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물사(34)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0) - 참선>
<정혜결사문3>
3. 참선 수행법
(1) 선정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먼
저 자신의 깨끗한 본성,
즉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믿고 이해해서
그 본성에 의지해 선정을 닦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정을 닦는 수행자들이 신통한 지혜를
드러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날 참선하는 스님들 중에서도
한소식을 했다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선종의 많은 승려들이 열심히 참선을 하고 있으나,
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그렇게 없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선종의 많은 승려들이 참선을 통해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고는 하는데,
부처님과 같은 신통한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는 결과를
본 사람은 왜 그렇게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 신통한 지혜
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신통한 지혜는
1) 부처님의 마음과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에서 출발해서
2) 많은 수행을 거쳐야 얻을 수 있습니다.
거울을 닦는 것에 비유한다면,
때가 조금씩 닦이면서 점차 밝아지고,
밝음이 드러나면서 여러 가지 모습이 표면에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진리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바르지 못하고 노력도 없이
꾸벅꾸벅 졸거나 그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으로
참선을 삼는다면 어찌 신통한 지혜가 생겨나겠습니까?”
지눌 스님의 답변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꾸벅꾸벅 졸거나 그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이
어찌 선정을 닦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정을 닦고 있는데,
거기서 무슨 신통한 지혜가 생기겠느냐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통한 지혜는
1) 부처님의 마음과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이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하고
2)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닦고
지혜를 기르는 공부와 수행이 함께 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한 순간에 번뜩 깨달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신)과 이해(해)와 실천(행)과 증득(증)의 과정을 통해
마치 거울을 닦으면 때가 조금씩 밝아지듯 밝음이 드러나며
여러가지 모습이 비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3) 참선병
누군가가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참된 본성이
본래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마음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인데,
왜 구태여 관조하고 통제하는 것입니까?”
이에 내가 대답했습니다.
“말법(末法) 시대에는 사람들이
얕은 지혜만 늘어서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각을 드러냈다 하면 거짓을 일삼고
말을 해도 분수에 넘치거나 과장되고
견해는 편협해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어긋납니다.
최근 선을 공부하는 무리들이 이러한 병에 빠져서 말합니다.
‘내 마음은 본래 깨끗해서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데 어찌 고생스럽게 수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마치 자신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듯
행세하며 참된 수행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대로
계율을 무시하고 막행막식하는 것으로
도를 성취했다고 떠드는 사기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그냥 자유롭게 자기 마음끌리는대로
사는 것을 무애적 삶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절에 가면 "십우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소에 비유하여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길들이는 과정을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마구 날뛰는 마음, 아직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상태라서
마음의 소를 길들여야 하는 사람이
마치 소에 편안히 앉아 피리를 부르며 돌아오는 사람마냥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막행막식이 될 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막행막식이 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을 절제할수 있고 법에 대한 눈을 뜬 사람입니다.
갈망과 집착을 고삐로 다잡은 사람,
인연을 바르게 볼 줄 아는 사람,
아는 것(법)과 행동하는 것(마음)이 일치하는 사람만이
어디에도 걸림없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아직 나아가야 하고 닦아야 할 단계의 사람은
나아가고 닦기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할 뿐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단계인지도 모르고,
마치 성취한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고통을 안겨줄 뿐입니다.
(4) 교종
또 어떤 사람들은 교종(敎宗)에서
그때그때에 알맞게 가르친 내용에 집착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면서 굳이 점수(漸修)의 길을 택합니다.
이들은 먼저 들은 교종의 말에 얽매여 있으니
마치 금을 버리고 지푸라기를 가지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만나서 설명을 해 주어도
끝내 믿지 않고 오히려 의혹을 품고 비방만 할 뿐입니다.
헛똑똑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아는 것은 많고 생각은 많은데,
실천 수행을 통해 얻은 것이 없는 사람들을 경계한 말입니다.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집착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법을 증득하기 위한 실천 수행을 통해 자신의 지혜로 얻은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 정혜쌍수
다시 말하거니와
먼저 본래 마음의 본성이 깨끗하고 번뇌가 공허하다는 것을
1) 믿고 2) 이해한 뒤에 이를 바탕으로 거듭 3) 수행하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밖으로 계율과 법도를 지키되 집착하지는 말고,
안으로 생각을 고요히 하되 억압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끊어도 끊는다는 생각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는다는 자의식이 없이 닦는 것이 제대로 끊고 닦는 것입니다.
선을 닦는 것이 마음의 본성을 밝히는 가장 가깝고 절실한 방법입니다.
만일 뜻을 세워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갈 때나 설 때,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
말할 때나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때를 막론하고
항상 생각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가지가지 공덕과 신통력, 광명이
다 그 가운데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도를 구하면서도 마음의 본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만 믿고
안이하게 수행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혜(定慧)에 힘써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익진기(翼眞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定)과 혜(慧)라는 두 글자는 삼학(三學)의 일부를 가리킨 것인데,
전체를 말하면 계·정·혜(戒·定·慧)다.
계(戒)는 잘못을 막고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삼악도(지옥, 아귀,축생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정(定)은 진리를 근거로 하여 산란한 마음을 평정한다는 뜻으로
여섯 가지 욕망을 초월하게 하며,
혜(慧)는 사물의 공한 성품인 공성(空性)을 관찰한다는 의미이니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번뇌를 끊은 뒤 보살행을 할 때
배우는 것이므로 삼학이라고 한다.”
"밖으로 계율과 법도를 지키되 집착하지 않고,
안으로 생각을 고요히 하되 억압함이 없어야 한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밖으로 계율과 법도를 지키되,
왜 계율과 법도를 지키는지를 잊어버린다면
즉,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수단에만 집착하는 잘못을 범할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만
이와 같은 수단에 집착하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탈이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얽어매는 모든 구속과 습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해방은 즐거움이고 통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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