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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6) - 비구 선수행 전통을 위한 선학원(禪學院) 운동

by 아미타온 2026. 1. 19.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6) - 비구 선수행 전통을 위한 선학원(禪學院) 운동

 

<서울 안국동 선학원>

 

 

선학원(禪學院)은 항일의식이 강했던

비구 스님(독신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1921년 종로구 안국동에 건립된 사찰입니다.

 

선학원은 우리 근현대 불교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찰입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항일 승려들의 출입이 잦았고,

해방 이후 ‘정화불사’가 전개될 때는 비구 스님들의 본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선학원의 창건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불교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던

비구 스님들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선학원>

 

1. 선학원의 창립과 어려움

 

일제 시대에 비구 스님들의 처지는 날로 악화되어

말기에는 수행 공간의 확보와 생계 유지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1911년 사찰령이 시행되던 초기 사법(寺法)에

본사 주지는 비구 스님들만 취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처자식을 거느린 대처 스님의 숫자는 날로 늘어났습니다.

 

1925년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스님(승려)의 숫자는 비구가 6,324명 비구니가 864명으로

총 7,188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독신 비구 스님의 수는

4천여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식민지 하에서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아

결혼한 승려인 대처 스님의 확산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교계에서 일어났습니다.

 

1926년 서울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은

두 차례나 승려들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을 금지해 달라는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지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대처승들이 늘어나게 된 까닭은

일본 유학승들이 거의 대부분 결혼하여 귀국하였고,

이들 일본에서 유학한 승려들의 활동과 세력이 커지면서

그 영향으로 스님들의 결혼 풍속이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일본 유학승들은 신식 교육을 받은 자신들도

본사 주지가 되기 위해 대처승의 본사 주지 취임을 요구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11월 승려들에게 대처식육을 허용하였고,

각 본사에 대처승도 본사 주지를 할 수 있도록 사법을 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 가면 비구승의 숫자는 더욱 줄어들어

약 300명에서 600여명 사이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구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선맥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선학원 운동'입니다.

 

한국의 선을 중흥시킨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받은

송만공(수덕사), 백용성, 오성월, 김석두, 김남천(범어사),강도봉(석왕사)

등의 모두 11명의 선승들이 뜻을 모아 한국 선을 중흥시킬 목적으로

서울 안국동에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를 창건하였습니다.

 

1921년 10월에 창건된 선학원은

왕궁의 상궁들을 중심으로 한 신도들의 도움으로

두 개의 큰 방이 딸린 법당과 요사채 2동으로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건물로 창건되었습니다.

 

선학원 창설 주도 인물들은 1910년부터 시작된

‘임제종 설립 운동’의 주역들(오성월,백용성)과

1920년 조선불교 청년회의 주요 멤버들(김석두,김남천,강도봉)로

구성된 점을 들어 선학원이 항일 사찰로 기능하였습니다.

 

이처럼 선학원이 항일의식이 강한 승려들의 주도로 설립되어졌지만,

반드시 항일 목적으로 설립되지는 않았습니다.

 

선학원 설립의 실질적인 배경은

3·1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각종 문화 단체의 설립을 허용한 것에 기인하여

선불교 중흥을 위해 설립되었다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예를들어, 이 무렵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고,

『창조』·『폐허』와 같은 잡지의 발간도 이루어졌으며,

각종 문화 단체의 설립을 허용한 분위기 속에서

'선학원'이라는 사찰이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학원이 ‘원’이라고 명명된 것은

일제 시대 불교를 규제하는 사찰령에

새로운 사찰을 창립할 수 있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사찰령이 시행된 후에

선학원 이외에 사찰이 창립된 사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한편, 설사 ‘사(寺)’나 ‘암(庵)’이 아닌 ‘원(院)’이라고 하더라도

식민지 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선학원은 항일의식이 강한 백용성·송만공·오성월 등이

설립 초기부터 관여했지만

항일운동을 전개한 구체적 사례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학원을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가 결혼하고 고기를 먹는 ‘대처식육’ 현상이 만연하고,

선풍(禪風)이 땅에 떨어졌을 때 비구승들이 계율을 지키고,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선학원 상량문에 나타난 창설 목적도

‘불법을 전파하기가 지난한 시점에

정법(正法)을 널리 전하기 위함’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선학원은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우공제회"라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선풍 진작 활동을 시작합니다.

 

선우공제회는 그 본부를 선학원에 두고,

조직으로는 중앙 조직에 서무부, 수도부, 재무부와 함께

범어사,통도사,정혜사 등 19개 사찰에 각 지방 선원의 예하 조직을 두고

재정 확충, 선원 증가 등의 활동을 벌여나갔습니다.

 

그러나, 비구승들의 자구책 일환으로 만들어진 선우공제회는

세 차례나 총회를 개최하여 대안을 모색하였지만,

결국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26년 선학원은 범어사 서울 포교소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제 시대 중앙선원>

  

2. 선학원의 중흥과 수좌대회의 개최

 

이와 같이 선학원 몰락의 이유는

당시 불교계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스님들은 본사 주지 계층인데

이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대처승들이었고

비구 선승들에게 수행 공간과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데 인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재정난에 부딪힌 선학원은

1931년 '김적음'이라는 스님을 통해서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됩니다.

 

김적음 스님은 송만공 스님의 제자로서

한의학에 능하여 침술과 시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자금을

선학원 운영에 쏟아 부어 선학원의 중흥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선학원을 인수하고,

큰 방을 거처로 해서 이탄옹 스님을 입승으로 하여

참선을 시작케 하니 승려 및 신도는 20여명에 달했습니다.

 

1931년 3월 1일에는 선을 대중화하기 위해

남녀선우회가 조직되었고, 회원 수는 약 70여명이었습니다.

 

부인 선우회도 조직되었으며,

대중 포교를 위해 기관지 『선원禪苑』을 간행하는 등

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원을 개설한 것도 아니고,

면허도 없이 운영하던 한 개인(김적음 스님)의 한의학 시술로

선방에 기거하는 많은 선승들의 생활비를 부담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비구 스님들은 보다 안정적인 수행풍토를 정착시키기 위해

재단법인 결성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김적음 스님은 비구승들의 의사를 결집하기 위해

전국 수좌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1931년 3월 14일 통지문을 발송하고

동년 3월 23일 선학원에서 전국 수좌 대회(首座大會)를 개최하였습니다.

 

'수좌'란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하는 승려란 뜻으로

보통 참선을 하는 선객을 일컫습니다.

 

수좌대회는 이후 34년, 35년, 39년 등 4차례에 걸쳐서 개최됩니다.

 

1931년 제1회 대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비구 스님들의 처지가 너무 곤궁하므로

중앙선원을 설치해 달라는 건의서를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 종회"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무원 종회는 예산상의 이유로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김적음 스님은 1931년 11월 8일

예전부터 인연이 있던 범어사에 경비 보조를 요청하였습니다.

 

범어사 본사 총회에서는 선학원이 요청한 매년 600엔의 경비에 대하여

경제 사정이 어려운 까닭에 매년 200엔씩을 보조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김적음 스님을 중심으로 한 비구승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10년 전 선우공제회 결성시에 들어온 토지와 신도들의 성금

그리고 새로 각 사찰에서 들어온 토지 등을 모아서

1934년 초 무렵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신청하여

동년 12월 5일자로 "조선불교 중앙선리 참구원"으로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학원이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 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되면서

선종이 창종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3. '조선불교 선종'의 창종과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활동

 

1934년 12월 23일에 개최된 제5회 선리참구원 이사회는

법인의 정관 시행세칙 제정 준비위원에게

수좌 대회 준비위원을 겸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서 수좌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1935년 3월 7일부터 8일 2일간에 걸쳐 전국 수좌 대회가 개최되고

이 대회의 결과로 "조선불교 선종(禪宗)"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헌에 규정된 각종 법안을 제정하고

종정, 종무원 간부, 선리참구원 이사, 수좌대표의원 등의 보직자를 선출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선종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날(3월 7일)은 삼귀의례를 시작으로 송만공 스님의 개회사가 있었고,

회원들의 출석 현황을 점검하였는데 참석자는 전부 75명이었고,

이 가운데 비구니 스님이 6명 참석하였습니다.

 

임시집행부 선거에서 기석호 스님이 의장으로 피선되었고

그가 선서문을 봉독하였습니다.

 

선서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래의 정법이 그 목숨이

실끝 같은 금일의 위기를 당한 것은 제자들의 잘못이다.

 

이제 그 죄상은 뼈를 부시고,

골수를 내어 바치더라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니

이제 참회 대회를 열어 지난 날의 허물을 반성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맹서한다"

 

이어서 김적음 스님은 경과 보고를 하였는데

1921년 선학원의 발기부터 선우공제회 창립과

수좌대회의 개최, 재단법인의 성립과정과 수좌대회 준비 과정을 보고하였습니다.

 

둘째 날은 "재단 확장 기성회" 조직의 건과

중앙에 "모범 선원" 설치에 관한 문제,

의제(衣製) 및 의식에 관한 문제와 임원 선거

그리고 기타 사항을 토의하고 폐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좨대회에서 

"조선불교선종종규(朝鮮佛敎禪宗宗規)"에서 규정한 각종 법안을 제정하였습니다.

 

"조선불교선종종규"에 의하면

먼저 종명은 “본종은 선종이라고 칭함”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즉, 수좌 대회에서  "선종"이라고 종명을 표방한 것은 

한국 불교의 전통이 자신들 선종 비구 스님들에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8개조로 구성된 중앙선원청규(中央禪院淸規)에 의하면

제1조에 "본원 납자는 무상출입(無常出入)을 금하고

매월 3일, 8일에 목욕을 하며 교외를 산보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5조는 "본 선원은 음주·식육·흡연·가요 등

일체 혼란을 금지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대처승들의 대처식육하는

혼탁한 생활과는 다른 청정한 계율을 지키면서

정법을 전파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비구승 종단인 선종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조항입니다.

 

그리고, 수좌대회에서는 종정을 비롯한 임원들을 선출하였는데,

종정은 인원수와 임기를 정하지 않은 종정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 때 선출된 종정은 신혜월·송만공·방한암 등 3명이며,

원장은 오성월 스님(범어사)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좌 대회는 1939년에도 한번 더 개최되었습니다.

 

한편, 총독부는 비구승들의 이러한 독자적인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을 당시 언론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8월 6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선리 참구원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무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데

암적인 존재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지금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이것도 통제될 단계에 이른 것만은 명확한 일이다"

 

이와 같이하여 선리 참구원을 통제할 빌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총독부의 압력 때문인지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시 일제의 강압적인 군국주의 체제로 인하여 

그 의미가 굴절 또는 변질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였습니다.

 

선리참구원은 중일전쟁 이후 재정난이 악화되면서

성격도 변화되어 총독부 정책에 협조하고,

31본사가 주축이 되어 구성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도

협조 체제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무원에서 국방 헌금을 모집할 때 선학원도 참여하였으며,

출정부대 송영식에도 참석하였고,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자

선리참구원도 무료상담소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국 선원에서 모집한 황군 위문금을

일제에 납부하고 전쟁 물자 수집에도 절의 여러 물품들을 납부하는 등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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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운동은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서

일제 시대의 선풍 진작과 비구 승단으로 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정화 운동에서 승리한

비구 승단 중심의 한국 불교 교단의 특성과

경허 스님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현대 한국 불교에서

주류로 성장한 선불교라는 2가지 특징의 역사적인 모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학원 운동이 현대 한국 불교에서 큰 주목을 받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학원 창설의 주역들이 항일적 성향을 보였지만,

선학원을 항일 단체로 보기에는 큰 비약으로 생각됩니다.

 

선학원을 주도한 주역들은

비구 전통와 전통 선불교 전통을 지키기 위한

강렬한 열정과 목적 의식 하에서 뭉친 단체의 성격이 강합니다.

 

초기에 선학원을 조직한 주역들은

기복화된 당시 한국 불교적 전통에서

경허 선사로부터 시작된 본성(불성)을 탐구하는

선수행을 행할 수 있는 중앙 센터로서 선학원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선수행을 하는 수좌들의 수행 공간 확립과

경제적인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사 내에 조그만 수행 공간을 마련해달라는 선학원의 소망도

당시 기득권 층인 본사 주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처승들이 자신들의 수행 공간을 침범해옴에 따라

수행 공간이나 경제력에 있어 열악한 상황에 몰린 비구승들이

청정 비구전통에 대한 견백서를 올리고 수좌 대회를 열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불교 유신론>에서

염불당의 폐지, 각종 미신적 소회의 폐지, 허례 허식의 폐지와 같은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미신적으로 흐르는 한국 불교 전통을 염려하며

 바람직한 참선 수행을 권장하였습니다.

 

만해 스님은 화두를 타파하는 선불교보다는

 참선의 요체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하였습니다.

 

'적적(寂寂)'은 어디에 있더라도 흔들림이 없고,

'성성(惺惺)'은 어둡지 않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소의 적적함만을 쫓는 염세적 선불교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게으른 독선적 선불교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아울러, 선학관을 세워 공부의 성과를 시험하고

책을 펴서 세상에 회향하자고 선불교의 투명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선학원 운동은 기존의 기복적 불교에서 벗어나

선수행을 통한 수행 불교로 가자는 측면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의 결혼이 허용되는 대세 속에

우리 한국 불교의 출가 승단의 전통을 지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 선사가 이야기한대로

자신들이 어떤 선불교를 펼쳐 나갈 것인지에 대한

내용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함께

선수행을 통한 결과들을 서로 문답하고 시험하고

세상에 회향하는 등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졌다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선학원도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은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