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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7) - 심전(心田) 개발 운동

by 아미타온 2026. 1. 22.

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7) - 심전(心田) 개발 운동

 

<(구) 조선 총독부(중앙청)>

(1) 심전개발운동의 배경과 내용

 

1930년대 초반 일본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1929년에 밀어닥친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로

일본의 경제 사정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공황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지금까지 무제한적으로 들여왔던 조선 쌀의 유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경제 공황의 위기를 탈출하고 소비 시장의 확대를 꾀하고자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는 등 급속히 제국주의화 되어 갔습니다. 

 

당시 도쿄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고 귀족원 의원이 되었던

미노베 다쓰키치는 "천황기관설"을 제기하였습니다.

 

"천황기관설"은 신으로 숭배되었던 일본 천황을

국가 행정기구의 하나로 보아야한다는 학설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당연한 학설이었지만,

군부와 우익 단체들은 '천황기관설'을

국체에 반하는 불경스러운 이론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천황기관설'의 파문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고,

미노베의 서적은 발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미노베는 자신의 학설이 국체 관념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했고,

귀족원 의원직을 사임해야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1920년대 초반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이 점차 확산되어 큰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젊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가 급속히 번져나갔고,

농민층과 노동계는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를 일으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국제적으로 반종교 운동이 전개되자 일본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반종교 운동은 사회주의 이론인 유물론은 무신론인 까닭에

종교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반종교 운동은 신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천황 지배 이데올로기에 큰 도전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일본식 표현으로 하자면 

‘경제국난’, ‘사상국난’, ‘외환국난(外患國難)’의 3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신도, 불교, 기독교 등 종교계를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은체 사상(恩諦思想)'에 주목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은 

사상적으로 조선인들에게 황국 신민으로서의

국체 관념을 고취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심전 개발 운동(心田開發運動)'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는

1931년 7월 제 6 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조신인의 '내선 일체'와 조선의 '경제 부흥'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부임한

우가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제1수출품은 쌀이었는데,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쌀의 수출이 줄어들고 쌀의 가격이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농가 부채와 춘궁 농가의 급증 및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이 증가하여 농촌 사회 질서가 급속히 파괴되어 갔습니다.

 

게다가 소작쟁의와 사회주의계 농민 조합 운동이

조직적인 양태를 띄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결국 우가키는

일본의 농촌경제 갱생계획을 모방한 농촌 진흥 운동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1932년부터 조선의 농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체제순응적인 일부 농민에게 자금을 지원하거나,

일부 악덕 지주제에 대해 처벌하거나

노동과 근검 절약만이 경제 갱생의 비결이라는

농민 정신 개조 운동을 전개하여 위기를 헤쳐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농촌 진흥 운동'이 물질적인 면에서의 갱생운동이었다면

‘심전 개발 운동’은 정신 계몽 운동이었습니다.

 

'마음 밭'을 의미하는 ‘심전(心田)’은

불교 고유 용어가 아니라 유교 경전 <예기>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불교와 유교 모두 정신 수양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총독부가 심전개발운동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정책에 순응하게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황국 신민을 만드는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심전개발운동은 단순히 외형적인 생활의 개선이 아니고,

생활의 바탕이 되는 올바른 신념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는 불교계를 중심에 두고

'심전 개발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 황국 신민의 서사>

 

총독부가 불교에 역점을 두고

'심전 개발 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불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가혹한 탄압을 받아서 피폐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부녀자 층을 비롯해서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큰 종교라는 점에 착안하였습니다.

 

둘째, 조선 승려의 자질이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가 그들의 지위를 상승시켜주고,

정책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심전개발운동에서 지향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무난한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셋째, 불교는 일본 국가신도에서 중시하는 조상숭배 정신을

거리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종교라는 점이었습니다.

 

넷째, 일본이 점령하고자 하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이라는 견지에서 보더라도

불교는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종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전개발운동의 전개는

1935년 1월부터 학무국이 중심이 되어

1년간 연구하여 오던 입안이 구체화되었고,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총독부 학무국은

1. 국체 관념의 명징(明徵), 

2.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할 것,

3. 보은·감사·자립 정신의 양성 이라는

이른바 심전개발 3대 원칙을 구체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첫째 국체 관념은

"대일본 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황조의 신칙을 받들어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만고불역의 국체이다."라고

1937년 일본 문부성이 <국체의 본의>에서 밝혔듯

군국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조선인들에게 주입시켜 일본인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경신숭조의 사상은

일본 민족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의 뿌리는

조상 숭배에 있다고 하면서

일본적인 조상 숭배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조선인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보은과 감사는 식민 통치자인

일본 제국주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억지 논리였습니다.

 

불교계가 공식적으로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35년 7월 28일부터였습니다.

 

이 날 본산 주지 5명(용주사 강대련,봉은사 강성인,

범어사 오이산,월정사 이종욱,화엄사 정병헌)이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모여 전조선 불교도들을 총동원하여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심전개발운동 촉진 발기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불교 심전개발 사업촉진회"를 결성하는 한편,

이 사업에 전국승려들이 적극 협조하라는 공문을 31본산에 발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1본산 주지들은 1935년 8월말에 회의를 개최하여

학무국장의 심전개발사업에 대한 연설을 들었고,

또 총독의 초대로 총독 관저에 가서 총독의 훈시를 듣는 등

조선 불교계에 심전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불교계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佛敎時報)>는

심전 개발 운동의 선전지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불교시보>는 심전개발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총독부의 방침과 강연회 등의 일정과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하였습니다.

 

아울러 수많은 불교계 승려들과 학생들이 

심전개발운동의 전도사로 나서며

강연회를 개최하며 이를 홍보하러 다녔습니다.

 

<불교시보>와 불교계의 잡지였던 <불교>에 나타난

1935년부터 1937년간 전국에 걸쳐 시행된

심전개발 공개 강연의 횟수는 572회였고,

동원된 청중 수는 149,787명이었습니다.

 

강연에 동원된 연사들을 살펴보면

김태흡·박윤진·이지광·김경주·박영희·

이동강·배성돈·장원규·임석진·문학연 등 66명에 이릅니다.

 

심전 개발의 연사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유학한 유학생 출신과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학생들이 많았던 까닭은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성향이

친일적이었다는 요인을 하나로 들 수 있겠고,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학생들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이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 연사로 활동하면서 생기는 얼마간의 수입이

학비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일본 유학생>

 

(2) 심전개발운동의 전도사 김태흡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강연을 한 사람은

<불교시보>의 발행인이었던 김태흡이었습니다.

 

불교도와 일반인들에게 김대은(金大隱) 혹은

석대은(釋大隱) 스님으로 알려져 있는 김태흡은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이수하고 10년 동안 독학으로

일본 도쿄에서 일본대학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한,

일제 시기의 대표적인 엘리트 스님이었습니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시절 불교계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 <금강저>의 창간과 편집에 참여하여

10편의 글을 이 잡지에 발표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학을 하면서 인력거 발판과

공원 벤치 등에서도 집필을 하고

귀국 후에도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불교계 잡지인 <불교>가

창간(1924. 7)되어 종간(1933. 8)될 때까지

산문 88편과 운문 17편, 희곡 11편, 소설 7편 등의
방대한 양의 글을 <불교>지에 게재하는 등

권상로와 더불어 불교 언론계의 쌍두마차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중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이 살육되는 재난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는 체험을 하고,

<불교> 제35호(1927. 5)에 '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부가 삭제되는 등 반일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28년 귀국 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초대 중앙포교사로 활동하다가

1935년 8월에 <불교시보>를 창간(1944년 4월 종간)하면서

급격하게 친일파로 전락해 갔습니다.


<불교시보>가 창간된 시점은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의 전개와 맞물려 있습니다.

 

김태흡은 <불교시보> 창간사에서

'심전개발운동의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어'라는

말을 했듯이 출발부터 친일성향을 드러냈습니다.

 

아울러 <불교시보>에 중앙교무원의 서무이사 김정해(金晶海)가 쓴

[심전개발의 3대원칙에 취(就)하여]를 비롯한

심전개발의 목적과 실행사항 등을 자세하게 보도하여

일제의 조선민족 동화, 즉 일본화와 순량화 정책의 실천에 적극 동조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시보>는 본산 주지들의 심전개발사업과

김천·동래·군위·임실·전주 등의 지방 각 군청과

사찰에서 행하는 심전개발운동을 자세하게 보도하였습니다.

 

또한 <불교시보>는 경성방송국에서 행한

불교측 심전개발강화(講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게재하였습니다.

 

<불교시보>

 

<불교시보> 제3호(1935. 10. 15, 7면)에는

불교 측의 이지광(李智光), 박성권(각황사 포교사), 김경주(불교전문학교 학감),

박윤진(불전 강사, {불교시보} 직원), 김태흡(불전강사, 불교시보 주간·발행인), 권상로(불전 교수) 등이

1935년 4월 7일부터 9월 17일까지 16회에 걸쳐 행한 심전개발 방송에 대하여

방송날짜와 연제 및 연사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김태흡은 이와같이 <불교시보>의 발행인이자 봉은사의 상임포교사이며

불교전문학교의 전임강사이기도 했는데,

심전개발운동 선전에 매진하기 위하여 불교전문학교 교수의 역할을 중단할 만큼

열성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봉은사, 전등사, 개풍군, 강원도 등에서 개최한 심전개발 순회강연에 적극 참여하여

총 157회나 되는 강연을 행했습니다.

 

그가 한 강연의 연제를 보면 <심전개발과 불교의 보은 사상>,

<심전개발과 자력갱생>, <심전개발과 자립정신>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재는 피폐된 조선의 농촌경제 부흥시키기 위한 농촌진흥운동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지원한다는 심전개발운동의 목적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태흡은

전쟁에 대한 시국인식 친일강연으로 더욱 바빠졌습니다.


그는 1937년 9월 말부터 경기도와 강원도를 시작으로 시국강연을 하였는데,

강연 제목만 살펴보면 '지나사변과 입신(立信)보국', '시국과 불교',

'지나사변과 국민의 각오','벽사항마와 영겁의 행복', '동양평화와 국민의 사명',

'국방인식과 의용봉공(義勇奉公)', '시국과 반성', '성전과 각오', '시국인식과 지은보덕',

'신애협력과 황도선양' 등등으로 친일적이고 일본 군국자의를 옹호하였습니다.

 

중일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추켜세우며

조선인들에게 일제를 위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사명을 다 하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심전개발운동은 1931년 중국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시도하고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을 감행하던 시기에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는 황민화 정책의 전단계로 입안된 이데올로기 통제책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종교계에서 각종 강연회, 강습회, 촉진회, 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전개하도록 한 관제운동이었고, 총독부는 종교계를 동원하면서

특히 불교계에 역점을 두고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심전"이라는 불교식 용어와

일제의 불교계 후원에 현혹되어 수많은 조선 승려들이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화뇌동하는 단견을 노출하였습니다.

 

또 이러한 부일협력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기간동안

동족을 전쟁에 내모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졌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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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 신민화 지식인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의 정법에 입각하여

마음을 바르게 수행하여 참된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의 '심전 개발 운동'은

일본 천황과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마음을 개발하자는 운동입니다.

 

일본 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의 불교도를 친일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에 불교계의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당시 불교 교단이 당면한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능력있는 포교사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교계의 선각자들은 인재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배워와 교계의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해외 유학생 파견을 주장했고,

본인도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대학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일제 시대는 식민지였던 관계로 일본에 유학승이 파견되었으며,

1924년에 약 50명 정도의 유학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학승들이 일본 유학을 가는 경로는

1) 각 교구 본사에서 공비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 경우나,

2) 일본의 저명인사들과 조선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참여하여

구성된 조선불교단과 총독부 관비로 파견한 유학생,

3)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세가지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1), 2)의 경우는 경제적인 면이 확보되었지만 

3)의 경우는 고학으로 공부를 할 수밨에 없었을 것입니다.

 

김태흡 스님처럼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열악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학업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스님들은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불교계 최고의 지성으로

이들 중 일부는 조선불교청년회 및 유신회 활동에 깊이 관여한 승려들도 있었습니다.

 

이회광이 일본 임제종과의 연합을 시도하였을 때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를 저지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당의 당원 24명 가운데 15명이

일본 유학 경력의 스님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 문제와 불교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한 깨어있는 승려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스님들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관비로 유학한 일부 스님들은

귀국 후 총독부와 결탁하여 친일 승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 말기 제국주의적 침탈을 감행하여 탄압 강도가 더 세어진 상황에서

일제는 이들 일본 유학승 그룹에 대한 이용 가치가 커져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사회 개혁 의식을 가진 스님들조차 변절하고 친일파로 탈바꿈하면서

불교계의 지도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태흡 스님을 비롯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일부 스님들은

일제 말기가 되면서 친일파로 전락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를 식민지 지배에 이용하려는

일제의 심전개발운동과 같은 황민화 정책의 도구가 되어

민족을 배반하고 전쟁에 내모는 선동꾼으로 전락하여

역사의 죄인이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