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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4) - 님의 침묵

by 아미타온 2025. 12. 14.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4) - 님의 침묵>

 

<설악산 천불동 계곡>

                                                  

(1) 불교적 성찰의 시간

 

1925년 만해 스님은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장경각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지난 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며 자신보다 400년 앞서

이곳을 지나갔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흔적을 발견하고

시대는 많이 흘렀어도 느끼는 바는 오히려 새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 동안(同安) 상찰선사(常察禪師)의 선화 게송인

<십현담 十玄談>에 주(註)를 달았던 매월담 김시습의

<십현담 주해>를 읽고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직접 매월당의 주와 비교, 대조하면서 주(註)와 해(解)를 달았습니다.

 

 

(2) 님의 침묵과 선(禪)

 

선의 이치에 이해가 깊었던 그는 선적 정신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솟아 나와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모국어로 지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1925년 8월 설악산에서 만해는 유명한 시집<님의 침묵>을 탈고하였습니다.

 

<님의 침묵>은 설악산의 영상과 만해의 심혼이 담긴 노래입니다.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침묵의 노래를 상징적 님을 향하여 투영했습니다.

 

 

< 님의 침묵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 는

차디 찬 티끌이 되어서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알수 없어요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나룻배와 행인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해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어둠 속에 중생을 싣고 물을 건너야 하는

나룻배의 역할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만해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신비로운 연꽃같은

<님의 침묵>을 통하여 또다른 미묘한 법문을 설하고 있습니다.

 

 

 

(3) 평론

 

한편, 만해의 <님의 침묵>에 대해

현대의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장차 이 나라의 시인들은 시학(詩學)을 배우려고

<님의 침묵>을 읽는 일을 드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전통을 생생하게 몸에 지니고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며 사느냐'하는 문제와 맞설 때마다

<님의 침묵>이 지닌 사자후에 귀를 기울여라"

 

"깨달음의 증험을 내용으로 한 시를 증도가(證道歌)라고 하는데,

시집 <님의 침묵>은 전체가 하나의 증도가다.

그의 시는 사랑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시집을

'사랑의 증도가'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신문학은 한문과 작별하여

모국어로써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신문학은 한문과 함께 사상까지 작별하고 말았다.

신문학사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하나의 예외는 시집 <님의 침묵>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시집처럼 불교 전통이 우리 말로써 시화된 사례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은 현대 평론가들의 비평처럼 <님의 침묵>은

20세기 한국어가 이룩한 석굴암과도 같은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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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스님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남긴 선물은 참으로 많습니다.

 

<님의 침묵>도 바로 그 선물입니다.

 

<님의 침묵>에 나오는 여러 시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님의 침묵>은 

만해의 깨달음의 언어이며,

우리 또한 깨달음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해는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워하고 사랑해서 함께 하고 싶고,

상처가 있어도 반드시 보듬어야 하는 그 무엇.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다 님이 있습니다.

 

그 님을 향한 말없는 침묵 속에서 흐르는

깊은 그리움과 사랑을 깨달음의 언어로

읊은 것이 <님의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