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5) 승려 이동인의 삶>

1. 개화승 이동인
이동인(1849~1881)은 부산 범어사 출신의 승려였습니다.
이동인은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 불교와의 접근을 통해 개화 문물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동인은 1878년 3월 일본 불교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의 부산별원에 드나들면서
오쿠무라 엔싱 등의 일본 승려들과 교류했고
서구 여러 나라에 관한 사진과 '만국사기' 등을 얻고는 개화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1879년 무렵에 30세의 이동인은
서울로 올라와 신촌 봉원사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초대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花房)의
조선말 통역관 풍현철(風玄哲)이라는 일본 승려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 청계천에서 개화당을 지도했던 유대치가
불교 신자인 것을 기화로 두 사람은 서로 교유함으로서,
유대치 거사를 스승으로 삼고 있고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개화 운동의 선구자인 김옥균을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15세로 개화파에 참석했던 서재필은
이동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하루는 김옥균이 동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서울 서대문 밖 봉원사로 놀러갔다.
가보니 스님 한 사람이 있어
매우 공손하고 말도 잘하고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인데,
이 중이 처음으로 사진을 보여주고
<만국사기>라는 책 한권도 보여주었는데
매우 재미가 있었다.
....
책 중에는 역사도 있고 지리도 있고
물리,화학 같은 것도 있어서
서너달 동안은 남몰래 그 절에 다니면서
이러한 책을 보고 배우기도 하였다.
...
그러니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스님이
우리들에게 그러한 책을 읽히고 사상을 가지게 한 것이라
봉원사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
....
(서재필 박사 자서전)
김옥균,박영효 등은 이동인에게 동지로서의 큰 애정을 가졌고,
이동인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의 기술과 과학을 배우고
정세 시찰을 위해 일본 유학을 권유하였습니다.
이동인은 이들 개화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1879년에 일본 유학을 감행했습니다.
개화당 인사들이 이동인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한 이유는
이동인이 이미 부산에서 일본 승려들과 접촉한 감각이 있어서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 오쿠무라 엔싱은
<조선 개교 오십년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1879년 5월 중순에 홀연히 경성으로부터 이동인이 내방하였다.
사람을 멀리한 뒤에 지금까지 속마음을 주기를 좋아하지 않던 이동인이
"이제 시기가 도래하였으니 도와주십시요."라고 전제한 뒤에,
김옥균, 박영효 양 씨의 의뢰를 받아 일본의 정세 시찰을 위해
일본 유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고 말하고,
이 기회에 일본의 문물를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하여
조선의 문화개혁에 공헌하고자 한다는 희망을 말하고,
금후는 전적으로 표리없이 귀사(오쿠무라 엔싱)에게 맡길 터이니
나의 뜻을 알아달라고 열성이 얼굴에 넘치었다.
또한 김옥균,박영효 양씨로부터 그 여비를 주었다고 하는
길이 두 치짜리 순금봉 4개를 보이면서 여행 준비를 상담하였다.

2. 일본 유학
그리하여 이동인은 근세 최초로 개화파의 지원과
부산에 진출한 정토진종 승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밀항으로 1879년(고종 16년) 6월 일본 고도 교토에 도착하여
일본 정토진종의 본산인 동본원사에 거처를 정한 이동인은
1년 동안 일본말을 배우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
변화된 일본 사회의 실상을 면밀하게 살폈습니다.
이동인은 부산에 있던 오쿠무라 엔싱에게
다음과 같이 당시의 심경을 편지에 적고 있습니다.
"..... 소생(이동인)은 본산(일본 교토 동본원사)에 도착한 이후로
잘 먹고 따뜻히 자며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법주(오쿠무라 엔싱)의 넓으신 은혜가 이렇게 높고 후하시니,
장차 어찌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위 어학(일본어) 공부는 아득하고 멍멍하여 분간을 할 수가 없으니,
어느 때나 귀가 뚫리고 입이 터져 보고 듣고 말을 할 수가 있을른지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가토 스승(加藤師)께서도 평안하시며 다른 도반들도 잘들 지내시는지,
여러분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하루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1880년 4월, 일본어에 익숙해진 이동인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일본 수도 도쿄로 이동하여 토오쿄오 본원사 지원에 기숙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사노 쓰기노시(朝野脚遲:조선의 야인이자 깨달음이 더딘 중생이라는 뜻)'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일본 승려들의 소개로 일본의 불교계 인사뿐 아니라
여러 지식인들 그리고 서양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넓게 교유했습니다.
이동인은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인 어네스트 사토를 만나
서구 열강의 외교정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매일 만날 정도로 친해져서
이동인은 사토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고,
사토는 이동인에게 세계 정세와 서양의 신문물에 대한
지식을 전해 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 근대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조선의 개화에 관해 토론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울러 조선과 아시아가 전근대의 미몽에서 깨어나
서양 제국주의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일본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지식인들의 모임인
‘흥아회(興亞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혈혈단신의 몸으로 정열적인 활동을 벌이던 중
1880년 7월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온 김홍집을 만났습니다.
이동인과 대화를 나눈 김홍집은
‘우리나라에 이런 쾌남아가 있었나’라고 연신 감탄하며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반겼다고 합니다.

3. 귀국과 고종 알현
9월 말에 귀국한 김홍집은 이동인을
당시 조정의 실력자인 민영익에게 소개하였습니다.
민영익은 민비(명성황후)의 조카로
나이는 젊었지만 당시 조정의 실세였으며
개화 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민영익은 이동인을 매우 좋아하여
자기 집 사랑방에 머물게 하고
얼마 후에 국왕인 고종을 알현하게 하였습니다.
이동인은 고종에게 각 나라의
신문물과 풍속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빨리 내정을 개혁하여 조선이 개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라가 위태로움을 진언하였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동인의 탁월한 안목과 논리정연한 언변에 감복하고
자주 불러 국내외 정세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총애하였습니다.
한편, 1880년 10월 당시 조정에서는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이 책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인 황준헌이 지은 책으로
조선의 외교 정책과 개국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황준헌은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땅에 대한 탐욕이 강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고,
조선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러시아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책략>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도 선진국 세력에 적대하고서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기 때문에 개국한 것이므로,
조선의 쇄국 정책도 끝까지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개국을 빨리 해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일본·미국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학생을 파견하여
병기 제조·군대 편성·외국어 교육과 천문·화학 등
서구의 여러 학문을 습득하게 하는 한편,
부산 등지에 학교를 세워서 서구의 기술을 교육하고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의 외교정책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 공평한 조약을 맺게 해주며,
국가 부의 축적 및 군비강화,통상통상에도 이익을 가져다주고,
결국 조선이 자강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개화파의 세력도 급성장해 있고
고종도 개국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격론 끝에 결국 미국 등의 외국과의 균형있는
외교 관계를 시급하게 수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4. 이동인의 활약
그리고, 고종은 우선 미국과 수교하기 위해
사전 교섭을 담당할 외교 밀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그 밀사로 이동인을 파견했습니다.
이동인은 1880년 10월 귀국한지 1달만에
다시 국왕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동인은 1880년 11월 15일 영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사토 서기관을 만났습니다.
사토는 이날 이동인과의 상봉을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아사노(이동인)가 어젯밤 갑자기 나타났다.
이제 막 도착하여 큰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국왕이 개명하였다는 희소식과 국왕이 내준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러시아로부터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국왕이 깨닫고 있으며,
몇 주일 넘기지 않아 개화당이 현재의 쇄국 내각(anti-foreign) 내각과
대치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이동인은 왕의 밀명을 받고 공식적으로
청나라 외교관에게 조.미 수교를 부탁하고,
비공식적으로 영국에 조선과의 수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줄것을 요청하여 그것을 약속받고 귀국을 준비했습니다.
귀국길에 이동인은 세계 각국의 발전된 문물을 직접 보여 주고자
성냥,사진첩,지구본,서적 등의 신상품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는 신상품 구입자금으로 자신이 처음 인연을 맺었던
일본 교토 동본원사에 차용증을 써주고 2만원을 빌렸습니다.
(이 차용증은 1887년 본원사에서 갚을 것을 요구해서
조선 정부에서 갚았다고 합니다.)
이동인은 귀국 후 조정에 이러한 신상품을 보여주며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당시 부싯돌로 불을 켜던 당시에 성냥으로 불을 켜자
고종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동인을 비롯한 개화파의 주장에 공감하여
일련의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1881년 1월 정부 내에 육조를 대신해
"통리기무아문"이란 근대적 행정조직의 신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아울러 일본에 견학할 총 60명의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기로 하였고,
군사기술을 습득하도록 38명의 학생을 중국에 파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 엘리트’들이 실제 외국을 견학하고 새로운 세상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이러한 개혁조치를 실시하면서
이동인을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수시로 이동인과 독대하며 개화에 대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자문하였습니다.
이동인은 조.미 수교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조약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국방력 강화책으로 신식 군대의 설립과 훈련을 위한 외국 교관 초빙,
그리고 군함과 대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신식 무기를 구입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1881년 5월에는 신식군대인
이른바 별기군이 창립되어 신식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윤허를 받아 일본에서 총포와 군함 구입을 알아보기 위해
현해탄을 다시 건널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5. 이동인의 허망한 최후
그러던 1881년 5월 무렵 어느날 밤
이동인이 머물고 있는 민영익의 사랑방에
고종의 경비원 문기수가 와서 이동인을 찾는다고 해서
따라 나선후 이동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한 유생은 지방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동인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 이동인은 입궐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써서 중의 머리를 가리고
몸에는 쾌자를 걸치고 무위소 별선군관이라고 칭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단독으로 국왕과 만났으며,
중인 주제에 통리기무아문이 신설되자 참모관에 임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동인은 홀연히 도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이 조선인인지 왜인인지 처음부터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도주한 사실을 깊이 규명하면 무슨 내막이 있을 것입니다.
....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요?"
이와 같이 혜성같이 등장하여 개화파의 전면에서 활동하던
이동인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개화를 반대하던 흥선대원군과 같은 수구파가
자객을 보내어 살해했다거나,
이동인을 조정에 소개했던 김홍집이 민영익과 친하게 지내던
이동인과 개화노선이 달라 살해했다든가,
일본이 조선의 자주화를 꺼려 살해한 것이라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동인이 외국으로 망명했다는 등
뒷소문만 무성할 뿐 33세의 청년 승려였던 이동인은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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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은 33세의 짧은 삶을 산 승려였습니다.
개화승으로서 주목할만한 족적을 남긴 것은
1879년부터 1881년까지 약 3년간이었습니다.
혜성처럼 나타나 3년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스러져버린 짧고 굵은 인생을 산 승려였습니다.
승려로서 그의 삶을 불교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주무대가 불교계 안이 아니라,
불교계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효 대사나 의상 대사처럼
불교 공부와 저술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승려도 아니었고
지눌 스님이나 만해 스님처럼 불교 침체기에 새로운 불교 개혁을 위해
노력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불교계 밖의 세속적인 일에 승려의 신분으로서
족적을 남긴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인으로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일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기독교의 문익환 목사님처럼
종교인이면서 독재와 불의의 시대에 사회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일반 정치인보다 더 열심히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도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승려로서 칼을 든 현실 참여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 종교인의 현실 참여적인 삶이
단순히 종교가 종교적 틀 속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호흡하며 현실을 바르게 바꾸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할 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인이 개화라는 현실 참여적인 삶을 살면서도
여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불교적으로 피력한 글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현실 참여의 동기나 입장을 알기는 힘듭니다.
그가 개화를 통해서 선진 문물과 제도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꿈을 가졌던 동기가
당시 전근대적인 제도와 궁핍된 삶 속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에 대한 자비심에서 출발했다면
그가 비록 승려로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맏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을 통해 부산에 들어온
일본 불교와의 접촉을 통해 일본의 개화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 불교계의 지인을 통해 일본 유학을 하였고,
승려로서의 신분을 유리하게 활용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는 그가 개화에 몸을 바치기로 뜻을 두었다면
차라리 환속해서 개화파의 일원이 되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승려의 신분이 바닥에 떨어지고
스님들이 불교계 내외에서 아무런 활동을 펼치지 못하던 시절
개화라는 꿈을 가지고 나름대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산
스님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집이 그를 만났을 때 그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여
울음을 터트릴 정도였다는 사실과
고종이 승려 신분인 그와 독대를 하고
통리아문의 벼슬을 내리고 조언을 구했다는 사실,
조미 통상 조약의 밀사로서 그를 파견할 정도였다는 것은
그의 개화에 대한 식견과 언변이 대단하였슴을 알 수 있습니다.
개화파의 젊은 기수들과 친분을 쌓고
영국 공사관의 외교관과 지기가 될 정도로
활발하고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슴이 분명합니다.
귀국시 일본 동본원사에서 2만원을 차용하여
여러가지 선진 문물을 구입하여 조선 조정에 보여줌으로서
이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줄 정도로
통크고 주도 면밀하고 정치적인 인물이었슴도 분명합니다.
그는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행정 조직의 신설을 주장했고
'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일본에 보내어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를 주었습니다.
군대 조직 및 무기의 현대화에 대해 계획할 정도로
개화에 대한 구체적인 비젼과 안을 가지고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왕성한 활동이 당시 수구층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협적이었습니다.
특히, 승려의 신분으로 당시 국법으로
승려의 한양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왕과 독대를 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상당히 밉보이는 짓이었을 겁니다.
개화파도 노선에 따라 당시에 복합적인 역학 관계를 가지고
서로 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는 결국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결국은 실종(또는 암살)이 되어 불행한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그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오쿠무라 엔싱에게 보낸 편지로 미루어보아
그는 일본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슴을 알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정토진종에서 이동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보아
이동인을 통해 일본 불교를 확산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침략적 야욕이 후일에는 노골화되어
결국 식민 통치로 이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살아서 계속 활동을 하였다면
친일 정치 승려로 활동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그가 일본의 침략적 속성을 알고
오래 살아 자주적인 개화를 추구하고
개화파의 의지가 좌절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또 어떻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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