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불교 근대사

2.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4) 대치 유홍기의 삶

by 아미타온 2025. 10. 20.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4) 대치 유홍기의 삶>

 

<서울 청계천>

 

1. 백의정승 대치 유홍기 선생

 

서울의 청계천 광교(廣橋)와 장교(長橋) 가운데쯤에

가느다란 나무다리가 있었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지금의 관철동에 이르는 좁은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 옆에는 허술한 초막집들이 많았습니다.

청포(靑布), 입(笠), 혜(鞋), 철물 등을 하는 가게(전)가 많은 곳이라서

북촌 양반들은 체면이 깍인다고 해서 잘 들르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중인촌이었기 때문입니.

 

그런 전통(廛通)에 귀인인 부마(왕의 사위)의 행차가 잦았습니다.

그야말로 야단스런 행차였습니다.

게다가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부마가 하마(下馬)하여

공손한 몸가짐으로 그 중 한 초막집 문턱을 넘나드는 일이었습니다.

 

광통방(廣通坊)의 전통에 귀인이 나타나는 것만도 신기한 일인데,

더욱이 일개 중인집 문앞에서 하마까지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철종의 부마 박영효의 행차였습니다.

 
그리고, 문과 장원 급제자로 고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젊은 인재인

호조 참의 김옥균도 역시 하마의 예를 갖추어 초막집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승지 벼슬의 서광범, 영의정의 아들 홍영식,

청나라 장군 원세개의 역관 오경석 등도 역시 같은 행차,

같은 공손을 사흘이 멀다하고 서로 다투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초막집에는 거사 유홍기(劉鴻基,1831~?)가 살고 있었습니다.

 

호를 '대치(大痴)'라고 하는 이 거사는

개화 사상의 큰 현인으로 갑신정변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는 불교 선도(禪道)에서 불심의 현대화를 시도,

사회 개혁론으로까지 그 이론을 발전시켜 내었습니다.

 

그 사회 개조론을 구체화하기로 뜻을 모은 사람이

바로 개화파의 핵심 김옥균과 박영효였습니다.

 

유대치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백의정승(白衣政丞,재야의 영의정)'이라 불리웠습니다.

 

인품이 고매하고 학식이 탁월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신분이 중인인지라 벼슬길에 나갈 수 없어 재야에 묻혀 있었습니다.

 

육당 최남선이 지은 <고사통>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경석이 조관을 유도하고 외교를 운용할 때에,

일백의(一白衣)로서 시정에 은거하여

<해국도지>,<영환지략> 등으로서

세계의 사정을 통찰하면서 뜻을 내정의 국면 전환에 두고

가만히 귀족 중 영민하고 준수한 인재들을 규합하여 방략을 가르치고

뜻과 용기를 고무하여 준 이가 있으니,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백의정승의 이름을 얻은 유대치가 그 사람이다.

 

귀족 청년 박영효,김옥균,홍영식,서광범과

귀족이 아닌 이로 백춘배, 정병하 등이 다 대치 문하의 인재로

일변 일본으로 청을 몰아내고 러시아로 만주를 회복하여

청년 중심의 새 나라를 건설함이 그 이상의 윤곽이니,

박영효, 김옥균 등이 연래로 일본 교섭의 선두에 선 것도

실상 대치 유홍기의 지도와 계획 아래 나온 것이요,

세상이 개화당으로 지목하는 이란 대개 대치 문하의 사람을 말하였다."

 

최남선은 개화당을 유대치 거사 문하의 사람들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청계천>

 

2. 불교 숭신

 

유대치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의술을 업으로 하였고 불교를 깊이 숭신하였습니다.

 

<김옥균 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대치 선생은 본시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의사를 업으로 하였고

깊게 불교를 믿어 도는 높고 품성이 청백하였다.

학문으로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였다.

변설은 유창하였고,

신체는 장대하여 홍안백발에 항상 생기가 넘쳐 행동하였다.“

 

또한,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치를 통해서 김옥균 등은

박규수로부터 배우지 못했던 신지식을 알게 되었다.

특히 불교가 그랬다.

그의 감화와 영향을 받아 김옥균은 불교 신자가 되었다.”

 

유대치는 조선의 선비들은 예의는 뛰어나나

도(道)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한탄하고

개화 청년들에게 불교 공부를 권하였습니다.

 

유대치의 영향으로 김옥균,박영효를 비롯한

개화당 대부분의 인사들 대부분이 불교를 신앙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 <조선불교통사>를 지은 이능화의 글을 비롯해

여러 자료에서 이러한 불교신앙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유대치 거사는 서울 사람으로 

이름은 홍기, 호는  방부제 또는 여여이다. 

 

선(禪)을 담론하기를 좋아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이종원,  이정환, 박제경, 오경석, 오경림,

김영한, 김영문, 한세진 및 이회목 등의 거사가 도를 묻고 따라

경성에 일시 선풍이 성행하였다.

 

김옥균, 서광범 등 귀한 신분으로

육식하는 세속인이나 선도(선도)를 물어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동쪽 일본으로  가서 정세를 파악하고 혁신을 결의하니

갑신정변이 그 결과이다.

대체로 불교의 이치를 배워 곧바로 세간법에 응용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대치는 '백의대신'이라고 불리웠다.

사변이 일어나자 거사는 도피하였데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 때에 혁신파에 속하는 두 스님이 있었다.

한  분은 범어사의 이동인 스님으로

일본에 가서 사원에 살면서

김옥균 등을  만났는데 이로 인해 그에 속하게 되었다.

 

후일에 경성으로  돌아와 민영익의 집에 묵으면서

속인의 의관을 갖추고 대궐을 출입하다가

민태호의 초청으로 간 뒤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

 

또, 한명의 스님은 백담사의 탁몽성(법명은 각지, 속명은 정식)으로

본래 강사이다.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나 알게 되어 참가를 결심하였다.

그를 따라 일본에 가서 동경에서 죽었다.

지금의 불영사의 이설운 및 백담사의 장대우가 모두 그의 법제자들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유대치는 새로운 불심을 얻어

그것을 개화사상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젊은 승려들뿐만 아니라 유학자들과 접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 문물과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서울의 광교 부근에 있었던 그의 집은

개화 사상을 빚은 온상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젊은이들이 날마다  그의 집을 출입하면서

불교를 비롯하여 국내외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박영효의 회고담)


"김옥균과 내(박영효)가 먼저 사귄 것은 불교토론으로요.

김옥균은 불교를 좋아해서 불교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것이 재미가 나서 친하게 되었소.

그때에 김옥균은 27세, 나(박영효)는 17세였소."

(박영효가 춘원 이광수에게 했던 말)

 

"김옥균이 유대치로부터 배운 사상의 감화 외에

특기해야 될 것은 대치의 불교신앙의 일이다.

대치는 조선학사들이 의례에는 능하면서도

도념에는 관심이 적음을 개탄하여

김옥균에게 권하여 불교를 연구케 하였다.

(고균기념회, 김옥균전 상권, 경응출판사)

 

김옥균이 1851년생, 박영효는 1861년생입니다.

 

그들이 처음 만나 불교를 토론할 때의 나이가

27세와 17세였다면 1877년이 됩니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다음해가 됩니다.

 

이 해(1877)에는 개화파의 비조 박규수가 병으로 죽고

오경석도 강화도 조약의 실무책임자로 과로로 쓰러진 해였습니다.

 

따라서, 이후 갑신정변(1884년)까지 

개화 청년들의 실질적인 지도는 유대치에 의해 행해졌고,

유대치가 김옥균,박영효 등의 개화파 청년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스승으로 위치하였슴을 알수 있습니다.

 

  

3. 갑신정변 실패

 

유대치는 중인 출신임에도 이들의 존경 속에서

이들에게 불교신행과 개화사상을 가르쳤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며 개화파의 스승으로 활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화파의 젊은 주역들이 단행한 성급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야사>에 의하면 김옥균,박영효 등은 갑신정변 쿠데타 전야에

광통방의 유대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이미 노경에 들어선 대치 거사는

"군 등은 과연 일본의 정략을 아는가?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일본 병사 1백이 5천의 청나라 병사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의 거사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이상 더 시간을 미룰 수 없다고 김옥균이 말하고,

별리를 고하자,

유대치는 슬프하며 "'안저(眼底)에 암수(暗愁)가 넘치고

유루비두(流淚鼻頭)"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불교숭신(佛敎崇信)으로 일하라'고 타이른 뒤

자리를 고쳐 돌아 앉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나, 삼일천하가 선포되었으나

유대치는 그 귀추를 지레 예측했음인지

표연히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행방을 찾았으나 알길이 없었습니다.

 
오대산 상원암 인근에 토와생식(土臥生食)하고

살았다던 한 노선사가 바로 대치가 아니었던가, 아니면,

용문산 중턱의 암굴에 좌선 자세로 굳어져 죽어있는 노선사가

바로 그 대치가 아니었던가하는 구구한 소문만 나돌 뿐이었습니다.


"김옥균의 은사 유대치 선생은 갑신정변의 패망을  알자

6일밤 집을 나와  산에 들어가 마침내 그 사소(사소)를 알지 못한다.

조선의 여명을 알고 독립당을 고취한

당년의 국사(국사) 대치 선생이 돌아간 곳은 아는 자 없다.

 

혹자는 선생이 평소에 부처님을 숭신하였는데

당시 오대산 중 천하의 명승 백운 선사가

혹 대치선생의 변생 불제자가 아니었던가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인은 체포되어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김옥균 전) 

 

 

< 백의정승 대치 유홍기 선생 묘비명 >

                        

 

------------------------------------------------------

 

대치 유홍기 선생이 갑신정변 개화파의 스승으로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화파의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불교 사상을 가르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개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책을 내놓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쿠테타로 끝나고

개화파 인사들이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마쳤기 때문입니다.

 

유대치 선새은 역관 출신으로 태어나

의술을 본업으로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중인들이 아버지 직업을 세습하던 것에서 벗어나

의술을 본업으로 선택한 데는

당시 전염병이 창궐하고 백성들이 고통받던 시기에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충만한 이였슴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조선의 유학자들이 의례에는 밝지만 도념이 없음을 한탄하여

자신이 숭신했던 불교를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에게까지 가르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김옥균,박영효 등이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의 불성에 기초한 평등과 자각의 중요함을

이들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고취시켰습니다.

 

그는 번뜩이는 예지와 지혜로서 새롭게 세상을 보고

시비분별을 가리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거사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를 개인적 수양에 머무는 것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불경 속에만 파묻혀 지낸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에 통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고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구시대적 제도와 학정 속에

고통받던 조선 백성들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깊이 있게 고뇌하고 새로운 방책을 만들어내었던 열린 지식인이자

현실 참여적인 자세를 가졌던 분으로 생각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외세(일본)에 의존하여 쿠테타적 방법으로

성급하게 일을 도모하려는 제자들을 일찍 제어해내지 못하고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폭넓게 새로운 개화 세상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주변과 제자들을  폭넓게 교육시키지 못한 점입니다.

 

그의 사상이 훌륭하고 그의 품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현실 사회의 힘의 역학적 구도를 살필 수 있는 눈과 함께

성급하지 않게 바른 방법을 심사숙고해서 찾는 차분함이 없다면

그 쌓아온 공부의 높음에 비해 보잘것 없는 댓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야사가 사실이라면 갑신정변 전야에

자신을 찾아온 개화파 제자들을 보는 유대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성급한 제자들의 조급함으로 인해

자신이 수십년간 공들여 세운 개화의 꿈이 날라감을 보고,

정변의 취소를 권유해도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들여 키운 제자들이 제 명에 죽지 못하고,

가게 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적셨을 것입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불교숭신의 자세로 일하라."

이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후에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무엇인지 잘 숙고하며 일하라고 말하면서

자리를 고쳐 돌려 앉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치 유홍기 선생은 중인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의 한계에 자학하지 않고

불교를 깊이 숭신하여 양반 자제들을

자신의 제자로 만들만큼 당당하고 현명한 불자였습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세상의 흐름에 맞게

세상을 위하여 좋고 바르게 적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록 실패한 혁명의 숨은 실세로서 성공은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불자로서 깊이 본받아야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