도로
서로 깊이 신뢰하는 사이였습니다.
오경석의 아들이자 유대치의 제자였던 오세창(1864~1953)은
후일 3.1만세 운동때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으로
그는 저술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오경석의 평소에 친한 벗 중 대치 유홍기라는 동지가 있었다.
이 유대치라는 분은 학식과 인격이 모두 고매 탁월하였고
또한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
그 뒤 두 분은 사상적 동지로 결합하여 서로 만나면
자국의 형세가 실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고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로 상의하였다.
어느날 유대치가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을까?” 라고 묻자,
오경석은 "북촌(서울 양반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개화 사상을 확산시키는 방안으로
명문가의 청년들을 접촉하여 계몽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1870년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던 박규수와 상의해
그의 재동 사랑방에 젊은 인재들을 모아 학숙을 차렸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개화파 박영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인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 박영교와 함께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박규수의 집에 모인 젊은 선비들은 박지원이
사회모순에 대해 비판하고 실학의 필요성을 역설한 <연암집>과
오경석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을 읽으며 개화 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4) 외교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
한편, 국내외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며
내정개혁 차원에서 지방민에게 폐혜를 주던 서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세상의 사표가 되는 47개 서원만 남기고,
그외 600여개의 서원들이 철폐되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한편,1866년 정초에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잡혀 처형되자,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간신히 탈출하여
동양 함대 로즈 제독에게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흥선 대원군은 청나라에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도 탐지할 주청사를 보내었습니다.
이 때 정사(正使)는 유후조(柳厚祚)였고,
오경석이 통역 겸 뇌자관(賚咨官)으로 중국으로 갔습니다.
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하여 사흘이 지나자,
청나라 각국총리아문에서 숙소에 관리를 보내어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상 역관은 숨기자고 했지만,
오경석은 숨기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며,
청나라에 숨겼다가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경석은 이와 별도로 청나라 관원들을 만나
프랑스 동양 함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들이 조선을 침략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자문했습니다.
오경석이 사귄 친구들 가운데는 중국 남방 출신이 많았는데,
남방에서는 아편전쟁을 겪고 여러 항구를 개항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문한 내용들은 정사의 수행원 심유경을 통해 본국에 보냈는데,
복건성 통판에 임명된 유배분(劉培芬)의 조언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6월8일 등주에서 배를 탈 때 서양의 병선(兵船) 십수 척이 있으므로
서양 배에 있는 광동인을 불러 물은즉,
바야흐로 조선으로 향하기 위하여 구병(군대 출동)한다고 운운하였다.
병(兵)의 다소를 물은즉 한 배에 500∼600명이라 하였다.
.......(줄임)
대개 서양의 장기는 화륜선(火輪船)인데,
하루에 1400여리를 간다.
병선(兵船)은 작고 연통은 짧으므로 바라보면 알 수 있으며,
수심이 1장(丈)이면 뜨고 2장이면 간다.
이보다 얕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줄임)
저들의 포에는 비천화포(飛天火砲)가 있는데
포환의 크기는 쟁반만 하며,
그 안에 소환(小丸) 천백개가 들어 있어서
발사되어 진중에 떨어진 연후에 대환(大丸)이 갈라지면서
소환이 사방에 발산하여 사람을 부상시키니,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유배분은 프랑스의 대포가 조선의 대포와 다른 점까지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오직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와 주북경 프랑스공사 베로네는
청국 정부에 조선에서의 천주교 승인을 요청하고,
청나라의 공문에 의한 동의를 받고 출병하는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오경석은 유배분과 함께
예부상서 만청려를 만나 이 정보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고,
그 면담 내용을 본국 조선에 보고하였습니다.
유배분의 면담 내용:
만상서(萬尙書)의 말에 중국의 운남병(雲南兵)이
프랑스 해군과 함께 이거(移去)한다 하는 설에 대하여 물으니,
가로되 이것은 서양인의 거짓말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국을 겁내서 성세를 과장하려는 계책에 불과하다.
종교의 시행을 청한 공문의 의미를 물은즉,
가로되 다른 나라의 출병은 처음부터 중국에 관계가 없는데,
어찌 공문을 청하는 이치가 있을 것인가고 하였다.
그러나 귀국이 대국을 섬김을 아는 고로 그 공문에 한번 빙자하고자 한 것이다.
만청려의 면담 내용 :
서양인의 소위 공첩은 그들이 스스로 주관한 것에 불과하고,
처음부터 중국이 아는 바가 아니다.
총리아문은 행문전교(行文傳敎)를 불허하였다.
서양인은 전적으로 재리(財利)를 가장 숭상한다.
영국 오랑캐는 통상을 주로 하고,
프랑스 오랑캐는 행교(行敎·종교시행)를 주로 한다.
프랑스인은 집요하고 사나우며,
무릇 거사하면 일을 이룰 때까지 쉬지 않는다.
러시아는 더욱 불가측이며,
탐랑(貪狼)하기 한량없고 또 바라는 바는 토지이다.
이와 같이 복건성 통판 유배분은
청나라 정부가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예부상서 만청려는 프랑스가 천주교를 앞세워 집요하게 자극할 것이지만,
정작 조선의 영토를 노리는 나라는 러시아라는 사실을 환기시켰습니다.
1860년에 러시아와 북경조약을 맺고
우수리강 동쪽 영토를 양도했던 뼈저린 경험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 사이 8월에 프랑스 동양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사절단 일행은 북경에 계속 머물면서 뜻하지 않은 외교 활동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다고 생각한 흥선 대원군은
기고만장하여 쇄국정책을 고집했지만,
오경석은 그 뒷처리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북경 프랑스공사관과 청국 총리아문 사이에 오간 외교문서라든가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보낸 자문도 다 수집하였습니다.
음력 10월에 귀국한 오경석은 이런 자료들을 다 묶어서
‘양요기록(洋擾記錄)’이란 책을 편집하였습니다.
사절단의 활동을 보태고,
병인양요 기간에 조선정부의 대처와
국내외 동향도 일자별로 간추려 기록하였습니다.
254쪽 분량에 음력 10월7일까지 기록이 남아 있으니,
정부 차원에서도 정리하지 못한 ‘병인양요 백서’를
오경석 한 개인이 정리한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를 대신했다고 할 만합니다.

(5) 만년의 불교 귀의
이처럼 1866년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1868년에 독일인과 미국인이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
1871년에는 미국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서구 열강의 도전에 단호하게 대처하여 성과를 거두자
외세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의 쇄국정책을 강화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계기로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1875년 8월에는 일본이 군함 5척을 강화도 초지진 일대에 침투시켜
우리나라 군대와 전투가 벌어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계획적으로 저지른 이 사건을 구실로 조.일 통상조약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때 오경석은 실무자로 파견되었는데,
국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876년 1월 강화도의 연무당에서
조.일회담이 열릴때 일본이 일장기를 걸자,
이에 대응하여 태극 도안을 취해서
괘가 없고 중앙에 태극만 있는 국기를 임시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후일 개화당에 전수되어 오늘날의 태극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경석은 이 회담으로 인해 과로로 쓰러져 몸져 눕게 되었습니다.
동지 유대치의 극진한 치료 덕분에 다소 나아졌으나,
도봉산의 절에서 휴양을 해야 했습니다.
1877년 나라를 위한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역관으로서는 파격적인 정1품으로 승진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곧이어 1879년에 그의 외아들인 오세창이
16세에 역관시험에 합격해 자신의 대를 잇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요양에도 불구하고 오경석의 병환은 완쾌되지 못하고
1897년 8월 49세의 일기로 요절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세운 비문에 의하면 오경석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만년에는 선리(禪理)를 좋아하여
불경을 많이 갖추고 읽어서
불교의 심오한 의미를 깊이 궁리해
삼계의 화택을 모두 버리고 열반의 피안에 올랐다."
이와 같이 그는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고
특히, 참선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여러 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 자신의 불교 신행을 보여주는 책으로
그가 지은 <초조보리달마대서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달마 대사의 가르침 중에서 좋아하는 글귀를 모아
매우 정성스럽게 써서 엮은 49쪽의 책으로
제목 밑에 '역매지송'이라고 하였으며
평소에 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독송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외아들 오세창은 아버지를 따라
개화파에 가담하여 갑오경장 때 농상공부 통신국장을 지냈으며,
1905년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국권회복운동을 벌였고,
3.1 만세 사건 때는 천도교의 대표로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당대의 명필이자 서화가로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봉은사를 비롯해 많은 절에 편액을 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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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이 어떠한 계기로 불교를 믿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만년에 참선을 주로 하였으며 선리에 밝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친구 유대치의 권유로 불문에 귀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스승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며,
추사 김정희가 백파 선사와 선 논쟁을 벌일 정도로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아
오경석도 스승의 영향으로 젊은 시절부터 불교 공부를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가 불자로서 그의 개화 사상에
불교가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선리에 밝고 불경을 많이 읽었다는 그의 독서 취미상
그의 삶에 불교적 사상이 영향을 준 것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에게 불성이 있다는 평등 사상이
평등한 신사회를 건설하고 개화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그의 개화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중국을 13회나 다녀올 정도였다면
그의 49살 인생 청년기 이후의 삶의 대부분은
중국을 오가면서 보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외교 실무가로서 후일 고위직에 오른 많은 중국 친구를 가졌던 것으로 보아
어학적 감각이 뛰어나고 세련된 예절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술적 소양에도 눈이 높아 서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배움에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며 폭넓은 식견을 가졌습니다.
그는 개인의 능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쓰려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한 애국적 열의로 충만한 이였습니다.
중국이 서양에 의해 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조선의 장래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였으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함의 중요성을 판단하였습니다.
친구 유대치와 상의하여 미래를 위해서 청년 양반 자제들을 모아
신지식을 교육시킨 것으로 보아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과 함께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자식 오세창을 잘 교육시켜 사회에 필요한 일꾼으로 키운 것으로 보아
그는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유능함'이라는 덕목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인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적 틀에 자학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하려 했던 점도 높이 평가받아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재가 불자로서 흔치 않은 유능함과
식견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은 자신이 중국을 통해 보고 느낀 제국 주의의 침략적 속성에 대해
그의 동지인 유대치나 젊은 개화 사상가들에게 충분히 전해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바쁜 일상의 삶을 살았고,
개화파 청년들의 실제적 교육은 유대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한계는 있습니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의 양면을 함께 보고
이에 대한 경계와 교육이 청년 개혁가들에게도 같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49세의 길지 않은 삶이지만
재가 불자로서 자신의 능력과 소양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능력을 세상의 유익을 위해 바친 유능한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역매 오경석의 삶은 현대를 사는 불자로서 많이 본받아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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