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5) - 관무량수경과 죄업 중생의 구원>
1. 관무량수경과 왕사성의 비극
정토삼부경 중에 <관무량수경>이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은 인도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어
중국에서 제작된 위경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토종파에서 가장 존숭되는 세 경전 중의 하나입니다.
<관무량수경>은 왕사성에서 일어났던
한 비극적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주인공은 재가자인 '위제희 부인'이라는 왕비입니다.
그녀의 아들인 아사세 왕은
아버지 빔비사라 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감옥에 유폐시켜 굶어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빔비사라왕을 도우려 했던 어머니
위제희 왕비까지 골방에 감금시켜 버렸습니다.
자식에 의해 남편을 잃은 고통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위제희 부인은 영취산에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세상에 대한 염리와 함께
고통 없는 세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원을
부처님께 호소합니다.
이에 부응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부처님은 신통의 힘으로 위제희 부인에게
수많은 불국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위제희 부인은 수많은 불국토 중에서
아미타 부처님의 서방 정토가 가장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후세의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길을 여쭈어 봅니다.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아홉 부류로 나누어 극락 왕생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상품의 세 부류,
둘째는,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중품의 세 부류,
셋째는, 악에 물들어 크고 작은 죄업 속에 살아가는 하품의 세 부류.
2. 자식을 얻기 위해 악업을 행한 위제희 부인
일설에 의하면 자식이 없었던
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부인은 아주 초조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수행자가 수행을 마치고
3년 후에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아들을 빨리 얻고 싶은 욕심에
그 수행자를 살해하는 큰 죄업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아사세 왕자이며,
위제희 부인의 괴로움은 수행자를 죽인 죄업의 과보라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은 '16관법'과 '염불'의 가치를 설하고 있어서
정토교의 수행 체계를 정립한 중요한 경전입니다.
'왕사성의 비극'이라는 <관무량수경>의
비극적 스토리는 어떤 가르침을 펼치고 있을까요?
부모와 자식이 증오하고 다투는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위제희 부인'으로 대표되는 오탁 악세의 중생들까지도
자비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구제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관무량수경>이 제시하는 가르침의 본의라고 생각합니다.
3. 죄(罪)와 고(苦)
대학 다닐 때 'CBA(Campus Berea Academy)’'라는
기독교 선교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동아리에 과 선배가 한명 있었습니다.
선배는 저를 찾아와 적극적인 선교를 했습니다.
그 때 '원죄(原罪)'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인류는 죄악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 인류의 죄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했으니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원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니?
나는 기독교적 공부나 지식이 없어서
그 때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4. 혹- 업- 고
대학 불교학생회를 통해 불교와 만났을 때
불교는 '죄(罪)'라는 개념보다 '고(苦)'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인생이 고(苦)'라는 가르침은 잘 납득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대학 들어가면 행복한 삶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여러 모로 괴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등등
가치관의 혼란 때문에 아주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 시기에 불교를 만났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苦)'라는 개념이 잘 납득이 되었습니다.
특히, 코끼리에 쫓겨 우물 속에 들어간 남자의
'안수정등'의 비유는 정말 절묘한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해탈하지 않으면 '생사고뇌' 속에서
윤회의 우물과 바다 속을 헤매며 살아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된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정토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고'와 함께 '죄'를 생각합니다.
불교의 '죄'는 기독교의 '원죄'의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중생들은 뿌리 깊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잘못된 악을 저지르고
악업(죄업)의 과보로 고통스런 윤회 속에 살아간다는 개념입니다.
즉, 혹(惑)-업(業)-고(苦),
미혹해서 죄업을 저지르고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아담의 원죄로
죄악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메타포적으로 바라보면
'혹-업-고' 의 불교적 가르침과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5. 솔직함
제가 정토의 가르침은
자신과 세상의 '고'와 '죄'를 진지하고 솔직하게 바라봅니다.
특히, 일본의 정토 조사인 신란 스님은
스스로를 '죄악 심중(深重)의 중생'이라고 진지하게 바라보며
아미타 부처님 앞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솔직함을 보며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고와 죄의 바다 속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동행(同行)'으로 바라보고
이들에 대한 따스한 사랑 속에 극락왕생의 길을 전법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고'와 '죄'의 죄악심중의 중생이지만,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과 성불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에 의지해서 반드시 극락 왕생하여
성불도의 불법의 길을 가고야 말겠다는 절실함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정토 불교는 <관무량수경>의 '왕사성의 비극'을 통해
자신과 세상의 '고'와 '죄'를 바라보았던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의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그 솔직함이 있기 때문에
이런 중생들에게 절대적인 자비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에
깊은 공경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고'와 '죄'의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아미타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 귀의의 길을 통해
반드시 극락에 왕생하여 진실된 불법의 길을 가려는 절실함을 가져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의 정토 신앙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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