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31)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7) - 마음

by 아미타온 2024. 6. 10.

<불교인물사(31)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7) -  마음>

 

<수원 봉녕사 희견 보살상>

 

 

지눌 스님은 여러권의 저술을 지었습니다.

지눌 스님의 여러 저술 중에 <정혜결사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눌 스님(1158~1210)이 33살 되던 해

대구 팔공산 거조사에서 본격적으로 <정혜결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결사(수행 공동체)에 동참하기를 권유하고 선포하는 글이 <정혜결사문>입니다.

 

지눌이 결사(수행공동체)를 추진하게 된 이유와

당시 도반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본 수행에 대한 확고한 의지,

그리고,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과 공부를 통해

해탈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눌 스님의 의지가 잘 드러난 글입니다.

 

그래서, 지눌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일부를 발췌하고 저의 생각을 밝히는 식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원문은 소제목이 달려 있지 않은 긴 장문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읽은 책은 번역자께서 8개의 소제목으로 분류하여

이해를 쉽게 할 수 있게 분류하여 놓았습니다.

(정혜결사문 / 서정형 번역 / 풀빛 출판사)

 

오늘은 먼저 첫 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정혜결사문(1) >

 

1. 한마음을 찾아서(1)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땅이 있기 때문에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도 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마음을 몰라서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가 보통 사람인 중생인 것이고,

한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이가 깨달은 사람,

즉 부처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한마음을 알고 모르는 데에서

갈리는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 불교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

 

 

 

<법구경> 제1장은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입니다.

 

지눌 스님도 불교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해

법구경과 같은 말씀을 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마음을 닦는 노력의 중요함"을

나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속에서

슬픔과 비탄 속에서 미쳐버린 여인 고사 기타미 생각이 났습니다.

 

그녀는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가져오면

죽은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 집을 돌면서 마음 속에서 인식의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닦는다', '한마음을 안다' 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 속에서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상황 속에서

미쳐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 슬픔 속에서 새롭게 일어나 자기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신의 자식같은 다른 아이들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삶을 살겠다는 보살적 원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상황이지만,

마음 속에서의 각자의 인식의 전환에 따라 수많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연기법"이라고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기온이 떨어지면 물이 언다'와 같이 외부적 현상으로서의 연기법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의 연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고통 속에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수행하는 불자는 해탈 지향적으로

마음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마음의 연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중요성(인식의 전환)을 알아

법(진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번뇌와 잡념, 욕망과 분노로 파도치는 마음이 맑아져서

고통 속에 헤매지 않은 존재를 깨달은 존재라고 합니다.

 

반면에 마음과 인식의 중요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식의 전환을 이루지 못해

습관적으로 번뇌와 잡념, 욕망과 분노 속에 살아가는 존재를 중생이라고 합니다.

 

지눌 스님은 <정혜결사문>의 첫머리에서

이러한 "불교의 근본이 과연 무엇인가?"를 문제 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