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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35)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1) - 돈오점수

by 아미타온 2024. 6. 26.

<불교인물사(35)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1) -  돈오점수>

 

<십우도(1) :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다>

 

<정혜결사문4>

 

 4. 단박의 깨침과 점차로 닦음

 

<십우도(2) - 소를 발견하다>

(1) 쉽게 부처님의 경지에 오를수 있는가?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단지 깨어 있음과 고요함만으로

산란한 생각과 정신의 혼미함을 다스려서

마침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마치 물거품을 바다로 아는 것과 같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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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을 보면 보살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의

수많은 단계를 거쳐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고 합니다.

유식에서도 5위 수행을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시간 동안의

수행을 통해서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이렇게 길고도 험난한 길인데,

깨어있슴(지혜)과 고요함(선정)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부처의 경지를 이를 수 있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다는 반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정혜의 수행을 통해 마음의 성품를 봄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는 선가의 주장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우도(3) - 소를 길들이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돈종(頓宗)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이해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항상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으므로

만행을 함께 닦아도 오직 무념으로 일관하고 무위로 근본을 삼습니다.

본성과 수행이 어우러져서 진리와 실천을 함께 통달하는 것이므로

수행의 길로서 이보다 더 지름길은 없습니다.

 

오직 뜻을 세우고 마음을 닦아서

삶과 죽음(생사)의 질곡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인데,

어찌 개념과 이론에 얽매여 논란하면서 수행에 장애를 일으키겠습니까?

 

생각을 떠난 마음의 본체를 알게 되면 곧바로 부처님의 지혜와 같아질 것인즉

어찌 삼현(십주, 십행, 십회향의 단계)과 십성(십지와 같은 단계)의 지위가 있는 

점차적인 가르침(교종)을 말하겠습니까?(....)

 

<원각수증의(圓覺修證儀)>에서는

“단번에 깨닫는 가르침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지위가 없으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진리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중국 선종의 제 4대 조사인 도신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무릇 온갖 삼매와 끝없는 묘한 진리가 모두 네 마음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명심하십시오.

자신의 마음이 모든 법을 다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성인의 가르침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다른 것은

중생의 기질과 능력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마음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말과 문자의 뜻만 고집하고

스스로 비굴한 마음을 내어서

삼아승지겁 동안 닦아서 점차 지위를 높여 가겠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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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4) - 소를 얻다>

(2) 달마와 혜가의 이야기

 

유명한 달마 대사와 그의 법을 이은 2조 혜가와의 대화가 있습니다.

 

혜가가 달마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의 마음이 괴로워 미치겠습니다."

 

이러한 혜가를 향해 달마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테니

그 괴로운 마음을 이리 꺼내 놓아 보아라."

 

한참을 고민하던 혜가는 말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꺼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달마는 말했습니다.

 

"꺼내 놓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내가 지금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노라."

 

이 말을 듣는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혜가의 마음이 왜 괴로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해도 진전이 없어서 괴로웠는지,

세속에 있을때의 죄의식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는지...

 

그러나, 출가하여 공부를 했는데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괴로워서

스승인 달마에게 솔직히 토로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달마가 내린 처방은

"그 괴로운 마음을 이리 꺼내 놓아라." 입니다.

 

스승 달마의 말씀은 괴롭다고만 하지 말고,

너의 마음을 깊이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괴롭다,괴롭다 하면서 괴로움에만 집착하고 있던 혜가가

그 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의 구조와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혜가가 발견한 자신의 마음의 구조와 속성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내 마음의 본래 면목은 

푸른 하늘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푸른 하늘에 구름이 일면 어두워지고,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이 드러나는 것처럼

공부에 대한 조바심이든, 잘못에 대한 죄의식이든 

나를 괴롭게 하는 그러한 것들은 다 구름 같은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이

내 마음의 진면목이 구름 같은 번뇌가

아니라는 것을 확고히 인식하고

구름 같은 버뇌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개념 탑재를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십우도(5) - 소를 타고 집에 돌아오다>

(3) 견성

 

이렇게 개념 탑재가 확고하여

번민이 없고, 갈등이 없이 납득한 것을 

선종에서는 "성품을 보았다(見性)"라고 하고,

"깨달음(成佛)"이라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성품은 텅빈 하늘과 같은 것은데,

이러한 마음에 갈망과 집착으로

생각과 감정이라는 구름으로 가득하면 어두운 것이고,

이러한 갈망과 집착을 버리고 텅빈 하늘과 같은 마음의

본래 성품을 회복한다면 그것이 마음의 성품을 본 견성인 것입니다.

 

"마음에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단박에 깨달을수 있다(돈오)"는 것은 이러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눌의 수행관의 핵심은 이러한 마음의 성품을 보라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환경이나 인연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구름 같은

무상한 생각이나 감정은 참된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구름이 걷혔을 때 드러나는 맑고 푸른 마음의 진면목이 

부처님의 성품이니 그것을 보고 찾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 탑재가 확고한 사람은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으므로(선정과 지혜가 함께 따르므로)

현실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갈망과 집착에 따라

마음이 왔다리 갔다리 하지 않는 무념과 무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부처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처를 경전의 말이나 글귀에 얽매여 찾지 말고,

너 자신의 마음을 보라는 것이 지눌이 주장입니다. 

 

"본성(悟)과 수행(修)이 어울어져

진리와 실천이 함께 하는 것"은

"돈오점수"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우도>를 보면 소를 봄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의 등에 올라타 세상으로 돌아와 실천과 구현을 통해

더욱더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확장해가며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갑니다.

 

자신이 인식하고 납득한 진리(悟)를 바탕으로 꾸준한 실천(修)을 통해

그 진리에 대한 인식을 더욱 깊고 넓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각성과 실천이 함께 하여 자신이 얻은 결실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 말과 글에만 얽매여 서로 싸우는 것에 과연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수억겁의 생을 닦은 후에 부처를 이룬다고 자신은 퇴굴심을 내는 것은

마음법을 닦는 사람들이 행할 바가 아니라는 것으로 지눌 스님은

자신의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