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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3) -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by 아미타온 2025. 12. 13.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3) -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만해 한용운 스님과 공약삼장(서울 선학원)>

(1) <유심> 잡지 창간

 

만해 스님은 늘 마음 속에

세 가지의 커다란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처님 정신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신라의 혜초 스님처럼 인도 부처님 성지를 가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생 제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언론매체를 생각하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 하여볼까'

 

만해 스님이 지은 위의 시 내용처럼

남아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그런 원이었습니다.


그런 원을 가진 만해였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저울추 역할을 기미년(1919년)에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 총독부는

무단정치 10년을 통하여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을 다 막아버렸습니다.


서울로 되돌아온 만해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 교양 잡지 《유심 (惟心)》(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습니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청년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가지고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습니다.

 

<유심> 잡지에는 기미년(1919년) 3.1운동에

동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등이 글을 기고했습니다.

 

많은 원고를 총독부 검열에 삭제당하면서도

만해는 굴하지 않고 세계 정세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2) 3.1운동의 서막

 

<유심> 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 정세는 급격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습니다.


1918년 12월 초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는데,

때마침 그 기사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습니다.

 

약소 민족은 모두 일어나서

독립 운동을 하라는 기사의 내용은

만해 스님의 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만해는 구황실의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는 물론

재력 있는 사람들까지 다 끌어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국적인 행사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 만방에 외치자는 의논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동년 12월 26일 만해는

일본 유학 시절 뜻이 통했던 최린을 은밀히 만나

그간의 결심을 털어 놓으면서

우리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최린의 동의를 얻은 후

천도교 측의 권동진, 오세창도 적극 참여한다는 뜻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란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자

그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일본 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내자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만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조선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운동이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인데

청원에 의한 타의의 독립운동이 웬말이냐!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힘으로 나가지 않으면

독립운동은 불가능한 것이다"

 

만해는 그 날이후 월남 이상재와도

영원히 결별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또한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등 귀족들과 접촉했으나,

이들은 한결같이 꽁무니를 뺐습니다.


처음 200명으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귀족들과 재력있는 사람들은 다 빠지고,

결국은 종교 운동가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던 월남 이상재가 빠져나가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15명을 모으고

천도교에서 16명, 불교에서 2명(한용운,백용성)으로 총 33인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천도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승낙을 받고

당시의 거부 민영휘를 찾아가서 거사자금을 마련하여 이를 계획하였습니다.

 

<덕수궁 앞 만세 시위 군중>

 

(3) 33인 민족대표과 감옥 생활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한용운 스님의 '공약 3장'이 첨가되었습니다.


기미년(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 스님의 축사와 대한 독립 만세 세번을 선창하고

일본 경찰에 피습 당해 마포 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으로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이 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국가내란죄로 민족 대표 33인이 모두 사형된다는 소문에는

마음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미결수로 있는 동안 너무 힘들어

눈물을 흘리는 일부 민족 대표들에게 똥통을 둘러 엎으며

만해는 다음과 같이 불호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

 

만해는 옥중에서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습니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사식을 받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세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만해는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습니다.

공판할 때 33인을 한 사람씩 불러 취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어 방청석은 꽉 찼습니다.


그 중 당시 가장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린 선생이 아주 명쾌한 논리로 일본의 무단정치 10년을 고발했습니다.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일본 정치의 잘못된 점을

낱낱히 고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그때 만해는 최린의 진술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린의 논리에 의하면 만약 일본이 정치를 잘했다면

오늘의 독립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만해는 당장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최린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고우(古友)! 내가 내 나라 찾자는 일에

일본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리요"

이윽고 만해의 취조 차례가 왔지만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 보아도 재판장의 인정 신문부터 묵살해 버렸기 때문에

재판은 조금도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재판장이 피고는 왜 말이 없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재판장에게 호령을 쳤습니다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

 

또,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에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폭동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당당히 말했습니다.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하자는 뜻이다"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 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만해는 다음과 같이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너희 나라(일본)에 승려 월조 대사가 있지 않느냐?

우리 조선에도 한용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만해 스님이 만든 3.1 독립선언서 공약 3장>


(4)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또, 그는 "나는 할 말이 많다. 서면으로 할테니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구하여

그 유명한〈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란 조선 독립 이유서를 써내려갔습니다.

 

53장의 논문을 옥중에서 참고 서적이나 자료 하나 없이 완성할 만큼

만해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그는 평화를 획득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인가를 주장했습니다.

 

탁월한 식견과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당당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침략 강점의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선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첫째, 민족 자결의 원칙은 정의이며 인류가 누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력도 감히 자결의 원칙과 독립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공언했습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
자유를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일지로다.

......
전 세계를 대표할 만한 군국주의는

서양에 독일이 있고 동양에 일본이 있도다.

......
오호라, 총칼이 어찌 만능이며 무력이 어찌 승리이리요.
정의가 있고 사람의 도(道)가 있도다.

극악한 군국주의는 독일로써 최종막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는가.

......
독일의 총칼이 적지 아니하거늘

전쟁의 종극을 고함은 무엇 때문인가.

정의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니라.

둘째, 조선 독립 선언의 동기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세계 대세의 변천과

민족 자결 조건에 대하여 역사적 현실성과 미래의 이상을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셋째, 조선 독립 선언의 이유를 4개 항목으로 밝히면서

참으로 침통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고 비분강개했습니다.

 

1) 민족적 자주성과 회복 때문에 독립 목적을 달성치 아니하면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남쪽 나라 새도 옛 보금자리가 그리워 남쪽 가지에 집을 짓고,

     호마(胡馬)가 저의 깃든 곳이 그리워 북녘 바람을 향하여 우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한 것이다.

    동물도 이렇거니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라고 하며

    조선 독립은 당연한 일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3) 민족 독립의 원동력은 자유주의에 있음을 지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4) 만주와 중국 본토까지 넘보는 침략 중인

    군국주의 일본의 야심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은 역사적 의무라고 천명하고 강조하였습니다.

 

넷째, 조선은 독립 국가의 필수요소인

토지, 백성, 문화가 구비된 당당한 독립국임을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독립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와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해는 다음과 같이 일본에 경고하였습니다.

 

 "일본인은 기억하라!

시모노세끼 조약, 포츠머스 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갖은 흉계와 폭력으로 조선 독립을 유린한 것은 어떠한 배신인가.

오직 평화만이 상호공존을 가능케 하니 일본은 깊이 각성하라"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계 33인 민족 대표였던 백용성(백상규) 스님>

 

5. 한결같은 당당함

 

만해에게는 또한 따뜻한 동포애와 진한 인류애가 있었습니다.

 

독립을 선언한 직후 마포경찰서로 붙들려 가는 우국지사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부르는 어린 학생들의 만세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쏟아졌다 합니다.

 

그때 그 소년들의 모습과 소리는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중 심문이 진행되었을 때 한 친구가

일본 경찰이 우리나라 사람을 차별대우할 뿐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면서 총독 정치를 비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버럭 소리를 질러,

"이 친구야, 총독이 정치를 잘하면 독립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인가? "라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만해는 그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의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중 1년 6개월 만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출옥 후에도 만해는 저항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기독교 청년회, 불교 청년회 등에서 강의를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강연 마당에서 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주는 것도 아니다.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라고 자유를 구걸하지만,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

 

신이 만약에 있다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가 아니라,

'신이여 자유를 받으소서! '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던 어느날,

청중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하여 비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끝맺었습니다.

 

"개성 송악산(松岳山)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 씻는다"

 

그 때 장내에는 떠나갈 듯한 박수와 함성이 가득 찼고,

그 자리에 임석했던 일본 경찰까지도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또 다른 강연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풍자했습니다.

 

"여러분!

얼큰한 된장찌개 맛보는 기분으로 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들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일까요?

소련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소련도 미국도 우리의 원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입니까?

일본이라고 남들이 그럽디다.

모두들 일본이 가장 큰 원수라고......"

 

연설을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석한 경찰이 연설 중지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연설을 계속하였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일본이 아닙니다.

일본이 어째서 우리의 원수이겠습니까?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다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옥중에 있을 때나

민중들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통하며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변절한 동지들을 질타하며 옥중에서도 옥밖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한 만해 스님의 자유 평등 독립 사상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저울추로서  영원한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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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불교 (서울 종로 선학원)>

 

만해 한용운 스님은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한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분입니다.

 

그리고, <3.1 독립선언서>의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만드신 분이 바로 만해 스님입니다.

 

만해 스님은 불의에 항거하는 차가운 칼날과 함께,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함께 하는 선지식이었습니다.

 

그는 일제에 대해 조금의 타협이 없는 결기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감옥에서나, 감옥에서 나와서나 한결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갖고

자주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주인 의식을 갖기를 바랬습니다.

 

스님이면서도 민족의 현실 앞에 눈감지 않고

치열하고 용기있게 행동하는 불교계의 진정한 선지식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