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2) - 불교계의 3.1 운동

1919년 3.1운동은 우리 나라 민족 운동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됩니다.
3.1운동은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반 민중들이 합세하여
식민 체제의 거부와 민족 독립을 희구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정신을 세계 만방에 표출한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3.1운동은 5월달까지 시위가 계속되어
참가인원이 약 2백만명, 사망자가 8천여명, 피검자가 4만 5천여명인
규모로 진행되어 질적, 양적으로나 거국적인 독립 시위 운동이었습니다.
불교계도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한용운, 백용성 2명의 스님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재학중인 청년 승려들의 주도하에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등의 사찰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3.1운동 이후 민족적 자각 의식이 강해진
불교 청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항일 독립 투쟁과 함께
불교 개혁의 욕구가 강해져 조선 불교유 신회, 만당 등
1920~30년대 불교 청년 운동을 잉태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의 확산에는 청년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불교계가 이전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3.1운동에 참여하고 사회 변혁에 동참하게 된 데는
1900년대 이후 전국에 설립된 불교학교를 통해
신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 청년 승려들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불교계 청년 지식인의 등장을 가져온
불교의 근대적 교육 현황과 함께
여기서 배출된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된 3.1운동 당시의
한국 불교계의 만세 운동 참여 현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불교계의 근대 교육 사업
앞에서 살펴 보았듯
최초의 근대식 불교 고등 교육 기관은
1906년에 불교연구회에서 설립한 명진 학교였습니다.
수업연한은 2년이었으며,
정원은 각 학년이 35명으로 총 70명이었고,
서울의 원흥사의 건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교과목 중 70%를 근대 학문의 기초 과목인
역사, 지리, 산수, 이과(물리,화학), 법제, 경제, 측량학, 일본어 등을 다루었고
나머지는 불교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명진학교 출신으로는 한용운,강대련,이종욱,권상로 등의 스님들이 있습니다.
서울의 명진학교 근대적 학교의 설립을 시발로
1906년 이후 수원 용주사에 명화 학교, 고성 건봉사에 봉명 학교,
양산 통도사에 명신학교, 합천 해인사에 명립학교, 안변 석왕사에 석왕학교,
동래 범어사에 명정학교, 순천 선암사에 승선학교, 해남 대흥사에 대흥학교,
전주 위봉사에 봉시학교, 승주 송광사에 보명학교,
화엄사, 천은사 등 4개 사찰이 공동으로 신명학교,
문경 김룡사, 대승사 등 6개 사찰이 연합하여 경흥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보명학교(쌍계사),광명학교(동화사),광성의숙(백양사) 등
본사급 사찰에는 대부분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한일 합방 이후 불교계에서는 서울의 명진학교를
일본의 전문학교 학제를 참고하여 고등교육기관으로 인가신청을 하였으나
불교 사범으로 인가되었고, 이 학교는 1914년에는 불교고등강숙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이에 불교계는 1915년에 서울에는 전문학교 정도의 중앙학림,
그리고 지방에는 보통학교와 중학교의 중간인 지방학림을 설치함으로써
보통학교-지방학림-중앙학림에 이르는 3단계의 근대적 교육 체제, 곧 학림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1운동 이전에 전국 사찰 약 900여 개를 기반으로
중앙학림 1개, 지방학림 10개, 보통학교 15개의 신교육기관과 함께
전문강원 47개, 이밖에 선원 72개와 같은 기존 불교 교육 체제가
양립하는 교육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중앙학림은 1930년 중앙 불교전문학교, 1940년 혜화 불교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며 후일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교계의 교육기관을 통해 이전 시대와는 달리
지식인 청년 승려들이 많이 양성되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불교계 학교 외에 일반 전문학교,
일본 유학 등을 한 스님들도 출현했습니다.
이들 중에 불교계 지도자로 본사급 주지를 맡으며
친일 승려로 기득권으로 편입된 스님들도 많았지만,
이와 같은 교육의 성과로 사회 참여와 불교 개혁에 의식을 갖고
활동하는 의식 있는 청년 승려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2. 불교계의 3.1운동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불교계를 대표했던 스님이
한용운,백용성임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특히, 한용운 스님은 3.1운동 전면에 나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를 주도하였습니다.
한용운 스님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가 주축이 되어 구성된 민족 지도자 구성에서
박한영, 진진응, 도진호, 오성월 등 임제종 운동때 참여한
스님들을 비롯한 여러 불교계 지도자와 교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승이라는 이유와 산간에 있음으로
교통과 연락의 지연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연락이 손쉬운 서울 종로3가 대각사에 계시던
백용성 스님에게만 서명을 받아서
결국 3.1운동 민족대표로서 한용운, 백용성 두 스님만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3.1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한용운, 최린 등이 관여하였습니다.
한용운 스님은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원문이 너무 힘이 없다고 주장하여
여기에 새로이 <공약3장>을 추가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쇄된 3.1독립선언서는
천도교,기독교,불교측으로 나누어 배포하기로 하였는데,
불교측은 한용운 스님이 주재하던 불교잡지 <유심>의 사옥으로
사용하던 종로 계동에서 불교 청년 학생(승려)들을 긴급하게 소집하여
독립선언서를 찍어 내었습니다.
1919년 2월 28일 밤 10시에 이곳에 모인 학생(승려)들은
불교중앙학림의 학생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오택언, 김봉신, 김법린 등과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전신)의 학생 박민오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3만매 중
불교측에 배당된 1만 매를 가지고
서울 북쪽에 해당하는 동북부 일대에,
나머지는 지방 각 사찰에 배포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울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시내 사찰과 포교당 등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사람을 결집하여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YMCA회관, 종로경찰서, 종각, 남대문, 한국은행, 대한문, 서대문,
미국과 프랑스 영사관이 있던 정동 거리를 거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 시위 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한편, 지방을 담당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은
3월 1일 서울 시내 만세 시위에 참석한 뒤 그날 밤 각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리하여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등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 범어사를 중심으로 부산 동래 일원에서 일어난 시위가 그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범어사에 파견된 김법린, 김상헌 등은 3월 4일 유석관 등과 상의한 후,
범어사 내의 명정학교 학생 30여명들과 함께 결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3월 7일, 동래장날을 활용하여 장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다가 일반 헌병의 출동으로 일단 해산하였습니다.
3월 18일에는 범어사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일으켰으나,
헌병 20여명이 출동하여 시위 학생들을 연행하였습니다.
체포 연행된 100여명의 시위자들은
부산 지방 법원에서 3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허영호,차상명 등 31명은 1년 이상의 징역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루었고
박재삼,김영식 등 2인은 집행유예가 되었습니다.
통도사에서는 통도사 출신의 오택언이 중앙학림 대표로
3월 4일 통도사에 도착하여 스님들과 의논한 후
통도사 앞의 신평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던 중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통도사의 승려들은 오택언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3월 13일에는 양산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습니다.
해인사에서는 중앙학림의 김봉신 등이
해인사의 지방학림 학생들과 연계하여 조직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3월 31일 오전 11시 해인사 홍하문 밖에서
이곳의 지방민들과 더불어 약 150여명과 더불어
3.1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해인사에서는 새로이 독립선언서 1만매를 인쇄하여
시위대를 3대로 나누어 대구까지 왕래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경북에서는 중앙학림의 김대용이 동화사를 중심으로
스님 수십명과 함께 대구 시내로 들어가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그 외 충남 마곡사에서는 우경조 스님이 공주에서,
그리고 황해도 신광사 일대의 사찰, 함경남도 석왕사 일대의 사찰,
경남 밀양 표충사 일대의 사찰, 경북 창암사 일대의 사찰,
전남 화엄사 일대의 사찰 등에서도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기도 봉선사의 승려 김성숙, 이순재, 강완수 등인데,
이들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3월 29일에는 '조선독립임시사무소' 이름의 전단 200매를 만들어
인근 마을에 살포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김성숙은 4월 2일 양주군 광천시장에서 군중들을 이끌고
시위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성숙은 복역 후 중국 북경에 유학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에
"김충창"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독립투사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3.1독립운동에 불교계의 스님들도
전국 각지에서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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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비폭력 시위 운동이라는 점과
외세의 부당한 정치, 경제적 침탈에 대한 반대 운동입니다.
우리 민족은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는
강한 유전적 피가 흐르는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총칼로 평화적 시위를 탄압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학생들이 전위에 서서 민중들과 함께 피를 흘려가며 저항을 했습니다.
3.1운동이 2개월동안 지속되고
3.1운동 후에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와 무장독립운동단체가 태동하며
3.1운동을 기반으로 삼아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벌어질수 있었던 모태가 될 수 있었습니다.
3.1 운동 때 불교계도 참여를 했습니다.
청년 학승들이 중심이 되고
만해 한용운 스님이라는 구심점을 가지고
전국 사찰로 내려가 시위를 준비하고 행동했던
3.1운동 때의 당시 청년 불교는 건강한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는 세상의 정의와 양심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야 합니다.
조선 시대까지 억압과 굴종 속에서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무력하게 살았던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의와 양심을 표출하는 놀라운 변화의 배경에는
과거와는 달리 신교육을 통해 민족 의식과 자유에 대해
의식이 깨인 청년 학생 스님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육을 통한 각성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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