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제 시대 불교계의 동향(9) - 조선 불교 조계종의 탄생

1. 불교계 통일 교단의 요구
일제시대 초기 조선 총독부는
사찰령 체제 아래서 불교계를 31개 본사로 나누어 통제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불교계를 31본사로 분할한 것은
단일한 지도 체제 아래서 통일된 목소리를 낼 경우
그것이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면
대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분할 통치 방식을 도입,
서로간에 충성 경쟁을 유도하여 효율적인 지배를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와 같은 분열된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자적 노선을 견지하기 위해
불교 교단 통일 기관의 설립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일제도 이러한 불교계의 열망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 직후 총본산 설립안을 검토하였습니다.
1920년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서울에 30본산을 통할하는 총본산을 세우고
중앙집권화를 꾀할 것과
총본산의 관장에는 친일주의자를 세울 것,
그리고 친일불교옹호단체를 외곽에 세우고자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종교적 사회운동>을 제안하고
다음과 같은 6가지 방법을 구상했습니다.
(1) 사찰령을 고쳐
서울에 전국 30본산을 통할하는
총본산을 두고 중앙집권화를 꾀한다.
(2) 총본산의 관장(종정)에는
친일주의자로 세운다
(3) 불교진흥 촉진단체를 만들어
총본산의 옹호기관 노릇을 시킨다.
(4) 불교진흥 촉진단체 본부를 서울에 두고,
회장을 거사 중 친일주의자 중 덕망 높은 사람으로 채운다.
(5) 이 단체의 사업을 일반 인민의 교화,
죄인의 감화, 자선사업, 기타로 한다.
(6) 총본산, 각 본사, 불교 단체에
상담역으로 인격있는 일본인을 둔다.
그러나, 그 안만 나왔을 뿐,
이 후 총독부는 불교계의
통일기관 설립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불교계 내에서도 1920년대 이후
불교계의 통일기관 설립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1929년 청년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종헌을 제정하고, 종회를 구성하였는가 하면
집행기관으로 '재단법인 중앙 교무원'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일제 식민 지배에 기생하고 있던
31본산 주지 계층의 비협조로 인해
이러한 종헌과 종회는 유명무실화되었으며
교무원도 31본산 주지에 의해 움직이는 어용단체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 후 1930년대 청년 승려들이
불교계 통일기관 설립과
종헌,종회의 운영을 주장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2. 일제의 총력 전시 체제를 위한 통일 교단 설립 추진
그러다가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이른바 총력 전시 체제로 전환한 이후
불교계에 통일기관 설립을 종용하였습니다.
'총력 전시 체제'는 모든 국민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세계 재분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준비하는 체제였습니다.
그 내용은 단지 자원, 자재, 자금, 노동력을
어떻게 배분하는가 하는 물자 조달 체제 구축과 함께
사상적으로도 통제책을 강화하여
신속한 명령 전달 체계를 확립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었습니다.
일제는 전쟁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1938년 구축된 국민정신 총동원 체제를
1940년 10월에는 국민 총력 체제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리고, 산업·경제·문화·종교 등
각 방면의 단체를 총망라해서
통합된 단일기구로서 일원적 지도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일원적 지도 체제 구축은
전쟁 상황의 격화와 함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났고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불교계의 일원적인 지도 체제는
"총본산 설립을 통한 통일 교단 확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총본산 설립에 관한 기존의 학설은
조선 불교계의 자주성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총본사 설립은
조선 불교계에서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노력과
대표기관을 설립하려는 자주적인 의지가 결합된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총독부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언뜻 보기에 식민지 체제하에서
불교계의 자주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식민지 지배 세력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식민지 지배 권력의 특성은 수탈에 있고,
수탈의 강도는 피지배 세력의 저항 정도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식민지 권력은 피지배 세력의 저항이 완강하면
일정하게 양보하여 타협하고,
저항이 약하면 원래 의도를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독재 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저항 세력은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한 독재에 맞서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기회를 살필 수 밖에 없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 체제하의
일본 파시즘 세력의 독재는 무자비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독재 치하에
국내에서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자주성 관철을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불교계 지도자들은
전시 체제에서 대부분 열성적인 친일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불교 총본사 건설은
식민지 지배 권력이 전쟁 수행의 효율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3. 각황사(조계사)의 창건
총본사 설립에 관한 논의는
1937년 2월 총독부가 31본사 주지들 앞으로
불교계의 대표기관 설립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라고
공문을 시달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총독부는 동년 2월 26일과 27일에
이에 대한 본사 주지들의 의견을 직접 청취하고자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31본사 주지 회의에서
대표 기관 설치에 대해
"조선불교 선교양종 종무원"을 설립하고,
서울에 있던 각황사(현 조계사)를 총본산으로 삼아
종무원 내로 이전하여 새롭게 건설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아울러 총본산 건설과 실무를 담당할 조직으로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총본산 건설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31본사 주지회의에서는
또한 총본산 건설비와 유지비 40만원을
조선 내 각 사찰들이 분담금으로 나누어 납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총본산인 각황사(조계사)는
1937년 5월에 짓기 시작하여
1938년 10월에 완공되었습니다.
각황사의 건축은
전북 정읍에 있는
보천교의 십일전을 해체한 목재를 사다 지었습니다.
(보천교는 강증산을 모시는 일제시대 신흥종교였습니다.)
이 건물이 오늘날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입니다.
이처럼 총본산의 외형은 완성되었으나,
총본산의 절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총본산은 조선불교를 대표할 사찰로서
각황사 대신 격에 맞는 이름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39년 5월 총본산 건설사무소는
총본사의 사명(寺名)을 '태고사'로 확정하고,
총독부에 인가를 신청하였습니다.
총본산 명칭을 '태고사'로 확정한 것은
조선 불교의 법통을 고려 말 태고 보우 화상과
연결시키려 한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총본산의 건물 완공과 함께
태고사로 사명을 결정하여 총독부에 인가를 신청였습니다.

4. '조선 불교 조계종'의 창종
1940년 4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총독부의 인가를
31본사 의장이던 이종욱에게 최종적으로 통보하였습니다.
총본산인 태고사가 인가된 직후인 1940년 11월에
"조선불교 총본산 설립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여기서 총본산 설립과 함께 탄생할
새로운 교단의 종명(宗名)과 운영,
종정과 종무원장 및 각 부장의 선출 등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불교 총본산 설립위원회의 사무소가
총본산인 태고사가 아니라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에 설치되었습니다.
게다가 위원장은 총독부 학무국장이 맡았고,
2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1명은 총독부 사회교육과장이었고,
나머지 1명의 부위원장은 31본사 주지회의 의장으로
대표적인 친일승려였던 월정사 주지 이종욱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위원들은 31본사 주지 전원이었고
고문은 각도 내무부장 13명,
실무를 맡은 간사들은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
촉탁인 일본 관료 3명이었습니다.
이처럼 총본산의 설립이
조선 총독부의 구도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총본산 설립위원회가 조직된 이후
불교계에서는 종명(宗名) 개정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일제 초기 원종과 임제종의 갈등 당시부터 제기된
한국 불교의 종명 문제는
일제의 사찰령으로 인해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는
애매모호한 종명을 표방하여 불교계의 불만이 많았습니다.
1940년 11월 주지회의에서
중국 선종 6조 혜능 선사가 거주하던
조계산의 "조계"에서 유래하여 선종 종단임을 표방하는
"조선 불교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확정하여 이를 가결하였습니다.
마침내 1941년 4월 23일,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이
총독부에 의해 정식 인가됨으로써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하였습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는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여
바깥 출입을 하지 않던 방한암 선사를 선출하였습니다.
총본산의 종무가 시작되자 총본사 태고사에서는
1941년 7월 7일 중일전쟁 제 4주년 기념일에
전 조선 1,326개 사찰과 343개 포교소에서
일제히 엄숙한 기념법회를 봉행하라는
종정의 통첩을 전국 본말사에 발송하였습니다.
총본산인 태고사가 출범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진기장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하였습니다.
"총본산 태고사는
전 조선 1,326개 사찰 및 6,600여 승려들을 통합하여
신시대의 국가적 요청에 응하고,
심전개발을 향하여 돌진하라."
이처럼 국국 일본의 식민통치자의 내용으로 축사를 하였습니다.
한편, 총본산에서는 종정에 이어
종무고문과 종무총장, 부장 등 간부와 직원들이 구성되었습니다.
수덕사의 송만공 스님을 제외하고
거의 친일승려들로 채워진
조선불교 조계종의 초대 임원과 직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종무고문 : 김경산, 김구하, 강대련, 송만공, 송만암, 장석상
종무총장 : 이종욱(월정사 주지)
서무부장 : 김법룡(묘향산 보현사 주지)
교무부장 : 임석진(송광사 주지)
재무부장 : 박원찬(통도사 주지)
종정 사서 : 허영호(중앙교무원 상임이사, 범어사 승려)
서기 : 김낙순, 대곡평정(일본인), 김택수 촉탁 : 박원서, 홍정식
종정은 오늘날처럼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고문은 단지 의례적인 원로 예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종무총장은 오늘날의 총무원장에 해당하며,
실질적인 종권을 행사하는 요직중의 요직이었는데,
총본산 설립 과정에서 이미 종권을 장악한
대표적 친일승려 이종욱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요 간부인 김법룡, 임석진, 박원찬, 허영호 등도
당시 가장 활발하게 친일 활동을 하던 친일 승려였습니다.
이들은 출발과 함께
"조선불교의 재출발! 조선불교의 신체제!"란
자축의 권두언을 <신불교>에 실었습니다.
이들이 부르짖는 재출발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군국일본의 의사에 순응하는 친일불교로서의 재출발"이며,
일제의 결전체제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 이들이 외친 신체제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총후보국체제로의 신체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불교 조계종'으로 재탄생한 불교계는
그 이후 총본산, 본사 그리고 말사로 분류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총본산이 전국의 본말사를 통괄·지휘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계종 태고사가
31본사를 총괄하는 최고 기관임에도
종정에게 31본사 주지의 임면권이라든지,
사찰 재산 처분권을 인가하는 등의 실질적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는 총본사를 설립하고
실무적인 종단 운영을 친일파에게 맡김으로써
31본사의 통제를 보다 원활하게 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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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사찰령'과 '31본사제'라는
2가지 수단을 통해 효율적으로 조선 불교를 통치했습니다.
본사 주지에게 적당한 당근과 채찍을 주어
이들간의 충성 경쟁을 통해 분열주의적 방법으로
조선 불교계를 통치하고자 했던 교활한 식민 통치의 모습이었습니다.
1920년대로 접어들며
교육 받은 청년 승려들이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분열주의적 주지 전횡에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승려 대회를 개최하고
불교청년회, 불교유신회, 만당, 불교청년동맹 등의 활동을 통해
사찰령을 폐지하고 자주적인 통일 교단과 종무원을 설치하고
새롭게 종헌,종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불교계가 자율적인 통일 종단을 설립하고
여기서 나온 종헌과 종법으로 조선 불교계를 자주적으로 운영한다면
자신들이 목적으로 하는 효율적인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일제 말기까지 통일 교단 설립 요구를 막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본사 주지들의 비협조와
청년 승려들의 단결된 개혁 의지 부재,
그리고 일제 말기에 들면서 청년 승려들이
서서히 친일파로 전락해가면서
초기의 건강하고 자율적인 통일 불교 교단 요구는 점점 퇴색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일제 시대 한국 불교 최초의 통일 교단인
조계종의 창립과 총본산인 태고사(조계사)의 건설은
결국 교단의 자율적인 요구와
일제에 투쟁한 승려들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시 총력 체제에 돌입한 일본 총독부와
이에 야합한 31본산 기득권 친일 주지들의 합작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흔히, 민족 정기가 일제 시대 때 많이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존속된 조계종의 모태가
결국 이와 같이 불교 정기가 많이 훼손된 가운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계종은 탄생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바람잘 날 없는 오욕의 역사를 걸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발은 미약하더라도 자주적이고 제대로 된 교단의 설립,
관권이나 개인적 야욕이 아니라 정법에 맞게 운영되는 교단의 운영이
제대로 된 승가이자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바른 교단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총독부와 친일 승려들의 합작품으로 태동된
조선불교 조계종의 첫 출범을 보면서 많은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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