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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2.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19세기 조선의 상황(2)

by 아미타온 2025. 10. 10.

 

<개화 운동과 거사, 승려의 현실참여 / 19세기 조선의 상황(2)>

 

<  숯장수  >

                                     

5. 삼정 문란의 상황

 

어느 시대나 국가에 내는 세금, 군역 등이

원칙이 없거나 무거울 때 민중의 삶은 고달파지게 마련입니다.

 

조선 후기 19세기를 논할 때  으례 이야기가 되는 것이

바로 삼정(三政)의 문란 상황입니다.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三政)은

조선 왕조 재정 체계를  이끌고 있는 주된 요소입니다.

 

전정(田政) 은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군정(軍政)은 군사 유지를 위해 군역을 부과하거나,

아니면 군역 면제로 군포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환곡(還穀)은 원래 국민을 위해 춘궁기에 양식을 대여했다가

추수기에 10% 이윤을 붙여 다시 거두어들이는 빈민 구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17세기 말부터

환곡을 국가의 고리대금업 형태로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국가에서 빈민구제가 아니라,

고리대금업의 수단으로 환곡을  운영하니

환곡의 폐단이  가장 극심히 나타난  것은 19세기 사회였습니다.

 

19세기에 도처에서 일어난 민란의  배경에는

환곡의 폐단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환곡  원래의 취지는 빈민구제의 좋은 취지였지만,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국가 고리대로 운영되었습니다.

 

따라서, 억지로 환곡을 대여하거나, 

환곡 대여 과정에서 협잡을 부려 중간 관료층이 착취를 일삼게 되면서 

환곡이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대민 착취 제도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이  환곡 제도가 폐지가 된  것은

1860년대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다음에  이르러서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환곡에  대한 문제는

조선 후기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였습니다.

 

전정(田政)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권세있는 아전들과 양반들은 땅을 속여 세금을 은닉했고, 

농민들에게는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 실제 세액의 몇 배를 징수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이 농지를 경작하고 싶어도

그에 따른 수취를 두려워하여 경작하지 못할 만큼 그 폐해가 극심하였습니다.

 

또한, 전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자유전의 원칙에 의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고 

그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농민들의 경우에는 영세농이었고,

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소규모의 토지를 가지거나,

그 토지마저  박탈당하거나 소작지 경쟁에서마저도 박탈당하여

농촌에서 쫓겨나는 유민이 될 수 밖에  없는 열악한 처지에서

세금 부담만 큰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정의 근본 문제는 바로 토지 소유와  관련된 문제로

계속 남아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군정은 1750년대 와서 

양역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서 균역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균역법은 종전의  양인들이 짊어지고 있었던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여주어  양인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필로 감소가 되었지만,

19세기  초엽에 오면 다시 양역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양역의  폐단과 관련이 된 가장 저명한 사례로

정약용이 지은 "애절양"이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애절양"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가 있을 때

겪었던 일을 시로 읊은 것입니다.

 

이웃 마을에서 한 농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무조건 군역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16세 정남(丁男)이 되면 그때부터  군포를 부담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포가 워낙  부족하였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이 황구첨정(簽丁: 생후 3일된 아이를

군적에 등록시켜 군포를 물리는 일)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황구첨정을 하려고 하니 농부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나라에서  그 집에서 기르던 소를 끌고 가 버렸습니다.

 

소를  끌고 가니까 그 농부는  열받아서

자신의 남근을 잘라 버렸습니다.

 

바로 이 물건 때문에 아들를 낳아

이와 같은  수모를 당한다고  자해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잘린  남근을 들고서

지방 관청에 들어가서 항의를 하려고 하다가 

문지기에게 쫓겨나서 항의 못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정약용은 <애절양>이라고 하는 시를 지었던 것입니다. 

 

남녀가 같이 만나서 아이를 낳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인데, 

하늘이 정한 이치를 위배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한탄의 시가 나올 정도로 세금의 피해가 막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이 바로 19세기 조선 사회였던 것입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폐해와 민중들의 고통 속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회 건설의 노력은 일어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를 살았던 유대치,오경석,이동인 등은 

부패하고 타락한 나라와 또한 궁핍한  민중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개화를 통해 선진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신식 군대 >

                                                

6. 민중의 저항과 민란의 발생

 

19세기 조선 사회는  민란의 시대였습니다.

19세기는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납니다.

 

먼저1811년 홍경래가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이 평안도에서 일어났습니다.

 

평안도 농민 반란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되다가

1860년대에 오면 임술 농민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납니다.

 

한해 동안 전국 80여개 군현에서 민중 저항 운동이 일어나

지배층에 대한 항거가 진행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민란 외에도 주목할만한 것은

유망(고향을 떠남)이 증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망은 국가의 조세 체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던 향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면 

그에게 조세나 군역을  부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망 그 자체도 소극적인 저항으로 파악해 주어야 합니다.

 유망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 중 일부는 화적화되어 갑니다.

이 화적들은 1860년 임술민란을 계기로  그 성격이 전환이  됩니다.

 

1860년 이전에 화적질했던 사람을  분석해 보면

그들은  파트 타임(part-time) 화적들이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화적질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1860년대의 이후로  본격적인 전업 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화적 발생의 시기가 농한기 뿐만 아니라,

농번기에도 발생하게 되고 화적의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이들은 일정한 규모와 조직을 가지고,

주로 관청이나 부잣집을 대상으로  한 약탈 행위를 하였습니다.

 

화적은  도적떼입니다.

도적은 윤리적으로 볼 때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도적이 지배하고 있던 세상에서

화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화적은 사회에 대한 가해자 일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화적떼들이 양산되던  때가

19세기 우리 나라의 사회였음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민란도 19세기 후기에는 계획적인 민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전의 민란이 빈곤에 의한 우발적 폭동이라면

1860년의 임술 민란을 보더라도 일정한 계획을 갖고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민란은 개항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고종 연간에도 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종 때 일어난 "이필재의 난"입니다.

 

이 난은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을 하고

새로운 근대 사회를 이루려는 노력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개항 이후에도 민중 저항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임오군란의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사회는 민중들의 저항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위태로운 사회였슴을 잘 알수 있습니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던 때가

바로 19세기 사회였다고 생각합니다.

 

 

< 장 승 >

                               

 7. 사상계의 특성


이와 같은 조선 사회의 제반 현상과 관련해서

사상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은 유학 중 성리학 중심의 사상 체계였습니다.

성리학은 조선 후기까지 지배 지도 이념으로 

조선의  리더십이 되고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것입니다.

 

그 성리학의 사상적인 독점  체제가 붕괴되어 나가던  때가

바로 19세기 조선 사회였습니다.

 

성리학의 붕괴는 실학(實學)의 형성과 종교의 성행을  통해 확인됩니다.

 

실학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정약용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을 실학자로 정의했던 것은 아니고, 

실학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개념과 동일하게 쓰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실학은 민중의 삶을 추구하는 실사구시, 경세지학을 말합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실학자들이

전통적인 성리하에서 벗어난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하였습니다.

 

물론 한계는 나타납니다.

 

하나의 사상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책으로 간행이 되고

사람을 모아서  2세를 교육하거나 사상 전파의 집중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실학자'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

이와 같은 사상 전파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학자들의 저서가 당대에 간행이  되지 않았고,

그들의 책은 후대에 20세기에 들어와서 간행이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집중적으로 재발견되는 것도 바로 20세기 초였던  것입니다.

 

정약용은 당시에 명망인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의 사상이 당시 사회를 변경시킬만큼 기능하지는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종교 운동이 성행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전통 종교와  신흥 종교가 모두 포괄됩니다.

 

전통 종교로는 불교와 감교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불교가 조선 후기에 재인식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9세기 들어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순창 구암사의 백파 스님이 <선문수경>이란 책을 편찬한 이후

초의, 우담, 설두 스님 등을 중심으로 선(禪)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거사들의 불교 신행과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이들이

산사에서 생활하거나 승려들과 불교에 대해 토론하며 교류를 가졌습니다.

 

특히, 추사 김정희, 이건창, 월창 김대현으로 대표되는 거사들의 수준은

당대의 고승 백파 선사와 선에 대한 논쟁을 할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월창 김대현은 <선학입문>이란 저서를 통해 참선 입문의 방도를

자세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1872년 서울 묘련사의 관음 결사는 거사들이 주도하였으며,

그 열기가 뜨거웠다고 합니다. 

유대치,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중인 출신 제자였습니다.

 

한편, 손쉬운 불교 부흥의 확인은

18세기 전후하여 대규모 사찰 중창 불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절이

대규모의 사찰로 다시 중창된 것은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경제력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거사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감교(예언) 사상의 부흥도 주목됩니다.

 

17세기  후반에는 한글로 된 <언문 정감록>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정감록 이본이 약 30여종이 있는데,

19세기 전후한 시기에 정감록이 많이 출현합니다.

 

<정감록>은 조선 왕조 멸망의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씨 500년설"은 조선 왕조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조선 성리학자들 예를 들면 안정복과 같은  인물들은

<동사강목>에서 각 왕대의 세계를 논하면서

신라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만만세 라고 이야기합니다.

 

지배층들에게 조선은 만만세해야 할 나라지만,

백성들은 조선 왕조는 500년밖에 못 가고

곧 멸망한다고  벼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감교서에 보자면 "이씨 400년설"도 표현이 된  바가 있습니다.

 

더  빨리 망하기를 바랬다가 망하지 않으니까

"이씨 500년설"로 자연적으로  연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던 사상이 감교 사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통 종교에 대한 재인식이 강화되어 나감과 동시에

신흥 종교 운동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흥 종교 운동은 19세기에 서학(천주교)이 넓게 전파가 됩니다.

최제우의 동학도 신흥 종교 운동으로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통 종교나 신흥 종교에서 당시 지향하던

중요한 가치관은 '인간 평등'이었습니다.

 

인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고통을 구제할 수 있는 학문과 종교로서 

실학, 불교, 서학(천주교), 동학, 감교 등이 새롭게 인식되고 

그 가치가 확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조선 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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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이 19세기 조선 사회는

격동기였고 혼란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민란과 개항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이 격동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 줄  많은 인물들이 우리나라에도 태어났습니다. 

 

실학자 정약, 의학자 이제마, 종교가 최제우

등이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을 비롯한 개화당 원조와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개화당 2세들도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중요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개화당의 사람들은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외국물을 먹었던 극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본 외국은 조선과는 다른 별천지 세상이었고,

그 문화적 충격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선을 새롭게 만드는 길은

외국의 우수한 선진 제도와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도 선진화된 사회로 빨리 진입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화당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적 기반으로서 불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치와 오경석은 불교, 특히 선리에 밝아서

선을 자주 담론하였으며 제자들에게 불교의 이치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왜 이들이 정통 성리학 질서에서

핍박받던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선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고 

닦기 위한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였는지,  

아니면 불교의 자비 사상을 바탕으로

개화를 통한 조선의 혁신을

중생 제도의 방편을 실천하려고 했는지는 잘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 격동의 시대에

불교적 소양으로 자신의 중심을 잡고

새로운 세상인 외국에서 받은 충격을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개화당 불자들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