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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4) - 조선불교청년회와 유신회

by 아미타온 2026. 1. 15.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4) - 조선불교청년회와 유신회

 

<서울 선학원 법당 부처님>

 

1. 조선불교청년회의 결성

 

3.1운동을 경험하고 나서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의 독립 운동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 방식에서

'문화 정치'라는 방식으로 통치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문화 정치의 특징은 식민지 내의

종족적, 계층적, 종교적 대립을 이용하여 이들을 분열시키고 

식민지 민족 내부의 상층부에 대한 회유와 포섭을 통해 친일파를 양성하고

이들을 통해 민족의 국민적 통일과 민족 독립 운동을 차단하는

고등적이고 교활한 분열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이 정책에 의해 민족 운동 노선은 분열되었고,

민족자본가와 지식인들의 다수가 친일의 길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총독이 30본산 주지의 인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상황하에서

주지 계층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 총독부 권력과 타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과 포교 사업은 지지부진하였고,

사찰의 재정 운영도 불투명하였습니다.

 

불교계의 청년승려들은 관권과 결탁된

일부 주지 계층의 권위적이고 부패한 형태를 시정하려 하였습니다.

 

3.1운동으로 의식이 깨인 청년 승려들은

불교계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개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불교계 중추 교육기관이었던

불교 중앙 학림에 재학 중인 청년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1920년 6월 20일 서울 각황사에서 수백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선 불교 청년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청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사찰에 지회 조직을 두기로 하고

창립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창립 목적을 밝혔습니다.

 

첫째, 교조 석가모니의 정법으로

세계 민중을 제도하기 위한 불타 정신을 체현한다.

 

둘째, 쇠퇴해진 불교를 부흥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종교 정체를 확립한다.

 

세째, 조선의 불교는 천년 세월이 지난 낡은 집과 같아

늙은 승려들은 옛날 이야기만 하고 있고

새로운 지식들은 수용하고 있지 않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대중불교를 실현하고

기존의 제도를 개혁하기 위함이다.

 

조선 불교 청년회는 1920년 창립 직후 발생한

이회광의 매종 행위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한일합방 전에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 조동종에

연합시키고자 해서 지탄 받았던 전 해인사 주지 이회광은

1920년에는 다시 일본 임제종의 묘심사와 연합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부속시키려는 책동을 꾸몄습니다.

 

조선 불교 청년회는 이회광을 조선 불교를 망하게 하는 악마이며,

조선 불교의 중대한 죄인이라고 규정하며

이회광의 매종행위를 규탄하는 4개의 결의항을 채택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1920년 12월  15일 조선불교청년회는

지방위원과 간부들이 모여 "유신 준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6일에는 "유신협의회"를 개최하여 

 당시 불교계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여

30본산 주지연합 사무소에 다음의 8개항의

불교 유신을 위한 건의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30 본산 주지들의 독단적인 사찰 운영을 부정하고,

만사를 민주적 공의(共議)에 의해 결정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30본산 연합제규를 수정하여

위원장 아래 의사(議事), 서무, 재무,

교육, 포교, 법규부장을 둘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또, 조선 불교 청년회는 건의문에서

30본산 주지연합 사무소의 재정 관리를 일원화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육 문제는 불교 재정의 1/3을 교육에 투자하여

일요 학교, 보통 학교, 유치원을 신설해야 하며,

지방학교는 병합해야한다는 것과

도시에는 중학교를 경영할 것,

불교중앙학림을 전문학교로 승격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아울러 일본, 중국, 인도에 유학생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울러 번잡한 의식의 개선, 포교사업, 인쇄물의 발간을 통한

교리의 전파와 홍보 등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교 유신 사업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불교청년회는

김석두,이춘담,김경봉 등의 15명을

30본산연합사무소와 교섭할 교섭위원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본 불교와의 연합 책동이 진행되었던 점과

교육과 포교가 지지부진한 점, 

그리고 재정운영이 불투명한 점 등의

여러 가지 불교적 모순의 원인이 30본산 주지들의 독단으로 처리되고

민주적인 산중공의제(山中共議制)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산중 공의제의 부활을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통일적인 불교 행정 기관과 교육, 포교 사업에 진력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30본산 주지들은 청년회의 개혁 요구에 미온적이었고,

일부 주지들은 청년회의 불교 유신 사업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를 하며 개혁요구를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불교 청년회는

유신 사업을 전담할 별개의 행동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울 선학원 법당>

 

2. 조선 불교 유신회의 설립

 

그리하여 1921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는

불교 유신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조선 불교 유신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유신회는 지방 회원 가입 권유에 나서

회원이 1,000여명이나 되었고 사업목표를 4가지로 정하였습니다.

 

첫째, 여러가지 불교계 제도를 변경할 것,

둘째, 모든 재정을 통일할 것

세째, 여러 사찰의 소유 재산을 정리할 것,

넷째 학문을 일으키고 포교를 성실히 할 것 

 

1922년 1월, 조선 유신회는

30본산 주지연합회의 총회에서 발언권을 요구하여

유신회측 소장파 승려들과 주지회측 친일 승려들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30본산 주지 연합회를 구성한 것은

불교 사업을 하기 위함인데,

10년이 지났는데 포교와 교육은 아무런 성공이 없으니

30본산 주지연합회를 해체하고 다른 방법으로 연합하여

새 사업을 추진하자는 유신회 측 승려의 요구가  일부 주지들에게 받아들여져

약 10여개의 본산주지들이 30본산주지연합회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30본산 주지연합회"는 명칭을

"조선불교도 총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다시 회의를 진행하여

30본산연합제규가 몇몇 주지들의 전횡으로 진행되어

불교 사업이 잘 안되었다고 보고 그 폐지를 가결하였습니다.

 

나아가서 불교계 통일 기관으로 "총무원"을 두기로 결정하였고,

불교중앙학림은 50만원의 기부금을 마련하여

재단법인 불교전문학교를 만들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통일 기관인 총무원을 설립하고

교육, 포교를 추진할 종헌을 제정하기 위해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1922년 3월 26일

유신회에 참여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강신창,김상호 등 100여명의 유신회 회원 승려들에 의해

대표적인 친일 승려인 강대련을 대망신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신회 사업에 번번히 반대하고

불교 재산을 농락하고 횡포하는 일이 많아서

유신회에 미운털이 박힌 전 30본산주지연합회장이자

수원 용주사 주지였던 강대련을 납치하여 강대련의 등에 북을 메게 하고

"불교계 대악마 강대련 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종로4거리를 활보하며 대망신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명고축출 사건으로 유신회 주모자가

구속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보수적인 친일 주지들도 유신회측 젊은 승려들의 

운동 추진의 열렬함을 보고 유신회 측에 심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강대련이 중심이 된 보수적인 친일 주지들이 중심이 된 다수의 본산들은

재단법인 교무원이라는 조직을 다시 발족시켜 총무원 체제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조선불교 유신회와 10개 본산이 주도하여

새롭게 설립된 총무원과는 대립하는 형국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10개 본산: 통도사,범어사,해인사,석왕사,백양사,위봉사,봉선사,송광사,기림사,건봉사)

 

한편, 불교유신회는 불교계의 최대 장애였던

사찰령 폐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2년 4월 19일자로 유신회원 유석규 외 2,284명의 연서로

사찰령 폐지에 대한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습니다.

 

건백서의 내용은 30본산제의 시행으로

본산 주지들은 자리 다툼에 골몰하고 있으며,

말사 주지들을 압박하여 부질없이 원망하는 폐단이 생기고

불교사업이 황폐해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사찰령을 하루빨리 폐지하고

불교계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찰령은 정치권의 종교계 간섭이 배제되는

정교 분리의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사찰령 폐지에 대한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자

1923년 1월과 5월에 재차 사찰령 폐지 건백서를 제출하였으나

총독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총독부는 친일 승려들이 중심이 된 교무원을

합법적인 통일 기관으로 지지하기 시작했고,

불교청년회와 유신회원들의 온상이었던 불교중앙학림을 3년간 휴교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총무원 측에 있는 10개 사찰 주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통도사,범어사,석왕사 3개 사찰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무원 쪽으로 통합이 이루어졌고

1924년 4월에는 이들 3개 사찰마저 교무원으로 완전 통합되면서

유신회의 재정적 기반이 완전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 불교 유신회는 사찰령 폐지를 지속적으로 주장하였으나,

관권과 결탁한 교무원측 친일 주지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였고,

총독부의 탄압과 감시로 인하여 성과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동 자금의 결핍, 운동 추진의 과격함에 따른

기존 불교계의 경원, 각 사찰 주지 계층의 압박 등의 요인으로

1924년이 지나면서 조선불교유신회는 소멸되고

조선불교 청년회도 간판만 유지하는 상태가 나타나는 등

조선불교 청년회의 불교 개혁 운동은 점차 침체하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제 하의 불교청년운동은

3.1운동의 민족적 자각으로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유신회 등이 태동되어

당당히 정.교 분립을 주장하고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중앙행정기관을 각성시켜 불합리한 법규를 정정하고

산간에 은둔한 불교에서 사회적,대중적 불교를 건설하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출발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와 기득권 승려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불교계 최초의 근대적 불교개혁운동은 성취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924년 이후 젊은 승려들과 불교 청년들이

1925년 1월 다시 불교청년회를 조직하였고,

조선불교 청년총동맹(1931년 3월 22일 창립, 중앙집행위원장 김상호)와

도쿄동맹(1931년 5월 23일,집행위원장 김법린) 등이 조직되어

<불청 운동>(1931년 창간)이라는 기관지를 10호까지 발간하고는 하였으나

1920년대 전반기와 같은 열렬한 개혁 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22일 휴회 상태에 있던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경성동맹이 부활하지만,

이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협조하는

"총후(銃後,후방) 보국의 건, 방공 부서의 신설" 따위나 토론하면서

한낱 친일 어용단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부활한 조선 불교 청년 총동맹의 집행위원장에 박영희가 선출되었고

사회는 허영호가 보았으나,

이 청년 단체는 오래지 않아서 국민 총력 조선연맹 등의

전시 체제에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1938년 10월 재편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일제의 어용단체로 변질됨으로서

이전에 불교 개혁과 독립을 위해 싸웠던

우리나라 청년불교운동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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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 운동>

 

 

현재의 "불교 청년회"는 재가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단체입니다.

 

불교 청년회는 대부분 사찰에 기반을 두고 신행 운동을 해 나가고 있는데,

대부분 사찰 부속 단체로 예전과 같은 적극적 사회 참여를 못하고 있습닏.

 

청년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교 청년이 바로서야 불교가 바로 서는데,

현재의 현실을 보면 불교의 미래를 볼 때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일제 시대 불교 청년회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재가보다는 출가 청년 승려 중심의 단체였습니다.

 

오늘날처럼 재가자들이 불교 공부나 활동할 수 있는

환경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가 불교 청년보다는 의식 있는 청년 스님들이

불교 청년 운동을 선도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사찰령과 같은 불교악법의 폐지,

관권과 결탁된 친일 어용 승려들의 퇴진,

투명한 재정을 담보할 수 있는 중앙행정기관의 설립,

이를 통한 학교 설립과 교육,포교사업의 진력 등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시대 환경에서 불교 개혁에 대한

바른 안목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시 30본산 주지연합회장이면

오늘날의 조계종 종정이나 총무원장 같은 불교계의 실세입니다.

 

그런 거목인 강대련에게 <백장청규>에서

불법을 훼손하는 나쁜 승려에게 행하는 처벌 방법으로

등에다 북을 달게 하고 북을 쳐가며 종로 천지를 활보하며 대망신을 주었습니다.

 

개혁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일제에 야합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얄미웠으면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벌백계와 효과만점의 불교적 처벌 방법으로

현대에도 효과적이고 재미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총무원장쯤 되는 거목을 명고축출시킬 정도로

의욕과 열정에 불탔던 청년회고 유신회였습니다.

 

그런데, 사찰령 폐지를 비롯한 개혁 요구가 힘을 받지 못하고

개혁의 불이 사그러든 것은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