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물사(33)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9) - 수행>
<정혜결사문2>
2. 수행은 왜 필요한가?
(1) 말법 시대
그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펼 수 없는 말법(末法)의 시대입니다.
이미 때가 그러한데 어떻게 선정과 지혜를 닦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송해서 서방 극락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게 더 낫겠습니다.”
지눌이 25살 때 담선법회에서 결사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자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극락 정토에 태어나고자 염불을 하는
승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법 시대라는 시대 환경을 운운하며,
이러한 시대 환경에 태어난 자신의 능력상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염불에 올인해서
다음생에 극락 왕생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신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신의 이성을 더욱 밝게 깨어나게 하고,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밑거름으로 작용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에만 올인하여 신앙 이외의 것을 살피는데 인식이 닿아 있지 않다면
그러한 신앙은 맹목적 신앙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무아미타불' 정토 신앙을 통해
다음생에 극락 왕생하고자 하는 염원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 아미타불 신앙을 통해 내가 왜 극락왕생하려고 하는지,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의 진실된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에 비추어 나의 현재 삶을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를 통해 현실에서 정토행자의 바른 길을 찾지 않는다면 반쪽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는 것처럼
신앙과 이성을 함께 닦아나가야 원만한 불교인이 될수 있습니다.
(2) 선정과 지혜
내가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이 가신 뒤 시간이 흘렀고 상황도 변했지만
우리 마음의 본성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염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만행을 닦는 것은 승려가 늘 하는 생활이므로
정혜(定慧: 선정과 지혜를 깨닫는 수행)를 닦는 것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을 찾지 않고서 형상에 집착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구한다면
뭇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
물론 정혜를 닦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어렵다고 해서 지금 버리고 닦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지금 마음을 내어 억지로라도 닦고 익히다 보면 어려움이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도를 얻어 성인이 된 사람 중에서 처음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
지눌 스님은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이
불교 수행의 근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가요?
불교에서는 우리가 윤회를 하게 만드는 근원을
'무명(無明)'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리에 대해 밝지 못함,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지,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살아감....
이러한 무명이 우리를 윤회하게 만들고
악을 행하게 하는 근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무명으로 인한 욕망과 분노로 인해
고통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긋지긋한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대해 불교에서 제시하는 정통적인 방법은
계(계율),정(선정),혜(지혜) 삼학입니다.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를 바르게 인식하여
말과 행동을 바르게 가져 가는 것이 계율이고,
자신의 마음이 습관의 힘에 휘둘리지 않도록
잘 제어하며 집중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선정이고,
이러한 계율과 선정을 통해 세상의 인연을 바르게
관조하고 생각하고 통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눌 스 님이 말하는 선정과 지혜는
계율이 포함된 의미로서 삼학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는
과정을 통해 보더라도 불교의 정통적인 수행법입니다.
이러한 선정과 지혜(삼학)를 닦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근본에 대해 아무 생각없고 무조건적 극락 왕생만 추구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권력에 놀아나고,
백성을 착취하는 불교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 없고,
민중들에 대한 교화나 보살행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는
무능하고 부패한 불교가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수행
수행해서 곧바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지금 뿌린 복되고 좋은 씨앗이
다음 생에서 또다시 이어져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심결(唯心訣)>에서 말하기를
“바른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씨앗을 심은 것과 같고,
그것을 배우기만 하고 미처 성취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다음 생에서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자신의 능력을 탓하지 말고
오로지 참된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굳건하게 수행한다면 비굴하고 나약한 마음은 사라질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이 세상의 즐거움이란 오래 가지 않고
바른 가르침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어찌 아무 생각 없이 옛 습관에 젖어 인생을 헛되이 버리겠습니까?
(...)
만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분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밝혀서 참회하고 고치며,
밤낮으로 열심히 수행해서 모든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
지눌 스님은 수행을 하는데
금생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수행의 근본을 알고 근본을 공부해간다면
이 공부가 인연이 되어 다음생에 좋은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발 환경 탓, 능력 탓하는 중생심을 버리고
참된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굳건하게 수행하는 것이
수행자의 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아니냐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원효 대사의 <발심수행장>을 보면
"내일이 금방 가고 일년이 금방 가서 죽을 날이 닥쳐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월의 흐름은 더 빠르고,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슴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안다면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습관의 힘(무명)에 젖어 인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참회하며,
삼학을 닦는 것이 수행자의 바른 자세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한마음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
말할 때나 침묵할 때를 막론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이
인연에 따라 허깨비같이 생겨난 것이어서
본래 공하며 실체가 없는 것이 거품과 같고
구름이나 그림자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나를 칭찬하거나 헐뜯는 소리, 잘잘못을 가리는 소리가
모두 텅 빈 골짜기의 메아리 같고 바람 소리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허망한 현상의 근원을 살펴서 편견에 얽매이지 말고
몸과 마음의 본성을 지켜 관조하는 힘을 기르면,
고요한 가운데 마음의 근본에 이르러 주관과 객관의 구분 없이
온 세상이 오직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사랑과 미움에 집착하는 마음도 사라지고,
자비심을 베풀고 지혜는 더 밝아질 것이며,
죄와 악업도 끊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공부가 더 진전하면
마침내 번뇌가 다해서 태어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본성, 즉 한마음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때 선정의 고요함과 지혜의 비춤이 드러나
그 무궁무진한 작용으로 인해
인연 있는 중생을 널리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정의 고요함과 지혜의 비춤...
잘못된 생각과 감정의 기복으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때는
집중과 부동심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바른 이성과 사유보다
잘못된 생각과 감정의 힘에 끌려
또다시 잘못을 되풀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러한 잘못된 생각과 감정을 멈추고
안정과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선정의 힘이 있고,
이러한 선정의 힘을 바탕으로 바른 생각과 사유를 통해
지혜롭게 통찰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대승에서는 이러한 지혜는
연기법을 통찰하는 "공성"에 바탕을 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선정과 지혜가 뒷받침되는 각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죄와 악업도 끊기가 힘들 것이며,
자비행도 지속되게 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정의 고요함과 지혜의 비춤이 드러난다면
마음의 본성(불성,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능력)을 볼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인연있는 중생들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참다운 자비의 보살행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만큼 선정과 지혜(수행의 근본)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한 25세의 약관의 지눌의 고민과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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