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5) - 설중매화>

(1) 낙산사 홍련암 사건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은 이후
만해는 낙산사 홍련암에서 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총독부에서 새로 부임한 군수가
관광차 홍련암에 오게 되었습니다.
도로 정비까지 해가며 다른 스님들은 모두 나가 영접을 하는데,
만해 스님만 요지부동 홍련암에서 관음정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약이 바짝 오른 군수가
저 자를 끄집어 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만해 스님은 벽력 같은 소리로 호령했습니다.
"네가 군수면 네 나라 군수지, 내 나라 군수는 아니다"
이에 대해 군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2) 소화를 소화해 버리니 가슴이 시원하군
한편, 1927년 49세의 만해는
서울에 올라와 민족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민족 항일 전선인 신간회 창립위원로 활약하여
5월에는 중앙집행위원,
7월에는 서울지회장에 올라
위치에 올라 좌파 우파로 갈려져 있던
당시 운동가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바쁜 생활 중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간회에서 전국에 돌려야 할 공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쇄된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월 몇 일'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여 장이나 되는
그 봉투를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 없애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에게 가슴이 후련한 듯
만해는 한마디만 남겼습니다.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가슴이 시원하군! "

(3) 청년 사랑
1929년 겨울에는 광주 학생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여론화에 앞장서고자
당대 유수의 민족운동과들과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만해는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습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소심(小心)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를 보면
사정없이 호통을 쳤습니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
나 같은 존재는 독립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해봐! "
그리고,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그는 오히려 축하한다는 격려의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을 대하면 엄격한 반면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스님의 방에서 밤 늦도록 이야기하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깨어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져
이불이 잘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해 스님 자신은 웃목에서 꼼짝않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김관호 선생은 술회하고 있습니다.

(4) 민립 대학 설립
만해는 민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려면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신문사 경영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챈 총독부에서는
식산 은행을 통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
"성북동 일대의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돌아앉았습니다.
"난 그런 거 모르오!
어서 나가보시오."
그는 그것이 무엇을 하자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온 돈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렵고 힘들지만 옳은 일이 아니면
사정없이 통박을 가했습니다.

(5) 불교 청년 운동, 만당
고난의 칼날 위에 올라서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의 가슴 속에 심어주었습니다.
1930년 법린, 상호, 범술 등 청년 승려들이
민족의 자주 독립과 불교의 대중화를 목표로 조직한
불교계의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받아
청년 승려들의 항일 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불교총동맹 조직으로
일제의 종교 억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의 선봉이 된 스님은
1931년 6월에 당시 유일한 불교 잡지인 <불교>지를 인수하여
<유심>지에서 못 이룬 불교대중화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84호부터 시작하여 108호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글뿐 아니라
청년의 교육문제, 민족의 진로문제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당신의 혼을 실어 발표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전주 안심사에 내려가
그동안 쌓여있던 한글 경판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손질하여 책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끼전>이나 <별주부전> 등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박해받아 오던 불교가
민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부처님의 전생담을 옮겨놓은 이야기들이었으나,
그 출처를 모르는 채로 묵혀 두었던 것들이었습니다.
1931년 9월에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 수용소 설치를 결의하여
나병 구제에 온 정력을 쏟았습니다.
1932년 2월에 만해는'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주도하였습니다.
"인류는 향상적 동물이다.
향상이 자기의 실력에 의해서
한 단계 두 단계 뻗어나가야지
그렇지 못할 때에는 파괴와 멸망만이 있다"
만해 스님은 이와 같이 주장하며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우리 경제의 힘을 기르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또 교육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그해 4월 20일 민립 대학 설립운동을 지원하는
민립대학 기성회 주최의 기념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습니다.
"다같이 조선 민족이 된 의무감으로 일치단결하여
우리 2천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민립대학을 설립하자.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의 삶을 위해 철저한 교육으로
내일을 준비하자."

(6) 모기
한편, 요시찰 인물이었던 만해는 늘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만해가 주로 가 있던 곳은
서울 종로 안국동 선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사건만 생기면
1차로 잡혀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혀야 했기 때문에 늘 불편한 처지였습니다.
그때 양산 통도사 측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양산 통도사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산 경찰서에서 만해를 떠나게 하려고
통도사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조선인 경찰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는 펜을 들었습니다.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 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글은 <모기> 라는 제목으로 조선 일보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시를 보자 일본 앞잡이로서 스님의 뒤를 쫓던
그 조선인 경찰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풍난화의 매운 향내를 토하듯이,
설중매화와 같이 찬바람 눈비를 원망할 것이 없이
이와 같이 만해 스님은 당당한 모습으로 그렇게 버티고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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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는 참으로 혹독한 겨울의 시대였습니다.
그 겨울울 살면서 설중매화처럼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중매화를
사군자 중의 하나도 그 덕성을 칭송합니다.
우리 불교계에 일제 시대의 겨울을 살면서
설중매화 같은 꽃과 향기를 풍긴 분이 계시다면
바로 만해 한용운 선사입니다.
만해 스님은 추운 겨울 속에서도
설중매화와 같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 청정함을 유지하고 세상에 맑은 향기를 주었습니다.
만해 선사가 선(禪)을 통한 깨달음의 향기를
가진 분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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