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기 한국 불교의 동향(7) - 일본 총독부의 사찰령 제정 >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점함으로서
조선의 일체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식민지 지배 체제를 유지함과 동시에
조선의 물적 자원을 약탈하는 것을 당면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조선을 침략한 후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하고 침략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들의
민족 의식을 탄압, 유화시키는 방편으로 문화, 종교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우선 조선 불교를 이용하고 통제하기 위해
1911년 '사찰령'을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사찰령은 일본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그 골격이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현대 불교 관련법의 모태가 된 법으로
불교를 국가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한 법이었습니다.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의 내용과
<사찰령>에 대한 조선 불교계의 대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찰령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의 모든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종교 법령을 공포하였습니다.
우선 1911년 '경학원규정(經學院規定)'과
'사찰령(寺刹領)'을 공포하여
유교와 불교를 통제하려 하였습니다.
경학원규정에 따라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는
총독부 산하 기구가 되었으며,
경학원의 최고 책임자인 대제학을 총독이 임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는
완전히 총독부 통제 하에서 지휘 감독을 받았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조선 시대 억불 정책으로 신음했던
불교의 관리에 주목하였습니다.
비록 불교가 쇠잔했다고는 해도
2천년 가까이 지속된 일반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불교 신앙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기복 불교와 산중 불교에 머물고 있다 해도
저변이 두터운 불교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식민지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고
조선 민중의 민족 의식을 유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찰령> 제정 당시 총독부에는 3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첫째, 조선 불교의 현 상태는 3층에서 떨어진 계란처럼
쇠잔하고 보존할 여지가 없으니 스스로 자멸하도록
그냥 방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비록 조선 불교가 쇠잔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찰의 재산이 적지 않으니 방기하지 말고
일본 종파에 조선 불교를 부속시켜
간접적인 방법으로 적당히 관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세째, 쇠퇴한 조선 불교라도 예로부터 전승해온 법통이 있으니
하루아침에 중단하여 일본 불교에 부속시킬 때에는
조선 승려들의 불평 불만을 품게 되어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일어날수 있으니
특별히 법령을 정해 조선 불교를 총독부에서 직접적으로 관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 세번째 안이 채택되어 총독부는
"사찰령"이란 법규를 제정하여 불교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찰령의 제정에 따라 친일적인 원종 총무원이나
조선 불교의 전통을 지키려는 임제종도 폐지되었습니다.
아울러 일본 불교의 연합이나 지원 따위의 연결 고리도 끊게 하였으며,
총독부에서 불교계를 직접 관리하고자 하였습니다.
1911년 6월에 제정된 사찰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또한 폐지하고자 할 때에는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는다.
그 터나 또는 명칭을 변경하고자 할 때에도 또한 같다.
제2조 : 사찰의 터와 가람은 지방 장관의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전법,포교,법요 집행과 승려 거주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제3조 : 사찰의 본사-말사 관계, 승려 규칙, 법식
기타 필요한 사법(寺法)은 각 본사에서 정하여 조선 총독의 인가를 받아 실시한다.
제4조 : 사찰에는 주지를 둠이 필요하다.
주지는 그 사찰에 속하는 일체의 재산을 관리하여 절의 사무와
법요 집행의 책임을 맡아 사찰을 대표한다.
제5조 : 사찰에 속하는 토지, 삼림, 건물, 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기타 귀중품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이를 처분할 수 없다.
제6조 : 앞 조목의 규정을 위반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또는 5백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7조 : 본 사찰령에 규정한 것 이외에 사찰에 관해 기타 필요한 사항은 조선 총독이 정한다.
위와 같이 사찰령 자체는 7조로 이루어진 지극히 간단한 법령이었다.
그러나, 사찰과 관련된 일체의 권리와 내용은
조선 총독과 지방장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함으로써
국가가 불교계의 인사권과 재산권을 장악하여
불교계의 자주성을 극도로 억압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사찰령은 또한 사찰을 종교적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특히, 정치적 목적)로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제한하여
의병이나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활용되는 것을 막고
각종 집회나 교육을 원천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찰에 속하는 재산의 관리를 담당하고
절의 사무와 법요 집행의 책임을 맡아 사찰을 대표하는
주지의 지위와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이전 조선 시대와는 달리 주지의 권력 확대의 길을 터놓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 발표 후 1달 뒤 전문 8조로 된
<사찰령 시행규칙>을 1911년 8월에 함께 공포하였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본사-말사 체제로 서열화하였고
본사의 주지는 총독에게 말사의 주지는 지방 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지의 임기는 3년으로 하되,
주지에게 범죄 및 업무에 태만할 때에는
그 직무의 인가를 취소하도록 하였고
인가가 취소된 이는 1주일 안에 그 사찰에서 퇴거하도록 하여
주지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불교의 경우는 각 종파 종무원에서 임명권을 행사하여
주지직은 신고만 하면 되는 것에 비하면
조선 불교는 허가제를 실시하여 총독부가 사실상
조선 불교계의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식민지 종속화를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찰령 시행 규칙에 의거하여 조선총독부는
새로이 30본산을 제정하고 주지를 친일적 승려로 임명하였습니다.
30본산은 (경기4) 수원 용주사, 강화 전등사, 양주 봉은사, 광주 봉선사
(충청3)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금산 보석사
(경상8) 대구 동화사, 영천 은해사, 문경 김룡사, 의성 고운사, 경주 기림사,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전라5) 전주 위봉사, 순천 선암사, 순천 송광사, 해남 대흥사, 장성 백양사,
(강원3) 간성 건봉사, 평창 월정사, 고성 유점사,
(황해2) 황주 성불사, 신천 패엽사,
(평안3) 평원 법흥사, 평양 영명사, 영변 보현사,
(함경2) 안변 석왕사, 함흥 귀주사 입니다.
1920년에는 선암사의 말사였던 구례 화엄사가
우여곡절 끝에 본산으로 지정되어 31본산이 되었습니다.
한편, 사찰 법식에는 사찰 고유의 행사 외에
일본 천황의 생일 또는 일본의 축제일인 기원이나
천장절 등의 여러 행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조선 불교에서 왕실이 세운 원찰에서는
임금이나 왕세자의 생일을 천세 만세(千歲 萬歲)라 써 붙이고 빌었는데,
이를 일본 천황의 생일과 축제일에 맞추어 경축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절에서는 이러한 행사 때 일장기가 휘날리고
"천황폐하만세"라고 쓴 종이 조각을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2) 주지 전단 시대와 불교의 세속화
사찰령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선 시대의 도첩제보다도 더한 악법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찰령의 핵심은 사찰과 승려에 대한 관리를
조선 총독이 직접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리 감독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사찰령 수용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사찰령이 발포되고 나서
이와 같은 조선 총독의 관리 감독에 대해
조선 불교계는 별다른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승려들이 불교가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사찰령을 지지하거나 찬양하는 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
친일 불교는 초기에 '불교 진흥회'라는 이름으로
해인사 주지가 된 이회광이 회주가 되고
용주사 주지가 된 강대련이 부회주가 되어 이끌어 나갔습니다.
사찰령이 공포된 뒤에도 두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사찰령대로라면 조선 시대때처럼 스님들이
국가 공사에 부역 노동자로 동원되거나
승군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또, 불교 재산 처분 등의 일부 권한이 제약되었으나,
조선 말기 양반이나 토호 세력들이 무단으로 절의 소유지를
공공 건물의 부지로 수용하는 등 외부 세력들의
부당한 사찰 사유 재산 침탈로부터도 벗어날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종단을 확립하지 못하고
억압적인 침탈 속에서 신음하던 조선불교계는 이에 만족하며
조선총독부에 대한 민족적 저항과 자주적 불교 발전에 대한
인식이나 의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권력 기관의 통제와 관리를 받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감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와 함께 일제는 기본적으로 30본산의 본사 주지들과
일부 불교 유력 인사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본산 주지는 총독부의 보호를 받으며
비록 승려의 재산 처분 등에 제한을 받았으나
막강한 권력을 틀어쥐고 인정받고 살았습니다.
주지들은 한번 임명되면 해당 절의 인사권을 거머쥐고
하급 관리의 통제를 벗어나 떵떵거릴수가 있었습니다.
즉, "충실한 천황의 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는 본산 주지 수십명을 모아
조선총독부의 신년 하례회에 참석시켜 총독을 면담하게 하고
일본 시찰단을 만들고 시찰자금을 대면서
일본의 여러 주요한 사찰과 명승지들를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일본 천황을 알현하게 하여 천황의 훈시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들 승려들은 조선 왕조 시대에는
볼수 없는 우대라고 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원 용주사 주지로서 일제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 승려 강대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고려말에 전래된 주자학의 영향으로
불교는 무군무부(無君無父)한 종교로 인식되어
깊은 산 속으로 쫒겨나서 인민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질수가 없었다.
그러나, 1911년 사찰령이 공포됨을 맞이하여
조선 불교는 정부의 은덕을 입어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양산 통도사 주지로 1917년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역임한
김구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공포한 사찰령 7개항이 반포된 이래로
조선불교 30본산이 사법(寺法)을 시행하여 사찰의 질서가 정비되고
재산의 보호가 엄밀하여 조선 사찰에 일반 승려는
국가의 특별한 은혜에 감사하며
종교의 균등한 권리를 향유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만일 승려는 이것에 대하여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려면
무엇을 중심으로 급히 시행할까 하면
강학(講學)과 포교(布敎)의 2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30본산 중의 하나로 지정된 강화도 전등사의 주지 김지순은
1911년 11월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조선 불교는 승풍이 쇠잔하고 규율은 기강을 잃었다.
불경은 누각 속에서 좀이 슬었고,
승려들은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고 나태한 습성에 빠졌다.
.....
1911년에 사찰령이 시행되니 이것은 메이지 천황께서
우리 조선 민족이 도탄에 빠진 것을 진흥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어린아이를 보살피는것 같은 깊은 은혜와
넓은 생각에 우리 조선 인민들은 깊이 감사하는 바이로다."
참으로 천박한 역사 인식을 보인 것이지만,
이들 친일 주지들의 처지로 보자면 일제에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사찰령 시행과 함께 2가지 주요한 불교계의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불교와 승려들의 세속화의 길이었습니다.
1910년대의 한국 불교를 흔히 "주지 전단 시대"라고 부릅니다.
본사 주지들은 총독에게만 굽신거리면
다른 관료들에게 별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재산 처분도 로비를 잘 벌이고 충성도가 높으면
주지가 마음먹은대로 주무를 수가 있었습니다.
본사 주지뿐 아니라 말사 주지들도 같이 물이 들어
재산을 가지고 살면서 세속화(世俗化)의 길을 걸었습니다.
초기의 사법(寺法)에는
"아내를 얻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는
비구계를 허가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헛문서에 불과했습니다.
주지들은 버젓이 아내를 얻어 경내에 살림을 차리고
고기와 술을 먹으며 파계를 거듭하는 등
파계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면서 세속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러한 풍조가 만연하였으나,
총독부에서는 별로 간섭하지 않고 방임하였습니다.
이에 주지들은 일본 승려처럼 생활하기 위해
이 비구 조항을 삭제해달라고 청원하였고
1926년에는 총독부는 마침내 이 조항을 들어주어
조선 불교의 세속화를 촉진하였습니다.
친일 승려들은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보다 더욱 친일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평범한 역사의 진리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들 친일불교에 맞서서
1912년 한용운의 주도로 서울 대사동(현재 인사동)에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설립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에서는 원종과 함께 이를 폐지시켰습니다.
그런 뒤에 조선총독부 보호를 받는 30본산에 맞서
'조선불교회'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1910년대는 한용운을 제외하고
사찰령에 대한 반대하는 구체적 흐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3.1운동 이후
일부 청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사찰령과
불교의 세속화에 반대하는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두번째는 사회의 근대화와 함께
신교육을 받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적 '불교 개혁론'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즉, 식민지 시대 초기 친일 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자리에서
한용운, 권상로 등의 조선불교 개혁론이 등장하였습니다.
한용운의 불교 개혁론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한편, 권상로는 명진학교 출신으로
강원 교육과 근대 교육을 함께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권상로는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불교월보>를 통해 12회에 거쳐 조선불교개혁론을 연재하였습니다.
그는 조선불교가 대중에게 뛰어들지 못하고
폐쇄성 속에서 자기 발전을 도모했다는 기조에서 불교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는 부처님이 가르친 평등에 최고의 가치를 두면서
철저한 믿음을 통한 정신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어 재단을 만들어 재정 자립을 마련하고
불교인은 단합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교리 연마를 위한 교육 제도 개량을 주장했습니다.
권상로는 "불교개혁론"의 부제(附題)를
"진화자료"라고 단 것으로 보아도
<사회진화론>에 따라 종교간 경쟁을 통해
불교가 발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으며
이를 위한 재단의 설립과 근대 교육을 강조한 것도
일본 불교와 기독교의 전도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권상로의 개혁론은 실천 운동이 따르지 않고
그가 친일적 특성을 가진 탓에 현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민족 모순을 외면하여 한용운과는 다른 친일의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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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큰 절에는 '산중 공의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찰에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을 때
사찰의 원로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적 의사 결정을 하고
이것을 집행하는 차원의 주지 개념이었지
주지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전횡적 존재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즉, 주지의 권력이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찰령을 계기로 한 일제 시대 이후 주지의 역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찰령의 핵심은
절을 본사와 말사로 서열화시키고
주지들에게 권력을 적당히 주고
국가가 인사권을 통해 주지를 장악함으로서
불교계를 통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일제는 법력과 식견과 의식을 갖춘 승려보다는
일제에 순응하고 권력의 맛을 본 세속화된
승려들을 중심으로 주지직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은 불교가 정법으로 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권력의 힘 앞에서 비굴한 불교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 정신, 수행 정신을 잃어버리고
세속적 욕망에 지나치게 물든 승려들을 양산함으로서
한국 불교가 힘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11년에 제정된 사찰령의 망령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불교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 불교는
불교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세속법에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보다는
불교 권력의 이전투구 속에서 교단의 에너지가 낭비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해왔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서 많은 의식있는 불자들은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이어가는 승보의 일원으로
불교 교단의 그릇된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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