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6) - 심우장의 정절>

(1) 심우장
1933년 55세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온 만해는
유숙원과 결혼하고 성북동에서 기거했습니다.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된 만해지만,
자신은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 다니는 외톨이 신세였습니다.
마음놓고 기거할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뜻있는 분들이 뜻을 모아 성북동에 집을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만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건 안되지.
남향이면 바로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될터이니
차라리 좀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좀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어."
그리고, 주춧돌을 돌려놓아 북향집이 되었습니다.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짓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 담았던 집이 바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입니다.

손수 지은 심우장의 택호(宅號)는 "소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소는 '깨달은 마음자리'를 비유합니다.
그래서, '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에서 만해는 마지막까지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마치 <심우도(십우도)>의 한 장면으로
'중생과 함께 살며 깨달음을 향유한다"는
입전수수의 모습처럼 심우장의 저잣거리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만해의 말년은 요석공주와 결혼하고
중생제도의 길을 나선 원효 스님과 유사합니다.

(2) 김동삼
한편, 심우장에서 만해는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흑풍>〈박명> <후회> 등의 신문 연재 소설을 남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명을 직접 썼습니다.
또한, 정인보, 안재홍 등과 경성부 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 서세백년기념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노력이었습니다.
1937년 3월에는 재정난으로 휴간된 <불교>지를 속간하였습니다.
그리고, 1937년 3월에 만해가 크게 기대했던
애국지사 일손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 구치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조선은 앞으로 꼭 해방이 될 것인데,
해방 이후 혼란이 있을 경우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김동삼뿐이라고 믿고 있던 만해는 천지가 무너지는듯
안타까와하며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연고자가 있으면 김동삼의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왔는데도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그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만해가 달려가 그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모셔와서 크게 울며 5일장을 지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총독부 회의실에서 31본산 주지 회의를 주최한
일본 미나미 총독에게 호통을 친 만공 스님을 만나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신 주장자으로 한 대 갈길 것이지" 하였습니다.
이에 만공 스님은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라고 응수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만공 스님은 사자가 되고 만해 스님은 곰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러나 만해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어미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3) 매화의 정절
지사답게, 법사답게, 시인답게
일관된 길을 흔들림 없이 걸은 스님은
변절한 동지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창씨개명한 당시 식자들을
똥보다 죽은 시체보다 더 더럽게 여겼습니다.
일제에 변절했던 친구였던
최린, 이광수, 윤치호 등을 일러
주인에게 충복하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말했습니다.
1939년 세수로 61세 회갑을 맞이하여
오세창,권동진,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 등이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만해는 총총히 지나간 예순 한 해가
짧은 생애 같아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만해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습니다.
"가난과 병을 마음대로 하니
누가 묘방을 얻은 줄 알겠지만
그러한 문제들이 나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이미 한 모습 변하여 님께 향하는 마음 속에서
물같이 흐르는 여생을 그대여 묻지 마라.
다만 매미 소리가 석양을 맞았을 뿐이다."
한편, 일제는 말기에 발악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혹독한 무단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황민화 운동을
전 조선이 전개하며 강요해 나갔습니다.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제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 변절할 때
만해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비타협의 정신으로 나갔습니다.
창씨 개명 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 학병 출정을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마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아파했습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그는 매화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국 청년들아!
너희들은 시대적 행운아다.
현대는 조국 청년들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이다.
만지풍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이것이 너희가 가야할 참 모습이다"
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게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하며
진취의 청풍을 불어 넣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4) 입적
이와 같이 불교사상가, 민족운동가, 근대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는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한 해 앞두고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습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만해의 육신은
불교 관례대로 다비식을 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법신은 영원히 이 조국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된 것입니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수많은 불교인이 있지만,
부처님의 근본정신과 가르침을 이 땅에 심고자 노력한 이는 흔치 않았습니다.
만해는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의연함을 보여 지조를 꺽음이 없었습니다.
불굴의 투지로서 겨레를 이끌었습니다.
만해를 추모하여 쓴 조종현('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의 부친)의 시는
만해의 큰 삶을 잘 집약하고 있습니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개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꿋꿋하게 걸어갈 때 성역(聖域)을 밟기도 했다.
보리수의 그늘에서 바라보면 중으로도 선사(禪師)로도 보였다.
예술의 산허리에서 돌아보면 시인으로도 나타나고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투사였다.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건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뱉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럴까?
그렇게 될까?
한 점 뜨거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도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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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만해 스님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만해는 청년시절 행적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발로 움직이는 행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절에서 불교적 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고 시대를 보고자 끊임없이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세계를 보기 위해 세계 일주를 감행하여
러시아, 일본, 만주를 유랑하기도 했고
세계 여행 과정에서 죽음의 위기도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세상을 보고 배우고 느끼고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승려들이 불교적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다양한 서양 철학이나 계몽 서적을 읽으며
불교가 시대와 현실에 맞게 변화해야 함을 자각한 인물이었습니다.
만해는 파괴는 유신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형식주의와 나태함을 혐오했습니다.
오랜 불교 전통이라 하더라도
형식주의와 나태함에 젖어있으면
그것을 과감하게 깨어부수고 불교적 이상을 잘 구현하고
시대 정신과 현실 상황에 맞게 새롭게 바꾸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현실 감각도 이회광처럼 힘의 논리에 맞게
일본에 기대어 굴종적이고 나약한 현실 감각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하에
무엇이 정의이고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바른 정도(正道)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절을 지키는 금강역사처럼 당당하게
현실적 힘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 조류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가진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배워야 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와 시대를 바로 읽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그의 자세!
현실 감각이 아무런 주체성이 없이
힘의 논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정도를 바로보고 이를 일관되게 추구해가는 힘!
이런 점을 만해 한용운의 삶을 보고 느끼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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