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3) - 3.1 운동후 항일 운동에 투신한 스님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
불교계는 교육받은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을 위해 투신한 항일 승려들과
불교 개혁과 사회 참여을 주장하는 개혁 승려들이 등장하였습니다.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다양한 사회 참여와 불교 개혁에 대한 흐름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독립투사로서
항일 운동을 펼친 승려들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6장에서 살펴본 만해 한용운 스님은 제외하겠습니다.)

(1) 정남용, 송세호, 백초월 스님의 항일투쟁
3.1 독립운동 이후 국내에는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이 활발하게 항일 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조직된 단체로는
조선민족대동단(이하 대동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하 청년외교단),
대한독립애국단, 대한민국애국부인당 등이 중요한 항일운동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구성원으로 불교계 스님들도 활약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정남용과 송세호 스님이 있습니다.
정남용(1896~1921) 스님은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1911년 고성 건봉사의 승려로 있다가
1919년 이후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오늘 휘문고교)과
불교중앙학림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정남용 스님은 3.1운동 직후, 최익환, 전협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중순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민족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정남용 스님은 1919년 5월23일 최익환이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그 후임으로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대동단에서 발행하는 '선언서'와 '임시규칙' 등의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 중 청년층의 단원을 포섭하고
조직하는데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정남용 스님은 불교중앙학림 시절부터 친교를 맺었던
월정사 출신의 승려 송세호, 나창헌 등을 가입시키기도 했습니다.
한편, 대동단은 최익환 등의 체포로 조직의 일부가 노출되고,
또 기관지인 <대동신보> 등의 발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함께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압축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동단 총재인 김가진은
1919년 10월 10일 먼저 상해로 망명하게 하였고,
이어서 의친왕 이강(고종의 5남)을 대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상해 망명을 추진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 정남용 스님은
이을규, 송세호와 함께 의친왕 이강을 수행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만주 안동까지 갔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대동단 본부의 상해 이전 계획과 함께 대동단 조직도 파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정남용 스님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잔악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1년 4월 1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송세호(1893~1970) 스님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오대산 월정사의 스님이었습니다.
1919년 5월에 조용주, 연병호 등과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동지규합, 자금확보, 상해임시정부 지원 등의 일을 수행하였으며
상해지부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불교중앙학림 시절 친교를 맺었던 정남용 스님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여 의친왕 이강의 망명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919년 송세호 스님도 의친왕을 수행하여
중국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22년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습니다.
그는 출옥후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자주독립정신의 고취에 전념하다가
1926년 6월에 서울 낙원동에서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1년 6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연초 공장을 경영하며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상해에 잔류하였다가
고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타계하였습니다.
백초월(1878~1944) 스님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14세때인 1892년 지리산 영원사에 출가하여
주지였던 이남파 선사로부터 경전을 배우고 선을 닦았으며,
1916년에는 명진학교 교장을 지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해 4월 중앙불교학림을 근거지로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항일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장이 되어 항일출판물을 간행하였습니다.
그해 7월 같은 승려인 이도흔,김재운,박윤,하용하,이인월 등과 함께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상해임시정부 및 길림성 독립군에게
1천부를 발송하여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썼습니다.
그해 8월에는 천은사 주지인 하용하로부터 군자금 200원,
화엄사 총무 이인월로부터 군자금 300원을 모금하였으며,
국내의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만주 길림성에 있는 독립군에 11명,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 6명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해 11월 보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 시내 각 학교학생들이 참가한 시위를 배후에서 지휘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신상완이 주도 조직한
의용승군에도 관계하여 지원금을 제공하였습니다.
또,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채권을 발행할 것을 계획하다가
1919년 12월 체포되어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폐인이 되어 석방되어 서울 마포의 포교당에서 지냈습니다.
1920년 2월에는 일본 유학생이 주도한 3.1운동 1주년 기념 행사에
그의 제자인 이중각이 관여된 것으로 인해 다시 체포되어
이때도 역시 일본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여 건강이 아주 악화되었으며
이때부터는 미치광이로 행사하여 정신이상자로 간주되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부터 계속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계속하여 담당하였으며
1941년 임시정부와의 연락과 독립운동자금 조달협의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마포형무소,대전형무소를 거쳐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6월 청주감옥에서 옥사하였습니다.

(2)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한 승려들
한편,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김법린,백성욱,신상완,김대용 등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요인들과 불교계의 민족 운동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그 중 신상완,김대용은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 및 불교비밀결사운동 조직 등의 활동에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1919년 6월에 김법린은 상해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884년에서 1910년까지의 일제의 침략을 중심으로 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이를 등사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법린, 김대용은 독립운동 기관지 <혁신공보>를
만주 안동에서 발행하여 이를 국내에 유포시켰습니다.
그리고, 월정사 승려 이종욱, 송세호도
상해임시정부에 불교계 강원도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1920년 5월 일제 관헌들이 이른바
"불령승려(不逞僧侶)"를 검거하여
불교계의 항일운동 내막을 조사하였습니다.
그 때 일제 관헌의 비밀 문서인
'항일운동 승려 백성욱 등 검거의 상황보고의 건'의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상해 임정에 투신한 승려 이종욱,백성욱 등이 조선불교도를 대표하여
독립 운동에 활동한바 있고, 승려 신상완은 최근 비밀리에 조선에 들어와
조선 팔도의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이라는 비밀결사를 형성하였고,
또한 독립운동의 자금 모집 및 유력 승려를 상해에 빼돌리려고
계획한 사실을 탐지하여 이를 체포하고 공범자와 함께 형사소추에 부친다."
이와 같이 청년 승려들의 항일운동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승려는 신상완(30세,용주사),김상헌(28세,범어사),
김태흡(30세,석왕사),백초월(42세,함양 영원사) 등 4명이었고,
이석윤(23세,안성 청룡사), 이종욱(38세,월정사),백성욱(26세,고양 봉국사),박민오(24세,통도사),
김대용(22세,의성 고운사), 박대려(30세) 등 8명은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여 체포를 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김법린 스님 등 일부는
만해 한용운 스님처럼 변절하지 않고 일관되게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이종욱, 김태흡 등의 인물들은 후일 변절하여 후일 본사급 주지에 오르며
태평양 전쟁시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그 동조하며 후일 친일파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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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살펴본 항일운동에 투신한 스님들은
불도를 닦는데 정진한 스님이라기보다는
독립 운동에 투신한 항일 투사에 더 가깝습니다.
당시 항일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은
오늘날 촛불시위나 사회 운동을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70~80년대 군사 독재 시대 때
민주화를 위해 고난받았던 학생들의 삶을 보면 잘 알 수 있입니다.
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온갖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형극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분들의 정체성은 스님인데,
스님으로서 자신의 본분인 수행과 종교 생활이 아니라
사회 참여에 올인하는 것이 옳은지 하는 부분은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끓는 청춘의 어떤 스님은 일제의 압제와 불의 속에서
민족을 탄압하는 현실을 그냥 눈뜨고 볼수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찰령 제정 이후 일제 권력에 편승하여
권승으로서 호의호식했던 친일 승려들이 있는가 하면
'민족 독립'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정의감에 불타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심적이고 의식 있는 청년 승려 그룹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일제에 후일 변절한 스님도 있지만,
어떤 스님은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망명하여 고국땅을
밟지도 못하고 이국에서 숨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혹은 병을 얻고, 반미치광이로 살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양심을 지켜나간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존경의 마음과 함께 이 분들의 고난의 아픔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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