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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기행

풍류 기행(36) 완도 장도 청해진 유적지

by 아미타온 2025. 5. 19.

<풍류 기행(36)  완도 장도 청해진 유적지>

 

 

 

1. 장도와 청해진

 

완도 청해진.

 

완도 대교를 건너 맞이한 완도는

청명해 보였습니다.

 

주차하고 바라본

장도(將島) 청해진 유적지입니다.

 

9세기 한중일 삼국의 바다를 지배했던

해신(海神) 장보고 장군의 기상이 느껴지는 청해진이었습니다.

 

 

 

청해진은 완도 일대를 말하는 것이지

청해진 유적지라는 ‘장도(장군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도(將島) 는 말하자면 장군대 같은 곳입니다.

 

높은 곳에서 지역을 모두 굽어보며

장수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소입니다.

 

평소에도 이곳 장도에 장보고가 거주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명장으로 소문났던 장수입니다.

 

원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활을 잘 쏘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궁예는 장보고의 손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궁복과 궁예.

그럴듯 합니다.

 

 

2. 해신 장보고

 

장보고는 완도가 고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치상으로 더 좋은 진도가 아닌 완도에

‘바다를 맑게 한다’는 청해진 이라는 본부를 짓고,

중국-신라 –일본의 해상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더불어 신라와 중국 일본일대에서

바다를 더럽히던 해적들을 쥐 잡듯 잡아

바다를 맑게 했습니다.

 

 

 

 

왕이나 연개소문 같은 권력자가 아니면서

중국, 신라, 일본의 정사에 기록된 인물은

김유신과 장보고 밖에 없다고 합니다.

 

원효 대사는 일본, 중국을 거쳐

인도에까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정사’는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인 중에 기념관이나 기념비가

중국. 한국. 일본에 세워진 사람은 장보고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중국 등주 '법화원'에

장보고 장군의 동상과 사당이 남아 있고,

일본 히에이산 엔랴쿠지에도 엔닌 스님이 세운

장보고 장군 기념비와 신라 명신전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 천태종 3대 좌주인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중국 유학길의 폐불의 많은 고난 속에서

장보고 장군과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공부와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고 그 감사를 절절히 적고 있습니다. 

 

그만큼 장보고는 말하자면 단군 이래

'해상왕'이라는 이름이 걸맞는 유일무이한 인물입니다.

 

 

 

학자들은 장보고의 몰락을 해양-상인세력과

신라 중앙귀족의 싸움에서 해양-상인세력의 패배라고 말합니다.

 

신라 하대의 혼란한 권력 투쟁에서

장보고는 숟가락을 하나 얹은 정도가 아니라,

병력을 동원해서 기존의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것을 요구했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졌지만

왕이 된 신무왕은 일 년도 못되어 병사하고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장보고는 왕위에 오른 문성왕에게

선대의 약속을 지킬 것을 다시 요구했습니다.

 

문성왕은 받아들였지만 귀족들이 반대했습니다.

힘없는 왕이 어쩌겠습니까?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로 시간만 보낼 수밖에요.

 

 

 

화가 난 장보고가 군사를 동원할 기미를 보이자,

귀족들이 염장이라는 자객을 보냈습니다.

 

장보고의 예전 부하였던 염장은 장보고와 술잔을 나누다

술에 취한 장보고의 칼을 빼어 목을 잘랐습니다.

 

바다를 지배한 ‘해신’의 허망한 최후였습니다.

 

 

 

3. 바다의 지배자

 

장보고의 군대는 1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장보고가 신라왕을 죽일 때 동원한 군사가 절반인 5천명이었습니다.

 

이성계의 가병인 가별초가 2천~3천명이었다고 합니다.

가별초는 최정예 군대였습니다.

 

장보고의 1만명도 어중이 떠중이들로 채운 숫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라왕실과 중앙귀족들이 오만방자한 장보고에게 쩔쩔 맸던 것은

그만큼 장보고의 군대가 정예병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도로 망했습니다.

 

골품제도는 경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었던

선민계급주의입니다.

 

당연히 경주 밖의 완도출생으로 추정되는 장보고가

귀족들의 눈에 찰리 없었습니다.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건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로 여겼을 것입니다.

 

지방 호족들이 제대로 힘을 쓰게 된 것은

장보고가 아마 처음 일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호족이 난립한 것은 신라 말기와 후삼국 때이고,

한반도의 정치는 언제나 중앙집권적이었습니다.

 

고려도 신라를 물려받아 후삼국을 통일했지만

수도는 개경으로 삼았습니다.

 

다분히 신라귀족들을 의식한 행위였습니다.

이성계도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이건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튼 장보고는 족보도 없는 평민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넘어가 이 실력을 갈고 닦아

군사를 다루는 능력과 물자와 돈의 흐름을 보는 상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당나라에서 장보고는 육지에서 싸우는 장수였습니다.

말 타고 창을 쓰는 뛰어난 기병장이었습니다.

 

그랬던 장보고가 ‘해신’으로 갈아탄 것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에는 반역자로 낙인되었기에

청해진의 사당에서도

정작 장보고는 모셔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당에 장보고가 주신으로 올려진 것도

1990년대 청해진이 발굴되면서였습니다

 

사당은 송징, 장보고, 정연, 혜일대사 네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정연은 장보고의 의형제로 십년 연하입니다.

 

당나라에서 장보고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던 장수였고,

청해진에서도 장보고의 부장으로 5천의 군사로 왕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혜일대사는 고려 때의 선승으로

관리인 조카가 완도로 귀양 올 때 귀양바라지를 하며

함께 완도로 와서 절도 짓고, 청산도에도 절을 지은 스님입니다.

 

사당에 모신 네 명은 완도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분들인건데,

장보고는 역모를 꾀한 반역자라서 천년이 넘도록 사당에도 오르지 못했다는 겁니다.

 

 

맑은 날 장도의 성곽에서 조망되는

완도의 바다는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역사상 한중일 삼국에 뚜렷이 족적을 남겨서

'바다의 지배자'로 부릴 만한 유일한 분이 장보고 장군!

 

위대한 바다의 지배자 장보고 장군의

열정과 땀이 숨쉬고 있는 청해진을 걸을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장보고 장군과 청해진 전사들이 누비던

서남해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즐거운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