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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30)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6) - 수선결사

by 아미타온 2024. 6. 5.

<불교인물사(30)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6) -  수선결사>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

1. 세번째 깨달음

 

팔공산 거조사에서 결사 운동을 시작한 지눌 스님은 

결사 운동을 벌이려면 좀더 확실한 수행 체계를 세우고

사상의 깊이를 담아낼 이론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을 둔 채 몇 명의 제자를 데리고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갔습니다.

 

1196년, 지눌 스님이 40살 되던 해

화두를 드는 간화선으로 유명한 송나라 고승인

대혜 종고 선사의 <대혜어록>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다음의 구절을 읽던 중 3번째로 큰 각성을 했다고 합니다.

 

"선(禪)이란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선은 날마다 사물을 상대하는 곳에 있지도 않으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사물을 상대하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눈이 열리기만 하면 선은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눌 스님은 이 구절을 접하고는

선에 대한 안목이 트이며

즉시 눈이 열리고 안락해졌다고 합니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지눌 스님은 선을 통해 선정과 지혜를 닦는

정혜의 사상의 체계를 하나씩 세웠 나갂습니다.

 

그리고, 화두를 드는 간화선을 수행법을 채택하고,

<간화결의론>이라는 책을 지어 수행의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낸후 다시 현실 세계로 뛰어들어

많은 대중과 접촉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송광사>

 

2. 길상사(송광사)로 결사를 옮기다

 

1197년, 지눌 스님이 41살 되던 해,

그는 순천 조계산 길상사(오늘의 송광사)로 결사를 옮겼습니다.

 

대구 팔공산 거조사는 좁아

대중들을 많이 수용하기에는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길상사는 당시 폐사 직전의 쇠락한 절이었지만,

넓고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지눌 스님이 길상사를 중창한다는 소문이 돌자 목

수일로 평생을 보내던 백암사의 승려가 찾아와 공사를 떠맡았고

나주 등지에 사는 향리들이 시주하며 비용을 대었습니다.

 

지눌 스님과 그 제자들은 상주하며 운력으로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마련하고 산에서 땔감을 해와 쌓아놓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땀을 흘리며 채전을 일구고 공양을 했습니다.

 

쉽게 말해 왕실이나 권문 세가나 벼슬아치들에게

손을 빌이지 않고 절을 중창하였으며 

스스로 노동으로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신라 말기 개혁 선승들의 수행 방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차츰 퍼져가자

길상사는 승려들과 재가 신도들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지눌은 작은 서재를 차리고 정혜 결사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였습니다.

먼저 글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하나씩 담아서 전달하였습니다.

 

<송광사 영산전 부처님>

 

 

3. 마음을 닦으라

 

<수심결>에서 그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첫째, 자신이 바로 부처님을 알라.

자신이 부처와 같은 지혜의 성품을 가지고 있슴을 알라. 

이를 금방 깨달아야 한다.

둘째, 이를 깨달았다라도 예전부터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던

습관의 찌꺼기가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선정과 지혜로서 쉬지 않고 연달아 닦아야 한다."

 

첫번째 가르침은 돈오점수,

두번째 가르침은 정혜쌍수로 요약됩니다.

이 두가지가 그의 수행관의 요지였습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이다....

선정과 지혜를 다같이 공부하여 만행을 닦으면

어찌 헛되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어리석은 선객과

글만을 찾아 헤매는 미친 혜자(慧者)에 비유하리오."

 

여기서는 글만을 찾아 헤메는 미친 혜자(교종)와

참선만을 고집하는 백치같은 선객(선종)이란 명구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변증법적 "부정"과 "부정"의 논리를 통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지눌은 진심(眞心)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진심은 우주의 본체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인과 관계를 초월하여

시간을 관통하여 퍼지지 않는 공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모체는 태어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있지도 없지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것도 아니며

 아주 맑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연계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 전부가

우리의 진심으로부터 나온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지눌은 이러한 진심 개념에 입각하여 여러 교리를 분석하고 비판하였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보살이나, 여래, 불성, 진여 따위는

진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교종에서 세우는 신비적 관점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불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파하였다.

 

"불성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사람은 마음을 잘 닦으면 누구나 불성을 갖출 수 있고 극락에 갈 수 있다.

이것은 너희 몸 안에 있는데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너희가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른 줄 알고 추위와 더위를 느끼고

성내고 즐거워 하는 것이 바로 불성이고 본래의 모습이다."

 

부처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한다는 교종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이 존귀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인간 평등의 이론을 근원적으로 설파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종의 중심세력은 주로 부처님께 공양하여 복을 빌게 하고 재물을 시주하면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떠들며 재산을 불리고 권력에 빌붙으니

그들은 이러한 이론은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교리를 왜곡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어 "부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였습니다.

 

"부처란 마음이다.

마음은 사람 몸 속에 있다.

사람은 오래 미혹되어 있어서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는다.

이렇게 되면 티끌만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꺼내고 몸을 찔러 경을 베낀다고 하더라도, 

밤을 지새우고 밥을 굶으면서 그 많은 대장경을 읽거나

여러 가지 고행을 한다고 해도

이는 모래알을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헛된 수고일 뿐이다."

 

 

즉, 부처님을 신앙의 우상에서

인간 속으로 끌어내리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처와 인간을 일치시켜 대중들에게 파고 드는 처방이었습니다.

그는 기발한 문구와 쉬운 비유를 들어 어려운 이론을 풀어나갔고

직감을 통한 엉뚱하다 싶을 정도의 언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지눌 스님은 '진심'이라는 논리로 불교계의 당면 비리를 타개하고

이를 대중에게 확산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정혜쌍수를 주장하였으나,

선종에 좀 더 가까운 이론을 펼쳐 궁극적인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습니다.

 

<송광사>

 

4. 수선사

 

그는 불교계의 누적된 모순과 비리를 자각하고

그 첫단계에서 이를 반성하고 비판하였으며

다음 단계에서는 이를 뜯어고쳐 새로운 기풍을 세우려는 실천 운동을 펼쳤습니다.

 

지눌 스님에게 몰려온 결사 운동의 주체들은

이런 그의 개혁 운동에 열성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이제 길상사는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로 길이 메워질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결사에는 교종과 선종, 승속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팽개치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뜻을 합해서 무리를 지어오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당시의 무신 정권의 권력자 최충헌은

이러한 지눌 스님의 결사에 주목했습니다. 

 

최충헌의 집권기에 무신 강압 정치에 눌려온

교종 승려들은 기회를 엿보아 반격에 나서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최충헌은 불교 세력과 함게 할 정치적 필요성을 느꼈으나,

교종 세력과는 화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산에서 수행에 전념하며 정치 세력으로 도전하지 않는 선종 세력에 관심을 두었고,

이러한 측면에서 지눌의 결사에 대해서 호감을 가졌습니다.

 

1204년 최충헌은 이 결사 운동을 공인하여

<수선사(修禪社)>라는 결사의 명칭을 쓴 액자를 내렸습니다.

 

"선(禪)"이란 글자는 이 결사가

선 사상을 중심으로 운동을 벌인다는 뜻이고,

"사(社)"를 절 사(寺) 자를 쓰지 않은 것은

기존의 절과 구분하여 승속이 모두 함께 참여한다는 뜻을 나타닙니다.

 

이 글씨는 새로 왕이 된 희종이 썼습니다.

최충헌은 이러한 수선사를 이용한 불교 세력의 개편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눌 스님은 결사운동을 지도하다가 1211년 법상에서

주장자를 짚고 설법하다가 그 자세대로 열반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3세였습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지눌 스님은 뒷날 조계종의 개조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불교가 세속적 이익과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실천 수행에 전념하는 결사를 세우려 하였으며,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라는 독창적인 사상 체계로

선종과 교종의 무익한 논란을 종식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지눌은 <계초심학입문>,<수심결>,<진심직설>,

<간화결화론><화엄론절요> 등 9종류의 저술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과 <화엄경>,

그리고 선의 전통을 세운 <육조단경>과 <대혜어록>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보조 국사 지눌의 선불교는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