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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기행

풍류 기행(31) - 강진 무위사

by 아미타온 2025. 2. 21.

<풍류 기행(31) - 강진 무위사>

 

 

1. 극락보전

 

무위사는 월출산 자락에 있습니다.

 

일주문과 천왕문, 보제루를 나오면

고색창연한 극락보전이 반겨줍니다.

 

일제 강점기에 벌써 국보 제 13호로

지정될 만큼 품격있는 전각인 극락보전입니다.

 

평안합니다.

 

극락보전에는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들립니다.

들어가보니 천도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두 분의 스님이 법식을 진행하고 있고,

가족은 단촐하게 두 분만 앉아 있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천도재를 지내는 모양입니다.

 

<남도 보물 100선>이란 프로를 보았는데,

그 중 <무위사> 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 말 출몰한 왜구들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남도 백성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 초기의 성군인 세종 대왕이 도량을 새롭게 중수했습니다. 

 

1983년 무위사는 극락전 기와와 기둥을

뜯어내는 해체 복원 불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명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명문을 통해서 무위사 극락보전은

1430 세종 12년

효령 대군 등에 의해 지어졌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세종 대왕이 스님인 삼촌 효령 대군에게 감독하게 하여

월출산 자락의 포근한 무위사에 극락보전을 세우고

수륙재를 거행했던 것입니다.

 

 

2. 수륙재

 

또한, <신증 동국여지승람> '강진현 불우조'에 따르면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한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수륙사(水陸寺)로 하고 수륙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륙재는 무엇일까요?

 

수륙제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극락으로 환생하게 하는 재생 의식으로

적까지도 포용한 모든 전망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입니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함께

적에 대한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자비에 바탕을 둔 불교 의식인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종 대왕은 불교에 우호적인 왕이었습니다.

 

한글을 창제할 당시 인도 산스크리트어(범어)의 대가인

신미 대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글 창제 후에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한글로 된 경전을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불법을 보급한 임금입니다.

 

말년에 소헌 왕후와 몇 명의 아들이 먼저 죽자 

궁궐 내 내불당을 지어 극락왕생을 발원하기도 했습니다.

 

내불당을 지을 때 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내불당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의 극락왕생을 기원했습니다.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 군주였던 세종 대왕이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 극락보전을 세운 것입니다.

 

세종 대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기운을 무위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83년 극락보전 해체 작업을 할 때

마루바닥 아래에 전돌이 깔려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뒤에 전돌을 걷어 내니 기둥이나 벽화에 습기가 많이 차서

부랴부랴 다시 전돌을 깔았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의 건축사적 가치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보다 후대 양식으로

조선 초기 주심포 건물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축 연대가 확실한 전각이라는데 있습니다.

 

낮은 기단 위에 지붕과 기둥이 1:1의 비율로 되어 있고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공굴려 처지게 하여

위엄 있는 수덕사 대웅전에 비해서는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지붕을 맞배지붕 양식으로 하고

공포를 여러 개 얹지 않은 주심포 양식의 전각으로

간결하고 단정한 맛을 지니게 한 안목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3. 극락보전 아미타 삼존불

 

단아한 이 법당의 기풍은

어쩌면 수륙제를 지내기 위한

세심한 배려 속에서 마련된 예배 공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전각 외부뿐 아니라,

내부를 벽화로 장엄하고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두 분의

부모님도 부디 극락 왕생하시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

 

극락보전은 아미타 삼존 부처님과

아미타 삼존도 벽화가 어우러져 환희심 나는 공간입니다.

 

법당 내부를 극락처럼

아름답게 채색하여 장엄하고자 했던

조선 초기 장인들의 신앙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극락보전의 아미타 삼존도 벽화는 국보입니다.

 

고려 불화의 영향과

조선 초기의 새로운 수법의 융합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조선 초기 불화 중 가장 걸작으로 뽑힙니다.

 

 

 

4. 아미타 삼존도

 

성보박물관은 극락보전 내부 벽화의 진품 및

복제품을 전시해 놓아서

조선 초기 벽화의 향취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성보 박물관에서

극락보전의 아미타 삼존도를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진품은 극락보전에 있지만,

화려한 색감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 너무나 좋았습니다.

 

후불벽화 하단에 화기가 쓰여져 있습니다.

 

조선 성종 7년이 1476년,

아산현감을 지냈던 강노지 외 수십 인이

시주해서 대선사인 해련 등이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진군 성전면 성전리와 금당리 거목 마을에

강노지의 후손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사실이

몇 년 전에 확인되었습니다.

 

이 곳 강진 지방 호족의 보시와 권선으로

조성된 후불 벽화인 것입니다. 

 

아미타 부처님과 관음, 지장 보살의 삼존 뒤로

여섯 분의 나한이 등장합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보살과 나한을 배치한 구도는

조선시대 초기에 새롭게 나타난 구도입니다.

 

상하의 구별이 뚜렷한 2단 구도의 고려 불화나

원형구도의 16세기 불화와는 달리

협시불이 본존불의 어깨까지 올라오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5. 관세음보살님

 

강남스타일 포즈를 취하신

관세음보살님입니다.

 

부드러운 붉은 색과

녹색을 주로 한 밝은 채색,

옷의 문양을 비롯한 영롱한 영락의 장식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더우기 고려 불화의 대표적 기법인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리는

유려하고 부드러운 옷주름선은 너무 멋집니다.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전>에서 몇 편의 고려 불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 수월관음도의 유려한 옷선이

너무 아름다워 감탄했는데,

무위사 후불탱화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다시 감상할 수 있으니 환희롭습니다. 

 

 

 

'화룡점정'을 하지 못한

파랑새의 전설이 남아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입니다.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극락보전 법당이 완성된 후 한 명의 늙은 화공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주지 스님에게 49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후에 아미타 삼존도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49일째 되는 날 주지 스님이

하도 궁금해서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탱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파랑새는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세음 보살님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상에는 눈동자가 없다는 전설입니다.

 

완성을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방심과 부정을 타지 않고

결계를 잘 지어야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주는 관세음보살님입니다. 

 



6. 백의 관음

 

극락보전 뒷면에는 백의 수월관음벽화가 있습니다.

 

화면 전체에 관세음 보살이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화면의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노승을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순수한 백의 관세음보살님이 파도 위에 서 계시고,

두 손으로 각기 정병과 버들 가지를 살짝 잡고 계셔서

고해 중생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응하시는 

자비로운 구세자의 모습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 유려한 선과 그윽한 눈길이 너무 멋집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내려다 보는 인물은

일반적인 선재 동자의 모습이 아니라,

승복을 입은 늙은 비구 스님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노스님이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자세와 표정은 관세음 보살님에

대한 신심과 사랑이 매우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7. 아미타불 내영도

 

극락보전의 서쪽 벽면에는

아미타불 내영도가 봉안되었 있습니다. 

 

보존 차원에서 진본은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고,

극락보전에는 복제본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 왕생을 간절히 바라고 

부처님을 부르는 염불을 한 사람은

죽을 때에 아미타 부처님과 보살 대중들이 마중 온다고 합니다.

 

죽을 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아미타 부처님과 극락대중들이

서방 정토로 맞이해 주시니

정토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안심이 될까요? 

 

 

화려한 비천상도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 풍악으로

아미타 부처님께 공양하고

극락 대중들을 환희롭게 해 주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8. 선각대사 형미탑비

 

무위사는 가지산문의 선승으로

태조 왕건을 돕다가 궁예에게 목숨을 잃은

선각대사 형미 스님의 탑비가 남아 있습니다.

 

형미 스님은 무위사에서 6년 동안 상주했다고 합니다.

 

크게 뜬 눈과 올라간 용의 눈썹이

절대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형미 대사의 서슬푸른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 산신각과 미륵전

 

선각대사 형미탑비 뒤로는

아담한 산신각과 미륵전이 있습니다.

 

'월출산 산신각'의 길쭉한 글씨가 재미있습니다.

 

 

미륵전에 계신 미륵 부처님.

 

원래 무위사에 계시던 미륵 부처님은 아니고,

인근 수암 마을을 지키던 수호 미륵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수암 마을 사람들이 무위사에

모셔달라고 부탁해서 모셔온 것이라고 합니다.

 

두툼한 입술과 큰 머리가 푸근한 어머니나,

아프리카 토착민 같은 원초적 힘을 풍기는 미륵 부처님입니다.

 

다음 세상에 우리의 곁으로 오실

사랑의 부처님이 바로 미륵 부처님입니다.

 

 

 

홍매화가 활짝 핀 무위사의

아름다움도 보너스로 챙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