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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기행

풍류 기행(30) - 강진 백련사 동백숲과 백련결사

by 아미타온 2025. 2. 15.

<풍류 기행(30) - 강진 백련사 동백숲과 백련결사>

 

 

1. 동백과 홍매화

 

남도 강진의 백련사에 들렀습니다.

 

이른 봄에 피는 붉은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

 

천연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숲.

 

3,000여평의 숲 속에 수령 3~400년이 넘는 동백 나무가

약 1,500 그루 서 있는 우리 나라 최대의 동백나무 군락지입니다.

 

기름진 동백잎이 무성한 동백숲. 

 

따뜻한 남쪽 나라에 왔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백련사 입구 동백나무 숲에는

많은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이 피었습니다.

 

겨울에 핀 붉은 동백꽃처럼

계엄 사태 이후 힘든 우리 나라의

상황 속에도 올곧은 동백 꽃이 피면 좋겠습니다.

 

문화 해설사님이 말씀합니다.

 

동백 나무는

꽃이 3번이 핀다고.

 

한 번은 동백 나무에서,

또 한 번은 동백꽃이 떨어지는 땅에서,

또또 한 번은 그 동백꽃을 바라보는 우리들 마음 속에서.

 

3번 핀 동백 꽃을 제대로 볼려고 차분히 바라보았습니다.

 



동백 나무 숲을 지나  

다산초당 가는 산책길에는

백련사에서 재배하는 야생차 군락이 있습니다.

 

백련사가 있던 만덕산은

고려 시대 때부터 자생해온 야생차 밭이 있어

'다산(茶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강진에 유배온 정약용 선생은

'다산'이라는 호를 대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당시 백련사의 혜장 스님과

종교를 초월하여 벗이 되어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습니다.

 

두 분의 사귐의 꽃처럼

백련사 입구 만경루 앞에는

겨울의 고난을 이긴 홍매화가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2. 대웅보전과 원교 이광사 선생

 

백련사 경내로 올라왔습니다.

 

대웅보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아미타 부처님,

약사여래 부처님의

세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니 좋습니다.

 

 

 

대웅보전 편액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영조 때의 대학자 원교 이광사 선생의 글씨입니다.

 

원교 이광사 선생은 조선 영조 때

소론의 잘 나가던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원교 선생의 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소론이 실각함에 따라 원교 선생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원교가 50세 때인 1755(영조 31),

원교 선생은 소론 일파의 역모 사건과 연좌되어

부인은 자살하고 이곳 저곳 긴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완도의 부속 섬인 신지도에서 23년간 살다가

귀향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 원통함과 답답함과

쌓인 한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러나, 원교 선생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법화경>을 한역한 구마라집 법사가

기나긴 감금과 모욕의 세월에 무너지지 않고

불세출의 경전 번역 작업으로 불법의 꽃씨를 뿌렸듯이

원교 선생은 자신의 개인적 불행과 아픔과 쌓인 한을 녹이면서

글씨에 무섭게 매진해서 '원교체'라는 자신의 서체를 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원교 선생의 <대웅보전> 글씨를 보니

진한 슬픔이 배어 있는 듯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듯해서 마음을 잔잔하게 합니다.

 

나의 기호와는 상관 없이

원교 선생처럼 자신의 서체를 완성한 분의

인생과 공력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교 선생의 글씨 스승은

백하 윤순(尹淳) 선생이었습니다.

 

백하 윤순은 해남 윤씨입니다.

 

그는 녹우당의 주인이며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조카입니다.

 

윤순은 '동국진체'를 창시한 옥동 이서의 제자입니다.

옥동 이서는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 이익의 친형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했습니다.

 

조선 초기 송설체의 대가가 바로 안평 대군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 동진 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체가 유행했습니다.

왕희지체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한석봉입니다.

 

 

옥동 이서는 왕희지체를 기반으로

우리 혼을 담은 새로운 글씨체인 동국진체를 창안했습니다.

 

그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을 거쳐서

원교 이광사 대에 이르러 완성의 경지에 이릅니다.

 

원교의 스승인 백하 윤순은

원교의 글씨를 이렇게 칭찬했다고 합니다.

 

"원교의 글씨는 우리 나라

수천 년 이래 없던 바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마땅히 위진(魏晉)에 비길만하고

당(唐) 이후로는 견줄만한 것이 없다.”

 

스승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은 원교 선생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련사에서는

강진만 바다가

평화롭게 드러납니다. 

 

마치 호수 같은 바다라서

평화로움이 밀려옵니다.

 

 

 

3. 백련결사와 원묘국사 요세 스님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였습니다.

 

만덕사는 신라 문성왕때

무염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옵니다.

 

그 뒤 고려 희종 7

원묘 국사 요세 스님이 옛터를 중창하고

'백련 결사'로 크게 이름을 떨쳐 '백련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백련사는 무엇일까요?

 

백련은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의 연지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하얀 연꽃입니다.

 

하얀 연꽃같은 정토 행자가 되자는 원력을 가진

염불 행자들의 수행 모임을 '백련결사'라고 합니다.

 

원묘 국사 요세  스님을 중심으로 한

백련사 백련결사는 12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백련사는 고려 후기 여덟 분의 국사를 배출하며

크게 번창했습니다.

 

 

원묘국사 요세 스님 탑비입니다.

 

요세 스님은 경상도 합천 사람입니다.

합천에 있는 천태종 도량인 천락사에서 출가하여 공부했습니다.

 

그는 20대 중반에 당시 고려 수도 개경에 올라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승과에 합격하고 앞날이 촉망받는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려 불교의 부패한 모습에 실망하고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수행 결사 모임인 수선 결사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수행 노선 상의 차이로 인해 

요세 스님은 지눌 스님과 결별합니다.

 

지눌 스님이 좌선하는 참선파였다면

요세 스님은 신앙심이 강한 염불파였기 때문입니다.

 

천태종의 요세 스님은 남해 바다가 펼쳐진 강진에 내려와

강진 호족과 백성들의 도움 속에 백련 결사를 주창했습니다.

 

요세 스님은 정토 논서인

'관무량수경소'를 송나라 사명 지례 스님이 재해석한

'관무량수경소 묘종초'라는 책을 즐겁게 읽고 강의했습니다.

 

'묘종초(妙宗抄)'라도고 부르는 이 책은 

천태 교학과 천태 지관의 입장에서

극락 정토를 구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책입니다.

 

요세 스님은 '묘종초'에 나오는  

이 마음이 부처를 짓고,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네(是心作佛 是心是佛)”라는

구절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4. 불호념 불수념

 

요세 스님은 이 구절이

마음(신앙심)의 감응을 통해 부처와 중생이 만나는 지점,

즉,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의 소원이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원리를 밝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무엇일까요?

 

불보살님의 가피와 수호를 바라면서(불호념, 佛護念),

중생들이 불보살님을 생각하고 부르는(불수념, 佛受念),

불호념 불수념의 길이 바로 불교 신앙입니다.

 

요세 스님은

불호념과 불수념의 인연과 상응이

'이 마음(是心)'에서 이루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즉, '묘종초'에 나오는 이 마음(是心)”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불호념)에 상응하여

중생들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불호념 불수념의 장이라고 바라본 것입니다. 

 

요세 스님은 “이 마음(是心)"을 닦기 위해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보다

예불과 참회 수행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세 스님은 당신부터 앞장 서서

하루 12번, 53불에 대한 예경과 참회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세 스님은 참회를 많이 해서

'서 참회'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요세 스님의 속성이 서 씨였습니다.)

 

요세 스님이 이처럼  줄기차게 예불과 참회를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도하자

이에 감동한 많은 호족과 민중들이 운집하였습니다.

 

그래서, 백련결사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요세 스님은 하루 1번 법화경을 독송하고,

하루 12번 53불에 대한 예불과 참회 수행을 하고,

하루 1천 번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준제진언을  외우고,

하루 1만 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행하며 수행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수행입니다.

 

붉은 동백꽃과 평화로운 강진 바닷가의 백련사가

한 때는 치열하게 극락왕생을 위해 수행했던

우리 옛 선인들의 수행터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