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물사(29)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5) - 정혜결사의 시작>
1. 나주 청평사에서의 첫번째 깨달음
한편, 지눌 스님은 나주 청평사에서
참선에 몰두하는 한편
경전 연구를 통해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그는 선교 일치의 토대를 닦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첫번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눌 스님은 중국의 육조 혜능의 어록인
<육조단경>을 읽던 중에 다음 대목에서 큰 환희를 느꼈습니다.
"생각이란 진여 자성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여섯 가지 지각 기관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알더라도
대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자유로운 것이다."
지눌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경지를 체험하고는
기쁨에 가득차서 일어나 법당을 거닐며 그 의미를 음미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법에 눈을 뜬 체험은 이후 지눌의 수행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 예천 학가산 보문사에서의 두번째 깨달음
그는 전라도 나주 청원사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다시 운수 행각을 나섰고,
이곳 저곳 만행을 하다가 경북 예천에 있는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28세가 되던 1185년 가을 지눌 스님은
하가산 보문사에서 경전 열람을 하다가
중국의 이통현 장자가 쓴 <화엄론>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화엄론>의 다음 구절에서
두번째로 다시 한 번 큰 각성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만약 마음이 열리고 맑아지면
한 올의 머리털과 온 우주가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여의 지혜지만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할 뿐이다."
이 대목을 읽고는 감격에 겨워서 책을 머리에 이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큰 감동을 받았을까요?
지눌 스님은 선과 교가 일치할 수 있는
합일점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엄론>을 통한 두번째 깨달음의 체험으로
지눌 스님은 자신이 걷는 수행의 길에 대해 확신하였을뿐 아니라,
나중에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엄 사상(敎)과 선 수행(禪)을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선과 교의 합일점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3.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의 시작
그리고, 예천 보문사에서 옛날 보제사에서 정혜사를 맹세했던
한 동지로부터 이제 결사 운동을 시작해보자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지눌은 시기가 무르익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의기가 솟아 곧바로 보문사를 나와 대구 팔공산 거조사로 향했습니다.
대구 팔공산 거조사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 절에서 오랜 숙원인 정혜 결사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눌은 거조사에서 2년을 머문 후인 1190년,
정혜 결사를 촉구하는 <정혜결사문>을 지어서 돌렸습니다.
그의 나이 33살 때였습니다.
<정혜 결사문> 첫 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삼가 들으니 땅에 엎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니 땅을 떠나 일어날 수는 없다"
즉, 마음을 떠나 부처를 구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펴기 위한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계에 대한
자기 비판을 강하게 펼치며 수행의 길로 들어가자고 외쳤습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행적을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을 핑계삼아 나와 남을 구별하고 구구하게 이익을 꾀하며
이 풍진 세상의 일에 골몰하여 도를 닦지 않고 옷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애닯다.
삼계를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세속을 뛰어넘는 수행이 없으니,
다만 사내의 몸을 받았을 뿐 대장부의 뜻이 어디 있겠는가?
위로 도를 넓히는 일에 어긋나고,
아래로 중생을 이롭게 하지를 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4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를 한심스럽게 여겨왔다."
그 다음에는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정혜(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아야 한다는 이론을 차분하게 펼쳤습니다.
그리고, 참된 불자는 귀천을 가르는 신분에 얽매이지 말고
이 종파 저 종파를 가리지 말 것이며
온갖 명리를 버리고 몸소 실천하여 혁신 운동을
벌여야 한다도 힘써 주장하면서 대중을 설득하였습니다.
그의 주장과 논지는 명쾌하였습니다.
그의 취지에 찬동하는 많은 사람에게 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많은 승려와 신도들은 팔공산 거조사로 찾아와
다투어 결사문을 얻어갔습니다.
그는 승려들과 찾아오는 대중에게 정진할 것을 힘써 당부하였고,
몇년간 그들을 지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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