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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53) - 인도의 전륜성왕 아쇼카 대왕(3) - 다르마에 의한 통치

by 아미타온 2024. 9. 13.

<불교 인물사(53) - 인도의 전륜성왕 아쇼카 대왕(3) -  다르마에 의한 통치>

 

< 인도 델리 박물관의 아쇼카왕의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적은 비문 >

 

 

1. 다르마(법)에 의한 통치

 

칼링가 전투에서 전쟁의 참혹한 참상을 보고 

아쇼카 대왕은 새롭게 발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심 후의 아쇼카 대왕은 무력에 의한 정복 대신

바른 통치 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자각했습니다.

 

칼링가 국을 멸망시킨 후 남인도 일부만 더 정복하면

인도 전역을 손쉽게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쇼카 대왕은 더 이상 무력으로 생명을 살상하는 전쟁과

전쟁에 따르는 참상을 혐오하며 정복과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웰즈"라는 역사학자는 이와 같은 아쇼카 대와을

승리를 거둔 후에 전쟁을 포기한 역사상 유일한 군주라고 칭송하였습니다. 

 

<다르마(법)를 상징하는 법륜을 가지고 있는 4마리 사자상>

 

2. 다르마에 의한 정복자

 

정치는 다스리는 나라의 영토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다스림을 펼쳐 나갈 것인가 하는 통치 철학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고 지도자가 바른 통치 철학에 기초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 국민들을 전쟁의 참화 속에 내몬다면 국민들은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억압과 폭력, 거짓과 속임수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은 전쟁의 참화 후에 이러한 제왕의 통치 철학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통감하였을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분열돠어

약육강식의 전쟁의 참화 속에서 수백년간을 살아왔던 인도 대륙에서

통일 제국을 이룬 상황에서 어떠한 통치 철학으로 백성들을 다스려나갈 것인가?

 

이것이 아쇼카 대왕의 화두였던 것입니다.

 

그는 고민 끝에 "다르마(Dharma,바른 법)에 의한 통치"를 선언합니다.

 

"참되고 유일한 정복이란 자아의 극복이며,

다르마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아르타 샤스트라>라는 마우리아 왕조의 정치서에는

정복자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탐욕스러운 정복자,

둘째는, '흉폭한 정복자,

셋째가, '다르마에 의한 정복자' 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정복이야말로

만인이 마음으로부터 귀의할 수 있는 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 바이살리의 아쇼카 석주>

 

3. 다르마와 아쇼카 석주

 

그렇다면 '다르마(법)'는 무엇일까요?

 

'다르마'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만민에게 보편타당한 진리(법)를 말합니다. 

 

탐욕스런 갈취나 흉폭한 무력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만민들이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법)에 기초하여

사람들이 마음으로 귀의할 수 있는 다르마에 의한 정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쇼카왕의 통치 철학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강압이나 무력이 아니라,

다르마(바른 법)에 의한 통치를 국민들에게 널리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관리나 지도층 사람들에게

이러한 다르마에 대한 왕의 통치 철학의 준수를 명령하기 위해

나라의 주요 도시에 인접해 있는 교통의 요지나 종교상의 성지 등에

큰 비문과 석주를 세워서 왕의 통치 철학을 공포하였습니다.

 

아쇼카 대왕의 비문과 석주는 현재 약 50기 정도가 발견되었습니다.

 

비문이 발견된 장소를 더듬어 보면

동쪽으로는 벵갈에서 오릿사(칼링가), 남쪽으로는 마이소르 북부,

서쪽으로는 봄베이 북방 약 60km와 카티야와르 반도,

북서쪽에서는 파키스탄 페샤와르 부근에 이르고 있습니다.

 

즉, 남인도를 제외한 전 마우리아 왕조의 전역에

이와 같은 다르마에 의한 정치를 새긴

비문과 석주가 수백개가 넘게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아쇼카 대왕의 왕권이 강대하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이 건설한 석주는 보통 길이는 12~15m,

지름은 평균 80cm나 됩니다.

 

이들 석주는 모두 사암의 석재로써

미르자푸르 지방의 채석장에서 수백 km 떨어진 먼 곳까지 운반되었습니다.

 

이를 세우기 위해 동원된 노동력과 뛰어난 석조기술이 조직적으로

대규모 이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아쇼카 대왕의 중앙 정부의 권력이 강대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쇼카 대왕은 자신의 통치 철학을

국민들에게 제왕답게 표현하고자 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통치 철학을 자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제왕답게 자존감이 있게 표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다스림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국민들에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통치 철학을 반석 위에 탄탄하게 올려 놓기 위한

백성들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자각한 행위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