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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8) - 불교계의 총후 보국과 창씨 개명

by 아미타온 2026. 1. 28.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8) - 불교계의 총후 보국과 창씨 개명

 

<전쟁터로 나가는 청년들>

 

(1) 황도 불교와 총후 보국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한 이후

중국 대륙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전시 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전시 체제 하에서 우리 조선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하었고,

종교 또한 민초들의 삶에 평화와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1937년 7월 중일 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자

불교계에도 수탈을 강화하고 전쟁 참여를 강요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황도 불교'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데,

'황도 불교'란 황민화 정책을 불교계에 적용시킨 말입니다.

 

황민화 정책은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충실한 신민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조선인 동화 정책입니다.

 

황민화 정책의 실상은 조선인의 생활을

경제·문화적으로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 올려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를 수탈하고 조선인을 침략 전쟁에 협력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192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의 여파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장과 식민지가 필요한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 침략을 감행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1941년 2차 세계 대전 참여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전시체 제 하에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해 취한 정책은

두 가지로 대변되었습니다.

 

하나는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 병참기지화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인화하는 황민화 정책이었습니다.

 

병참 기지화 정책의 내용은

강제 징용제· 징병제· 정신대 근무령· 미곡 공출 등이었습니다.

 

황민화 정책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같은 조상이었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천황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생각한다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 주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는

황국 신민 서사 낭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강요 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 가서는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신사 참배>



한편, 불교계의 황민화 정책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요?

 

전쟁터로 출정하는 병사들을 전송하고,

부상병들을 위문하는 일,

위문금 모금, 국방 헌금을 기부하는 일,

전쟁터로 군인들을 찾아가서 위문하는 일 등에 참여하였습니다.

 

나아가서 집집마다 방문을 해서 탁발을 하여

국방 헌금으로 기부하는 일,

근로 보국대를 조직하여 농어촌의 일손을 돕는 일,

시국 강연회를 열어 비상 시국에 대처 방안을 선전하는 일,

창씨개명 상담소를 운영하고 선전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당시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은 이러한 일에 앞장섰으며,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일이었으므로 '총후보국(銃後報國)'이라 하며,

이러한 종교계의 전쟁참여를 '종교보국'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1937년 7월 17일 31본산 주지회의 의장인 이종욱은

총독부를 방문하여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던 김대우를 만나

중일전쟁에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하였습니다.

 

다음 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비상시국 극복 방안의 하나로

31본사는 7월 25일과 8월 1일,

각 말사와 포교소는 8월 1일 새벽 5시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봉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교무원은 19일 이 결정사항을 전국의 사찰에 공문으로 발송하였습니다.

 

이어서 교무원은 전국 사찰과 포교당에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릴 것과

위문금을 모급하고 각 부대가 출정할 때 전송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전사하거나 병사한 군인들을 조문하고,

영가를 천도하는 등 총후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1개월이 지난 8월 8일

이종욱·임석진·황금봉 등 교무원 간부들은

출정 부대 송영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출정부대 송영식은 이후 자주 있었으며,

그 때마다 교무원의 간부들은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였습니다.

 

교무원은 또 군대에 입대한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위문금을 전달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였습니다.

 

8월 19일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된 박문사에서는

‘국위선양 북지사변 전·병사자 위령대법요 겸 시국강연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시국의 중요성을 조선인에게 알리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자 하였으며,

그 전위에 종교계를 앞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한 종교계는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불교계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연사는 주로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몇 안되는 학승과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승려들이 나섰습니다.

 

시국강연회는 전국적인 순회 강연의 형태로 시행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시·군 단위로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교무원 간부 승려들과 학승들은 전사자를 조문하고,

위로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전사자의 영전에 분향하고,

독경을 함으로써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 넋을 위로하였습니다.

 

승려들이 위로한 그 젊은 넋은

그들이 전쟁터로 나가서 대일본 제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역설한 권유를 듣고 전장으로 나갔다가 죽은 청년일지도 모릅니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學僧) 권상로는

1931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월 6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주최한 시국인식 강연에서

「선각자로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습니다.

 

일본은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1938년 2월 조선의 청년들에게 지원병제를 실시하여

생명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권상로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제57호에 「승려 지원병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요지는 조선에서는 아직 징병령이 시행되지 않아

병역 의무를 행하려는 청년들이 있어도 길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번 제3회 지원병 모집에는 6만 명이 넘었다고 하며,

그 중에는 청년 승려들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불교도로서 탈선적인 행동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권상로)이 생각하기에는 본령 중의 하나이며

조선 불교에 있어 이채를 가지고 있는 특색의 조건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총독부는 끊임없는 시국 강연과 좌담회 등을 통하여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납부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이러한 강요는 스님들을 통하여 신도들에게 전달되었고,

교계의 언론은 이러한 사실을 아름다운 미담으로 소개하였습니다.

 

한편,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이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위문단 파견이 교무원 차원에서 논의되었습니다.

 

1937년 11월 2일 중앙불교 전문학교 강당에서

'31본사 주지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 결과 위문금 5천원과 위문사 3인의 경비 1천원

모두 6천원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금액은 각 본사별로 할당하여

11월 20일까지 교무원으로 납부하기로 하였습니다.

파견 위문사는 이동석· 최영환·박윤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들이 선발된 배경은 세 승려는

모두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서

일본어에 능통하며 나이 30세 안팎의 촉망받는 인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인 이종태에게

악사 3인을 추천하라고 하여

이종태 본인과 체신국 음악부의 문학준과

보리도루(ポリトル) 레코드 회사의 전속 가수인 윤건영이 선발되었습니다.

 

위문단 일행은 피복·방한구두·모자·약품·악기 등의 물품을 주문하고,

종군 면허증과 완장 등을 20사단으로부터 교부 받고,

종로경찰서로부터 여행증명원을 받아서

12월 22일 만주 봉천행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이들 위문단 일행은 중국의 신안주·천진·봉천·산해관·

북경·석가장·태진·태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고

이듬해인 1월 18일 29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이들은 도착 즉시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이어 총독부를 방문하여 정무총감과 이하 국·과장에게 귀국 인사를 하였고, 

밤에는 경성의 유지 36인이 베푸는 환영연에 참석하였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정신적으로는 내선 동화 정책으로 수탈을 강화하였습니다.

 

불교계는 이렇게 강화된 수탈정책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창씨개명 기사>

 

(2) 불교계의 창씨개명

 

우리 민족의 가족 제도에는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성(姓)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이어 받은 사람의 성은 일생동안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외국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둘째, 동성동본 불혼입니다.

지금은 법률적으로 동성동본 결혼 금지 제도가 없어졌지만,

현족까지 혈통이 같은 친족들끼리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율처럼 남아 있습니다 .

 

이러한 전통을 가진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을

일본총독부는 1940년 2월 11일을 맞이하여

그 날부터 그 해 8월 11일까지 1차로 기한을 정해서 실시하였습니다.

 

우리의 성(姓)과 일본인의 씨(氏)는 개념이 다릅니다.

 

우리의 성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것이지만,

일본인의 씨(氏) 개념은 가(家)의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성이 일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일본의 씨는 종족이나 부족은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어머니와 아내의 성이 아버지와 남편의 성과 다르지만,

씨를 창설하면 전 가족의 씨는 같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씨의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되는 것이 씨설정(氏設定)으로

이것이 바로 창씨개명입니다.

 

창씨개명을 시행하기 위하여

총독부는 두 건의 제령을 공포하였는데,

그것은 1939년에 공포된 제령 제19조 ‘조선민사령 개정 건’과

제령 제20호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이었습니다.

 

총독부가 창씨개명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의 가족제도를 일본화 함으로써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내선일체 정책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장차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할 경우

일본 군대 내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다를 경우

파생되는 이질감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창씨개명이 시작되자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성이 바뀐다’ 또는 “성이 없어진다‘는 소문에 놀라 신고를 하기를 꺼렸습니다.

 

총독부는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이나 외국에 살고 있으면서

일본식 가명을 쓰고 있는 사람

그리고 조선에 살면서 일본식 이름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수용하여

일본식 씨를 쓰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창씨개명을 하러 줄을 선 사람들>

 

하지만 창씨개명을 실시한 후

실제로 나타난 상황은 총독부의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전국 호적총수는 4,282,754호였는데,

2월 중에 창씨를 제출한 호수는

15,746호로 전체의 0.36%에 지나지 않았고,

6개월의 절반이 되는 5월 20일에 326,105호로

겨우 전체의 7.6%라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당황한 총독부는 후반부 3개월에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통하여 강제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 결과 창씨개명을 한 호수는 3,200,116호로 79.3%에 달했습니다.

 

총독부는 8월로 창씨개명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이후라도 언제든지 희망하는 자는

창시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이 무리한 작업을 일단락 지었습니다.

 

총독부는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녀에게는

학교에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고,

각 행정관청에서는 사무 취급을 거부하였으며,

더 나아가 식량과 그 밖의 다른 물자를 배급받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식 성명으로 우송된 화물의 수송이

전면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극심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창씨하지 않는 호주는 ‘비국민’ ,

‘후테이센징(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

노무 징용의 우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불교계의 창씨개명 상황 역시 비슷했습니다.

 

1940년 총독부에서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전조선의 승려 수는 6,600여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창씨 개명을 한 승려 수는 3,359명이었으니

과반수를 넘어선 숫자입니다.

 

당시 교계를 주도하고 있던 총본산건설사무소에서는

1940년 6월 17일 창씨개명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그 결과 창씨개명 무료 상담소 설치·운영과

수속 사무를 대행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교계의 신문과 잡지에는

창씨개명의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1940년 6월 『불교』 제24집에는 31본사 주지 가운데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과 일본어 발음을 게재하였고,

『불교』 제26집에는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소개하였습니다.

 

1940년 12월에 발간된 『불교시보』 제65호에 누락된

4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사는 31개이지만 평안도의 영명사와 법흥사의 주지는

한 사람이 겸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본사 주지는 30명이었습니다.

결국 1940년 연말까지 본사 주지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41년 총독부는 보다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조선불교 조계종'의 창립을 종용하였습니다.

 

조계종은 일제 말기에 불교계의 친일 행각을 지휘하였습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간부들은 모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였습니다.

종무총장 이종욱은 광전종욱(廣田鍾旭:히로다 쇼이꾸)로 창씨 개명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이 1944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불교 잡지에「징병제 실시의 영(榮)을 예대하고」라는 징병을 환영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人)이 잘 시행된다는 것으로 기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내선 일체'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은 종족이라는 설이며,

'일시 동인'이란 일본 천황이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뜻으로 황민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결코 같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봉급은 대략 3배 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받는 봉급의 3분의 1밖에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잔심부름과 궂은 일은

조선인이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조선 불교 조계종의 종정과 종무총장에 이어

주요 간부들도 모두 창씨개명에 참여하였다.

 

교무부장이었던 임석진은 하야시 겐기찌(林原吉)로

서무부장이었던 김법룡은 가가와 호류(香川法龍)로,

재무부장이었던 박원찬은 아라이 엔산(新井圓讚)으로 창씨개명하였습니다.

 

이처럼 불교계는 교단의 집행부와 학계 등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성씨를 바꾸는 창씨와 이름을 바꾸는 개명 작업에 동참하였습니다.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친일파라고는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창씨개명은 일제시기에 지배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선봉에 서서 창씨개명을 선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과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한 사람들의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동족으로 하여금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인의 하수인이 되기를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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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은 세대라서

저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영화나 TV를 통해

사진이나 화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알수 있습니다.

 

간접 경험만으로도

정신과 육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전쟁은 정말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속이며

전쟁의 구렁텅이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넣는 인간들과

이에 부화뇌동하여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인간들을 보면

정말 분노의 마음이 생깁니다.

 

불교인이라면 참혹한 전쟁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 대부분의 불교 지도층은

오히려 일제가 저지른 전쟁을 찬양하고

그 전쟁의 충실한 협력자가 되어

동족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프랑스는 나치 정권 시절 독일에 협조한

전범과 부역자들이 독립후 처단되어 단죄를 받은 것과는 달리

우리 나라는 해방 이후에도 불교 지도자로서 행세하며

계속 승승장구한 굴절된 역사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불교에서는 개인의 개업(個業)과 사회적 공업(共業)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은 공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전범과

이에 부화뇌동하여 국민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전쟁 협력자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전쟁 책동에 놀아나 분노와 살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몰지각한 국민들

이 3박자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무서운 공업이 전쟁입니다.

 

개인적 악업도 바르게 참회해야 하는 것처럼,

나쁜 공업의 악업을 저지른 당사자들도 단죄와 참회라는 절차가 없다면

또 다시 재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고통과 아픔 속에 빠뜨리는

무서운 파급력 때문이라도 단죄와 참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시대 피식민지 조선의 지도층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웠을 겁니다.

 

전쟁에 광분한 일본에 협력하는가,

그렇지 않고 단호하게 거부하는가

하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거부하면 온갖 곤란과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메도 일제 말기 당시 우리 불교계의 지도층이

전쟁에 협력하고 일제 황민화 정책의 선두에서

혹세무민한 죄업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