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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84) - 삼밀가지 수행(3) - 의밀(意密) 수행

by 아미타온 2025. 2. 24.

<불교의 역사(84) - 삼밀가지 수행(3) - 의밀(意密) 수행>

 

<일본 고야산 밀교 '옴' 명상 수행 도량>

 

1. 삼매 (삼마디)

 

8정도 수행 중에 "정정(正定)"이 있습니다.

 

정정 (正定) 은 마음을 한 곳에 정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승에서는 주로 "정정"이라는 표현 대신

이를 발전시킨 "삼매"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삼매라는 말은 인도말인

'사마디(sam dhi)'를 음역한 것입니다.

 

"삼매"는 마음을 한곳에 정하여

움직이지 않는 상태이므로 "정(定)"이라고 합니다.

 

또한, 마음이 조절되므로 "조직정(調直定)"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유지되어

지혜가 나타나므로 "등지(等地)"라고도 합니다.

 

아울러 집중의 상태에서 법이 비로소 나타나

즐겁게 머물게 되므로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도 합니다.

 

 

2. 요가행(유가행)

 

이와 같은 삼매의 세계로 가는 수행법을 '요가(yoga, 瑜伽)'라고 합니다.

 

요가법은 인도에서 모든  종교의 수행인들이 공통으로 행한 것입니다.

 

브라만교의 바라문이나 요가학파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나 불교에서도 요가법을

수행법으로 채택하여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초기 불교 요가법은 호흡을 조절하면서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마음이 실체를 아는 수식관 등의 독특한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요가'라는 말의 어원은 '묶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묶는 삼매의 의미로

요가법을 "삼마지법(三摩地法)"이라도 합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요가행(유가행, 瑜伽行)은

곧 '삼마지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원래 요가 수행은 우주의 신비한 비밀을 알기 위한

직관의 방법으로 인도에서 개발된 수행법입니다.

 

밖의 우주의 신비를 알 수도 있겠으나,

나 또한 소우주이므로 나의 비밀을 아는 방법입니다.

 

선무외 삼장과 함께 중국 밀교의 양대 산맥으로

유명한 불공 화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언법만으로 이 몸이 곧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마지법을 설한다.

다른 가르침 중에는 없으므로 쓰지 않겠다"

 

이처럼 삼매의 가치를 아주 높게 바라보았습니다.

 

 

3.  밀교의 요가법(사마지법)

 

그러면 밀교에서 행하는 요가법,

즉, 사마지법은 어떤 것일까요?

 

일반적인 요가법이나 사마지법은

감각 기관의 작용을 억제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념무상의 세계에 머물러

그 상태를 최고의 안락한 적정의 세계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의 요가는 적극적으로

마음을 일으켜서 올바른 한 마음을 굳게 가지는 것입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적정의 즐거움에 머무는 사마지는

'아스파나카 사마지( asphnaka samadhi)' 라고 하여

'무식신정(無識身定)'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몸의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상태입니다.

 

이 사마지법은 외도들이 최고의 경지라고 하여 수행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출가하신 후 6년 고행하기 전에

선정주의의 두 스승으로부터 이 삼매를 닦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진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체 여래가 나타나 적극적으로

부처의 다섯 가지 상(相)을 보는

유상관법(有相觀法)을 닦으라고 했습니다.

 

이 유상관법에 의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고

밀교 경전인 <금강정경>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불공 화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점차로 닦아서 배우는 대승의 가르침,

곧 길을 따라서 가는 대승교만이 아니라

소승이나 외도에서도 대개 이 아스파나카 사마지를 닦는다.

 

점차로 닦는 대승에서는 망령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이것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돈입(頓入) 돈오(頓悟)를 지향하는 밀교에서는 이에 머물지 않는다.

이 정(定)은 공정(空定)으로서 일체의 생각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밀교에서 보면 일체의 생각은 그대로 실상이다.

이것을 비추고, 이것을 살리는 데에 밀교의 특징이 있다.

이 생각을 두려워하고 공정 (空定) 을 즐기는 것은

올바른 지혜를 모르는 망령된 견해이다.

 

이러한 무리가 지극히 많이 있다.

실로 통석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선(禪)을 닦을 때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허공과 같이

빈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밀교는 이를 거부합니다.

밀교의 선은 정(定)과 혜(慧)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밀교의 선은 지와 관이 동시에 있어서 정과 혜가 같이 따릅니다.

 

 

4. 밀교의 유상관법

 

중국 밀교의 대가인 선무외 삼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초심자는 흔히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헛되이 나아가 구하기를 거절하고,

오로지 생각을 떠남으로써 최고로 삼는다.

 

그러나 생각에는 좋지 않은 생각이 있고,

좋은 생각의 두 가지가 있으니,

좋지 않은 망념은 버려야 하나

좋은 생각은 없앨 것이 아니다.

 

............

 

지은 바에 따라서 모두 삼매가 상응한다.

꽃을 공양할 때에는 곧 꽃과 삼매가 상응하니,

그 속에 부처의 본존이 분명히 나타난다.

 

만약에 향이나 등(燈)이나 도향(塗香)이나 물을 바칠 때에,

또한 향과 삼매가 내지 향수와 삼매가 상응하여 하나

하나의 본존도 또한 따라서 앞에 나타난다.

 

이와 같이 하나 하나의 인연 속에서 모

두 이것이 법계로 들어가서 모두 선지식을 보나니,

돌고 바뀌어 이(理)와 상응한다" 

 

꽃이나 향이나 등명 등의 사물이 모두 법계요,

부처라고 관하는 올바른 생각이 한결같이 이어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잘못되고 망령된 생각이 억제되어서

자연히 한 생각만이 굳게 이어져 머무는 삼매에 있게 됩니다.

 

이러한 올바른 생각이 삼매와 상응하면 지혜가 되고,

그것을 분명히 비추어 보게 되므로

본존인 부처가 밖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밀교의 사마지법은

기본적으로 무상관(無相觀)이 아니라 유상관(有相觀)입니다.

 

물론 유상관법이 밀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방 불교의 위파싸나 관법도

물을 관찰하여 떠나지 않게 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밀교의 관법은

이사불이(理事不二), 물심불이(物心不二) 의 입장에서 관합니다.

 

모든 사물을 바로 법계로 보고, 법신불로 보며,

참된 나의 모습으로 보는 것입니다.

 

 

5. 일상심시도(日常心是道)


불공 화상의 문하에 있던 비석이라는 수행자가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지극한 사람이 마음을 깨끗이 하여

무념무상을 지극한 것으로 여기는데,

인연의 사물을 따라서

그 속에서 법신불을 보려고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불공 화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두루 육진삼업(六塵三業)을 따라서

묘원(妙願)을 일으켜 부처의 경계로 들어갈 때,

하나 하나의 인연이 여래를 떠나지 않음을 모두 '본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는 것이 원견(圓見)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는 성문은 천안(天眼)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을 육안(肉眼)이라고 말한다.

 

대승을 배우는 이는 육안이 있더라도

불안(佛眼)이 있다고 하니,

그러므로 대지가 물위에 머무는 것과 같이

우물을 파면 물을 얻어서 그것을 사용하나,

파지 않으면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거룩한 지혜의 경계는 일체의 법에 두루 있다"

 
요약해 보면 참된 부처인 나를

대로 보는 것이 삼매에 머무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밀교의 유가 사마지법은

모든 사물의 인연을 통해서 부처를 보고,

내가 부처임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삼매에 머물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신을 통일하여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닌 경지에 머무는 수행입니다.

 

이 세계에 이르면 일상적인 모든 마음이

진(眞)의 세계에 있으면서 일상심 그대로 머뭅니다.

 

이것을 '일상심시도(日常心是道)'입니다.

 

이렇게 되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은

밀교에서는 '응무소주 이주심(應無所住而住心)'이 됩니다.

 

진(眞)과 속(俗)이 함께 있으므로

걸림 없는 마음가짐에서

진실계를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밀교의 의밀 수행인 삼매의 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