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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생애

암라팔리 이야기 (부처님의 일생30)

by 아미타온 2023. 9. 25.

<암라팔리 이야기 (부처님의 일생30)>

<인도의 미녀 그림>

1. 기녀가 된 암라팔리


부처님께서 기녀였던 바이샬리의

암라팔리를 제도한 이야기입니다.


바이샬리는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무역과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왕이 다스리는 전제국가인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과는 달리

‘밧지 연맹’이라는 연맹체의 수장이 바이샬리였고,
그랬기에 바이샬리는 여러 씨족의 부족장(왕족)들이

일종의 민주적 공화제로 통치하는 도시국가였습니다.

 

암라팔리는 바이샬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망고나무숲에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기녀의 딸로 추정됩니다.
당시 임신한 기녀들은 아이를 낳으면 영업에 방해될까봐

사람들의 눈에 띌만한 곳에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암라팔리는 운이 좋아서

망고나무숲의 관리인이 암바팔리를 친딸처럼 키웠습니다.


그리고, 암라팔리는 엄청난 미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결혼적령기가 되었을 때 암바팔리에게 청혼하겠다는

바이샬리의 왕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서로간에 전쟁까지 벌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나라가 휘청일 정도의 미녀를 ‘경국지색’이라고 합니다.
암라팔리의 미모가 그 정도였던 것이지요.


연맹의 장로들이 왕자들을 불러 회의를 했습니다.

 

열띤 논쟁의 결론은 암라팔리를

왕자들 모두의 '공동소유'로 하자였습니다.

 

커다란 망고나무숲 일부를 기녀촌으로 만들고,

암라팔리를 왕족들만 상대하는 국가의 창녀,
즉 '국창'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암라팔리를 찾지 않도록

하룻밤 화대를 높은 가격으로 책정하였습니다.

왕자들은 암라팔리를 독점 소유할 수

없다는 것에 불만족했지만 수긍했습니다.


내분으로 서로 싸우느니 순번표를 뽑아

암라팔리를 안는 것으로 타협했습니다.


물론 암라팔리의 인격이나 의사는 무시되었습니다.

암라팔리에겐 어떤 선택도 반대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왕과 여인 (영화의 한 장면)>

2. 빔비사라 왕과의 사랑


암라팔리가 '국창'이 되면서

바이샬리는 가일층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암라팔리와 하룻밤 자겠다며

돈을 싸들고 오는 타국의 왕족들과 부호들이
바이샬리로 몰리면서 무역과 상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바이샬리의 장로들과 왕족들은 암라팔리가

타국의 왕족들과 부호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가다 국왕 빔비사라는 암라팔리라는

기녀 한명으로 바이샬리가 최고 상업대국으로 발전해가자
암라팔리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변장을 하고 바이샬리로

들어가 먼 나라 왕족인 척하며 암라팔리를 만났습니다.

 

빔비사라왕은 약소국인 마가다국을

북인도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영웅이자 정복군주였습니다.


빔비사라는 15세때 마가다의 왕이 되고 그후 아들인

아자타삿투의 반란으로 죽을 때까지 52년간 왕으로 재위했습니다.

 

부처님의 시대는 여러 나라들이 각축을 벌이던 전국시대였습니다.

빔비사라는 전국 시대의 왕들 중에서 가장 제왕에 근접한 인물이었습니다.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도 탁월했고

국민의 신망을 얻을줄 아는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빔비사라왕과 암라팔리가 만났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암라팔리가 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라는 것에 감탄했고,
암라팔리는 빔비사라의 영웅적 풍모에 반했습니다.

 

두 사람은 궁합이 잘 맞았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마가다의 왕이라 해도

암라팔리를 바이샬리에서 데려갈 수는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습니다.


암라팔리는 빔비사라 왕을 사랑했고,

빔비사라의 아이를 가졌고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소중하게 키웠습니다.

<암바팔리가 기증한 망고나무숲 대림정사터와 아쇼카 석주>

3. 바이샬리의 가뭄과 부처님의 방문

 

어느 해 바이샬리에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땅은 메말랐고 동물들과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전염병까지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바이샬리는 자이나교의 교조인

니간타 나타풋타가 태어난 곳이어서

자이나교의 세력이 왕성한 곳이었습니다.

 

바이샬리의 왕족들은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다는 바라문과 수행자들을 섭외해서
기도도 하고 제사도 지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여러번 칭찬하셨던 도시였습니다.

 

도시는 활력이 넘쳤고 다양한 사상과 그 시대로서는

개방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셨고,

바이샬리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법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로 향하셨습니다.


빔비사라왕을 비롯한 대신들과

불교신도들이 갠지스 강변까지 나와 배웅했습니다.


반대편에는 바이샬리의 왕족들과 시민들이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배가 강을 건너 바이샬리의 땅에 당도하는 순간 천둥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샬리의 시민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에 경탄했고 감사했습니다.

 

극악했던 가뭄이 끝났고 창궐하던 전염병도 사라졌고,

왕족들과 시민들이 부처님과 교단에 귀의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한 암라팔리>

4. 암라팔리의 귀의와 대림정사의 보시

 

암라팔리가 버려진 곳이자 암라팔리의 유곽(기녀촌)이 있는

망고나무숲은 바이샬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유곽에서 떨어진 이 망고나무 숲에서 머무셨습니다.

바이샬리는 불교 교단의 가람이 세번째로 세워진 곳입니다.

 

왕사성이라고 하는 라즈기르의 죽림정사,

사위성이라고 하는 스라바스티의 기원정사,
그리고 바이샬리의 재앙을 물리쳐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바이샬리가 기증한 대림정사(大林精舍)입니다.

 

아울러 대림정사의 중각강당은

열반경과 유마경 화엄경이 설해진 무대이며,
최초로 여인출가를 받아주신 역사적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승원이 없었고,

비구니 교단은 3년 뒤에 결성되었습니다.

 

암라팔리의 귀에 부처님께서 자기 소유인

망고나무숲에 머무신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암라팔리는 연인인 빔비사라가 그렇게 존경하고

칭송하던 부처님이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인
망고나무숲에 계시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암라팔리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뵙는 순간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성자이며

자신이 귀의할 의지처이고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재가신자로써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착하구나. 많은 재산과 명성이 있고

게다가 뛰어난 용모를 가진 젊은 여성이
법에 귀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인데 장한 결정을 했구나."

암라팔리는 쓸쓸하게 말했습니다.

"몸과 웃음을 팔아 모은 재산이고 명성일 뿐입니다.
뒤돌아서선 천한 기녀라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보다 좀 나은 용모가 있어 재산을 모으고

먹고 쓰고 할 수 있었으니 불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한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이유로 버려진 아이가 되어

기녀로 살아야했는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암라팔리의 전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생에 너는 네가 낳은 자식을 버렸다.
그 업으로 이번 생에서는 버려진 아이가 되어 험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너는 수많은 생을 살면서 항상 보시를 멈추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에게 보시하는 것을 기꺼이 했으며 즐거워했다.
그 공덕으로 빼어난 용모와 풍족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암라팔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보시의 공덕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부처님과 교단에게 망고나무숲을 기증하겠다고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쾌히 받아주셨습니다.

암라팔리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거처를 지어 망고나무숲과 함께 기증했습니다.


이 망고나무숲 일대에 대림정사가 세워진 것이니

암라팔리의 망고나무숲 기증은
암라팔리 개인에게는 더 할 수 없는 보시의 공덕이 되었고,

불교사에는 의미있는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바이샬리 대림정사의 아쇼카 석주와 사자상>

5. 아라한이 된 아들과 어머니


한편, 암라팔리와 빔비사라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위마라 콘단냐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한 이후 암라팔리는 5계를

수지하며 청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죽림정사에서

코살라국의 기원정사 사이를 오갈 때 반드시 거쳐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만큼 바이샬리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주 들을 수 있는 입지적 조건 속에 있었습니다.

위마라 콘단냐는 어머니인 암라팔리의

사랑 속에 부유하게 자랄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찍 출가했습니다.


기녀의 사생아라는 상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뛰어난 지혜가 있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느낀바가 컸었는지
어쨌거나 이십대 전에 출가해서

역시 빠른 수행기간을 거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암라팔리의 기쁨이 어땠을까요?
한량없이 기뻤을 겁니다.

위마라 콘단냐존자는 어머니인

암라팔리에게 자주 설법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에 보은 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보은은 없을 것입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온 나라를 떨게 하던 여신이었던

암라팔리의 미모도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거울보기>


어느 날 암라팔리는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더 이상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주름살과

거칠어진 피부를 보았습니다.


부처님과 아들인 콘단냐 존자가 말하던

무상함을 처음으로 깊이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콘단냐 존자는 암라팔리에게 출가를 권유했지만

암라팔리는 피일차일 미뤄왔습니다.


아직은 속세의 즐거움을 그 집착을 놓치 못해서였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암라팔리는 집착이 사라짐을 알았습니다.


이제 출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속의 안락과 신체에 대한 집착을

'극복'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출가한 암라팔리의 수행은 거울보기였습니다.


거울이나 물에 비친 자신의 신체를 보며

과거의 빼어난 미모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철저히 무상(無常)을 관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암라팔리의 '무상관(無常觀)'은 오래지 않아 결실을 맺었습니다.
암라팔리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아라한이 된 희유한 일이었습니다.

 

<무상관>

6. 암바팔리의 무상관 게송


팔리어 경전에는 아름다운 시집과도 같은 '장로니게경'이 있습니다.


'장로니'란 연륜이 깊고 덕이 높은 비구니스님을 뜻하고,
'장로니게'는 이 비구니 스님들이 담백하고

진솔하게 자신들의 삶의 역정과 깨달음을 적은 내용입니다.

모두 73인의 비구니 스님들의 게송을 모았고

73인중에 4명의 전직이 기녀입니다.


이 ‘장로니게경’에 암라팔리의 게송도 남아 있습니다.
그 일부만 읽어보며 암라팔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예전에 내 머리카락은 빽빽하게 우거진 숲처럼

핀이나 빗으로 잘 정돈되어 꾸며져 있었지만
늙어버린 지금은 여기저기 머리가 빠져 휑합니다.
역시 붓다의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예전에 나의 치아는 마치 파초 봉오리의 색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늙어버린 지금은 부서져 마치 보리처럼 누래졌습니다.
역시 붓다의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예전에 나의 손은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늙어버린 지금은 나무뿌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역시 붓다의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이렇게 잘 모여 만들어진 나의 몸은 늙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많은 괴로움만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것은 도료가 벗겨 떨어져 나간 황폐한 집입니다.
역시 붓다의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유튜브 극락회상 - 부처님 생애(30)  기녀 암바팔리 이야기>

https://youtu.be/ZtJih2kCQYc?si=-atLRBr3aSZAdM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