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57) - 인도 신불교의 아버지 암베드카르(2) - 청년 시절

by 아미타온 2024. 10. 8.

<불교 인물사(57) - 인도 신불교의 아버지 암베드카르(2) - 청년 시절>

 

<인도의 암베드카르 동상>

 

1. 탄생과 어린 시절

 

암베드카르는 1891년 4월 14일,

인도 동부의 마하라 시트라 주의 작은 마을인

암바바데에서 불가촉 천민인 마하르 족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람지는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주둔

영국 동인도회사의 육군에 입대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버지는 불가촉천민임에도

항상 학자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군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가 왔을 때

열심히 공부하여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아버지는 푸나의 육군 확교에서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군일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14년 동안

육군 학교 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소령으로 예편하였습니다.

 

암베드카르의 어머니인 비마바이 역시

아버지가 육군 소령 출신으로 군인 집안이었습니다.

 

암베드카르의 어릴 때 이름은 "브힘 라오"였습니다.

그들 부모에게는 14번째 아기였습니다.

 

14 형제 중에 막내 아들이었던 암베드카르는 막

내로서 식구들의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4명의 형제 중 대부분은 어린 나이에 죽어

살아남은 아기는 겨우 다섯(3남 2녀)였다고 합니다.

 

1893년 암베드카르가 채 2살이 되기 전에,

그의 아버지 람지는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마하라 시트라 주의 다폴리 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매월 50루피의 연금으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에 브힘 라오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때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신분을 따지지 않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병 군인으로 들어가

육군 학교 교장까지 역임했지만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으로서 신분상의 멸시와 어려움을 어린 나이때부터 겪었습니다.

 

<암베드카르 박사>

 

2. 불가촉 천민으로서의 차별과 수모

 

초등 학교부터 무시와 수모를 밥먹듯 당했고,

심지어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근처에 마실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동 시설 사용이 불가촉 천민에게는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암베드카르와 그의 형은 집에서 가져온 삼베 자락을 깔고

교실 한구석에 앉아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교사는 부정 타는 것이 두려워

두 형제에게 질문을 하거나 그들의 공책에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산스크리트 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한 술 더 떠서

불가촉 천민에게 아예 글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암베드카르의 학교 동료들도 매몰차기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암베드카르는 그들과 어울릴 수도, 함께 놀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학교 친구들이 암베드카르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수학 선생이 암베드카르를 불러내어

칠판에 수학 문제를 하나 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들, 특히 상위 카스트 학생들이

암베드카르가 칠판에 손을 댄다면 그 칠판 뒤에

쌓아놓은 자신들의 도시락이 부정 탄다고 하며 목청을 드높였습니다.

 

암베드카르는 학생들이 도시락을 칠판 뒤에서 다 꺼집어 낸 다음에

칠판 뒤에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암베드카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가족은 당시 인도의 수도였던 봄베이로 옮겨가 

어느 싸구려 공동 주택에서 단칸 셋방 살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학온 고등학교에서도 온갖 차별과 수모는 계속 되었고, 

학교 밖에서도 이러한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형과 소가 끄는 수레차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불가촉천민임을 안 주인이 

자신의 수레차가 부정 탄다고 온갖 모욕을 받으며 쫒겨 났습니다.

 

그리고, 물을 구할 때마다 

웅덩이에 고인 더러운 물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꺼져!"하는 으름장을 놓기 십상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증오와 차별과 멸시의 체험은

암베드카르의 자존심을 만신창이로 만들면서

어릴 때부터 불가촉 천민이 겪는 모든 굴욕이

'불가촉"이라는 사회적 저주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불운을 안고 사는

수많은 민중들을 사회적 노예 제도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암베드카르는 공부에 무섭게 매진해 나갔습니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였고,

머리가 깨인 사람이었던 그의 아버지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이러한 아들의 공부를 거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암베드카르는 당시 전통에 따라

1906년 라마바이 라는 여인과 결혼을 올렸습니다.

 

<청년 시절 암베드카르>

 

3. 대학 합격과 유학

 

마침내 1907년, 암베드카르는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이 일은 불가촉 천민인 마자르 족에게는

대단한 경사로 여겨져 집안 사람들과

사회 개혁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축하 잔치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인 켈루스카 라는 사람이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책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부터 암베드카르는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치룬 암베드카르는

봄베이에서 엘핀스톤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암베드카르의 뛰어난 머리와 열정을 높이 샀던 켈루스카는 

당시 바로다 주지사에게 암베드카르를 소개했습니다.

 

바로다 주지사는 암베드카르에게

매월 25루피의 장학금을 지원해 주었고,

암베드카르는 그의 도움으로 1912년에

봄베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및 정치학 학사 학위를 따고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후 1913년 1월에는 바로다 주 육군 소위로 입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입대후 불과 15일만에

그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향하였으며

1913년 2월에는 어려운 살림에도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를 잃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한편, 암베드카르는 1913년 켈루스카의 도움으로

바로다 주지사의 학비 지원으로 불가촉 천민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뉴욕 주의 콜롬지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암베드카르는 하루 18시간 동안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전공인 경제학 외에

사회학, 철학, 역사학, 정치학, 인류학을 부전공으로 하여

열정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1915년 6월에 <고대 인도의 상업>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16년에 암베드카르는 콜롬비아 대학의 인류학 세미나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 그 구조의 기원 그리고 역사적 전개"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기원을 밝히고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피력하였습니다.

 

1916년 5월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런던 정치-경제학회"와 "영국 변호사 학회"에 가입하는 한편

경제학 박사와 변호사 자격 시험 공부에 열중하였습니다.

 

1917년 6월 암베드카르는

"인도에 지불해야 할 국가 배상금-역사적, 분석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의 공부는 여기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학 시절 암베드카르>

 

4. 귀국과 영국 재유학, 박사와 변호사 자격증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던 바로다 주지사가

장학금 지금 기간이 만료된 것을 이유로 그를 인도로 소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장학금 조건에는 바로다 주에서

10년간 봉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바로다 주지사 케익워드는 장차 암베드카르를

주 재무담당관으로 중용할 생각으로

먼저 암베드카르를 자신의 군사 담당 비서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암베드카르는 학식이 높고

주 행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슴에도 불구하고

단지 불가촉천민 신분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쏟아지는 냉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서류를 건네주는 대신 집어던지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이 사무실 카페트를 밟고 있다는 이유로

그 카페트를 모두 말아 제친 다음 출입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917년 11월 결국 깊은 환멸을 느낀 암베드카르는 사표를 내고

바로다를 떠나 봄베이로 돌아왔습니다.

 

봄베이로 돌아온 암베드카르는

거의 1년 동안을 잡동사니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경제지에

"인도 빈곤층의 영세한 재산 상태와 그 개선책"이라는 논문을 내고

인도의 열악한 농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가장 건전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918년 11월 암베드카르는

월급 140루피에 봄베이 시드넘 상경대 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배움의 전당인 이곳에서도

교수 휴게실에 놓인 주전자의 냉수조차 마실 수 없는 차별을 겪었습니다.

 

암베드카르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지만, 

항상 영국에서 마치지 못한 공부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저축하여 1920년 3월,

영국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하고 곧장 런던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에 그는 아내 라마바이와 외아들인 야시안트는 인도에 남겨두고

런던으로 건너가 다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1920년 9월, "런던 정치, 경제학회'와

"영국 변호사 협회'에 다시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1921년에 "영국령 인도에 있어서 중앙 재정의 지방 분권화"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인도 화폐 루피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으로

마침내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역시 영국 런던에서 변호사 자격 시험에도 합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