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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56) - 인도의 전륜성왕 아쇼카 대왕(6) - 불교 포교

by 아미타온 2024. 9. 26.

<불교 인물사(56) - 인도의 전륜성왕 아쇼카 대왕(6) -  불교 포교>

 

<초전법륜지 녹야원의 다멕 스투파(불탑)>

 

 

아쇼카 대왕은 불교에 귀의하고 불교의 전파를 위해 크게 노력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00년이 지난 이후

불교가 전세계로 전파되어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아쇼카 대왕의 적극적인 포교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아쇼카 대왕의 불교 귀의와

불교 포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인도 불상>

 

 

1. 불교 귀의와 불탑 조성

 

아쇼카 대왕은 왕에 즉위하고 얼마 후에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소(小)마애 법칙 제1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습니다.

 

 “나(아쇼카 대왕)는 2년 여에 걸쳐 우바새(upasaka,남자 재가 신도)였지만,

다음 1년 동안 나는 불교 승가에 가서 열심히 노력했다.”

 

왕은 불교 귀의 후 최초 2년간은 별로 열성적이지 않았지만,

그 이후 1년간은 불교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지고

승가와 가까이 하여 열심히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마애 법칙 제8장에는 왕이 즉위 10년에

‘삼보리(깨달음)’를 얻었음이 적혀져 있습니다.

 

아쇼카 왕의 즉위 8년차에 칼링가 전쟁이 일어났으며,

칼링가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발심하고

더욱 열심히 수행에 전념한 끝에 각성(깨달음)을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성을 통해 왕은 불법에 기초한 자비와 정법을 구현하는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결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은 먼저 전쟁 후 칼링가 지방을 특별주로 삼아

왕자를 주재시키고 주민들에게 각별히 사랑을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쇼카 대왕은 본래 10개의 스투파에 봉안되었던 부처님의 유골을 분배하여

인도 전역에 스투파 8만 4천개를 다시 만들어 거기에다 나누어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

 

그리고, 스승인 우파굽타의 권유로 룸비니,붓다가야를 비롯한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보존에도 힘써 각지에 절과 탑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의 왕들은 여행이나 사냥 따위의 오락을 일삼는 것이 관례였지만,

아쇼카 대왕은 이러한 관습을 없애고 대신 부처님의 사적지인 법의 순행을 행하는 것을

더 없는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아쇼카 대왕이 불법에 귀의한 증거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니갈리사가르’ 석주 법칙에는

즉위 14년이 지나 코나카마나 불탑을 세우고 친히 공양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룸비니’ 석주 법칙에는 왕이 즉위 20년이 지나

부처님의 탄생지를 방문하고 친히 공양한 사실이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룸비니에 석주를 세우게 하고

이 땅의 세금을 경감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바이라트 법치’에는 왕이 불교의 승가에 경례하고 

몸소 삼보에 공경과 신심을 바친다는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설한 법은 모두가 선설(善設)이지만,

특히, 다음의 법문(dharmaparyaya)은

정법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데 유용한 것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법이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

사부대중이 이 법문을 종종 경애하고 사유할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산치,사르나트,코삼비 등의 법칙에는

승가의 분열을 훈계하는 문구가 적혀져 있으며,

파승을 꾀하는 비구,비구니는 흰 옷을 입혀 환속시켜야 한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쇼카왕은 불교에 귀의하고 수행하였으며

불법을 널리 펴려는 적극적인 포교 의지를 가졌슴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불교 교단에

크샤트리아(왕족)와 바이샤(장자) 계급들이 많이 귀의했습니다.

 

브라만 위주의 계급적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는 평등적 가치관과

신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존 브라만교의 제사주의와 권위주의에 반발을 느끼던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에는 크게 어필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불교의 평등성, 합리성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민족을 포함한 복합국가의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에도

불교의 이러한 평등한 가치관과 이성적인 다르마(법)가

구체적인 정치를 펼침에 있어서 효용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아쇼카 대왕은 많은 불탑을 세워 불교의 확산에 힘썼습니다.

아쇼카 대왕이 후세의 불교인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성지 보존입니다.

 

특히, 4대 성지를 포함한 부처님의 사적지에 불탑을 세우고

석주를 세워 불교인들의 순례를 장려함으로써

후대의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채취가 남아있는 성지 순례를 통해

신앙심과 종교열을 일으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탑 조각>

 

2. 3차 결집

 

아쇼카 대왕의 불교 포교와 관련한 중요한 치적으로는

3차 결집과 전 세계에 전도사의 파견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3차 결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사후 제자들에 의하여

여러 형태로 전해지자 이를 정리하고자 이미 2차에 걸친 결집이 있었습니다.

 

아쇼타 대왕 당시에 불교는 왕의 귀의와 

귀족, 장자들의 보시로 사찰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왔습니다.

 

이 때문에 외도들이 불교 사찰 내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삿된 견해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여 교단의 분열과 불법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아울러 불교 내에서도 각 부파에서 여러가지 교리상의 문제나

실천 수행의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 와중에 아쇼카 대왕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수도인 파트나에서 '목갈리풋타'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1,0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인 파트나에 모여 '3차 결집'이 일어났습니다.

 

불교 내에 침투한 외도들의 이단적이고 비불교적인 요소들을 추방하고

부파 불교의 논장들을 정리해서 이러한 사상적 혼란을 없애고

부처님의 원음을 되살리기 위한 3차 결집을 9개월간 행했습니다.

 

이 때부터 경,율,론 이라는 3장의 경전 결집이 이루어지고,

경전이 당시 마가다 국의 방언인 "팔리어"라는 문자로 기록되어 

남방(상좌부) 불교의 경전으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자로 기록된 불교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3차 결집은 승가의 '정풍 운동'과 '논장 결집'이라는

2가지 목적에서 행한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 당시 불교 교단에 대한 보시가 많이 행해짐에 따라 

많은 이교도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 불교 교단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7년간 계율에 대한 참회 의식인 포살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불교 교단이 부패와 혼란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쇼카 대왕은 '목갈리풋타 스님'을 중심으로 승려 정풍 운동과 함께

불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결집을 하도록 지시했던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의 세계 불교 전파>

 

3. 적극적인 전세계 불교 포교

 

한편, 아쇼카 대왕은 유능한 관리를

법대관(法大官)으로 임명하여 법에 대한 정치를 홍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 사절단과 전도사를 보내어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평화 친선을 전하며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아쇼카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남인도에도

법의 교화가 미치도록 힘쓰는 동시에,

그리스의 모든 왕들에게 사절을 보내서

선을 꾀하고 ‘불법’을 펴기 위한 협조를 구하였습니다.

 

아쇼카 대왕은 정복 전쟁보다 ‘법에 의한 승리’를 위해

포교 사절을 간다라, 카슈미르, 데칸 등지로,

그리고 멀리 서쪽으로는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방면까지, 

동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버마까지 보내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를 포교승을 보내,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가 상좌부(소승) 불교의 중심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종파는 아쇼카 왕의 포교와 더불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주로 동남 아시아 방면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법을 선포하고 불교를 포교함으로써 

아쇼카 대왕은 ‘담마 아쇼카(호법왕 아쇼카)’로 칭송되었습니다.

 

아쇼카 대왕의 이러한 노력은 불교를

세계 종교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쇼카 대왕은 불교사에 있어 최초의 위대한 포교자였으며,

법에 의한 조직적인 포교를 목표로 유능한 관리와 전도사를 

요소에 배치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입니다.

 

<갠지스강에 목욕하는 힌두교도들>

 

4. 타 종교에 대한 관용

 

스스로 불교도가 된 아쇼카 왕의 불교 보호는

중앙집권적인 통일대제국의 성립과 아울러

이후의 불교 교단 발전에 직접적인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쇼카 대왕이 다른 종교를 억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쇼카 대왕도 각 종파를 평등하게 취급하고,

모든 종파의 건전한 육성과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아쇼카 왕은 마땅히 그렇게 함으로써

법(dharma)에 의한 정치가 보다 완전하게 수행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각 종파마다 법대관(法大官)을 임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널리 브라만의 사문을 공경했으며,

그들을 방문하고 보시를 했습니다.

 

마애법칙 제12장에는 ‘왕은 보시와 갖가지 공양으로써

출가와 재가의 모든 종파를 공양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아쇼카 대왕이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종교가 서로 화목하고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석주에 기록된 이러한 기록 중

현재 남아 있는 유명한 글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아쇼카 왕)는 모든 종교의 교인들,

그들이 수도인이든 평신도이든, 모두를 한결같은 존경심으로 존경하노라

....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 다를 수 있으므로

...

자기 자신의 종교는 자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하리

....

자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하하는 것은,

그것이 맹목적인 충성에서 나온 것이든

자기 자신의 종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자기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욱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이다.

 

조화가 최선이라.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기울여 존경하도록 할지라

....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되리."

(제12 석주 비문)


아쇼카 대왕은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귀의했고,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성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면서

타종교에 대해서도 억압하지 않고 관용적으로 함께 보호했습니다.

 

아쇼카 대왕이 위대한 이유는 이러한 종교적 관용성에 있습니다.

 

인도에서 이슬람의 불교, 힌두교 파괴에서 볼 수 있듯

정치적인 힘과 야만성으로 자신의 종교 이외에 타종교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행위에 비하면 참으로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