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한국 불교의 동향(6) - 조동종 맹약에 대항한 임제종 운동>

이회광 스님은 일본 조동종과 조선 불교 원종의
굴욕적인 연합 협약을 독단적을 체결하고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이회광 스님은 7개 조약 문항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보여 주지 않고,
일본 조동종과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였으니
찬성하여 날인해 달라고 하면서 전국 주요 사찰을 돌아다니며 홍보하였습니다.
이 때, 대부분의 큰 사찰이 여기에 찬성 날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약의 전문이
원종 종무원 서기에 의해서 양산 통도사에 알려졌습니다.
삽시간에 조선 원종과 일본 조동종 사이에
굴욕적인 협상을 맺었다는 사실은 전국에 알려졌고 그 의혹도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이에 한일합방 이후 한국 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팔아넘길 매종 행위라고 반대하는 승려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한용운 등의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임제종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굴욕적 조약을 맺은 조선 원종에
대항하기 위한 임제종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임제종 운동의 시작
일본 조동종과의 맹약 소동이 벌어진
1910년 10월은 한일합방이 이루어진지 불과 2달 후였습니다.
일본 선종 종파인 조동종과의 맹약 소동은
불교계의 한일합방으로 인식되어,
지방의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원종 지도부의 처신을 비판하는 여론이
지방의 강원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원종 종무원 창립 때 교무부장과 고등강사로 추대되었던
당대의 대강사였던 화엄사 진진응, 구암사 박한영,
그리고 경기도 화장사 화산강숙 교사로 있었던 만해 한용운 등이
제방에 여론을 조성하여 1910년 12월경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궐기 대회를 열자고 제안하였으나 준비가 미흡하여 유야무야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911년 새해가 밝자마자
진진응,박한영,한용운 등은 다시 여론을 조성하여
본격적인 임제종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1년 1월 15일 다시 광주 증심사에서
임제종문(臨濟宗門)을 표방하는 승려들이
수십명 모여 특별총회를 열었는데,
호남 사찰의 강원 학인들을 독려하여 임제종문을 한층 확장하고
순천 송광사에서 임제종 총회를 열자고 결의하였습니다.
이것이 임제종 운동의 시작인데,
이회광의 조동종 맹약을 비판하고
한국 불교의 역사적 전통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회광 맹약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
한국 불교는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 계통인데 반해
조동종은 같은 선종이라도 계파가 다른 것(조동종)이므로
한국 불교의 역사적 계통을 흐리게 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명분이었고,
그 본질은 실질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매종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1911년 2월 11일, 드디어 순천 송광사에서
호남의 승려 300여명이 모여 조선 임제종 종무원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원종과는 별도로 임제종을 설립하는 취지서를 채택하고
임제종 창종을 선언하였습니다.
아울러 송광사에 임시종무소를 두기로 하고,
관장으로 호남지역에서 명망이 높던 선암사 경운 스님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운 스님이 연로하였기 때문에
34세의 만해 한용운 선사를 관장 대리로 업무를 대리하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 임제종 포교당을 설립하는 사업도 함께 결의하였습니다.
임제종의 창종에 대해 창종 주역들은 다음과 같이 창종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920년 6월 박한영 스님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주의는 역사적 생명을 가진 우리 불교를
일본에 부속케 하는 것이 옳지 못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그 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그러한 사상을 발표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 현재 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발전한 것이므로
조동종과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소.......
만해 한용운 선사는 1931년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해>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박한영,진진응,한용운,김종래 등은
이 위기일발의 기를 승하여 분연궐기,
먼저 호남 일대에 반항의 기를 세우고
조선 불교의 부흥을 도모할새 원종의 연맹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임제종)을 별립하여 원종을 자멸케 함이 첩경이라는 견지에서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하여.....
한마디로 역사적 전통이 다른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합병할 수 없다는 자주의식에서 임제종을 창종하였다는 것입니다.

(2) 임제종 운동의 발전
임제종 지도부는 1911년 3월부터 송광사에
종무원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호남과 지리산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고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임제종 포섭 활동을 펼치던
호남의 명찰인 해남 대흥사는
1911년 2월에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1911년 5월 5일 하동 쌍계사에서
제2차 임제종 총회를 열고 대표자 100명이 참석하여
임제종 종지를 더욱 확산하기로 결의하고
교세가 큰 영남 지역의 주요 사찰의 동참을 설득하여
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한용운 등 5명의 승려들을 대표로 뽑아
먼저 부산 범어사를 설득하여
임제종 본산을 부산 범어사로 옮겨
영남권에 임제종 교세를 확산시키기로 약속하여
범어사의 참여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리하여, 호남 및 지리산 일대의 사찰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임제종 운동이
영남 지방의 사찰인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등의 사찰이 포함되어 더욱 그 기반이 확대되고
후일 이 세 사찰을 임제종의 3본산으로 정함과 함께 임시 종무소를 범어사에 두기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임제종은 창립 몇 개월만에 호
남과 영남을 포괄하여 남쪽에 확고한 기반을 내리게 되어
"남임제, 북원종"이라는 대립 구도를 짜는데 성공하여
원종을 압박하고 임제종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제종은 각 지역에 도시 포교당 설립을 활발하게 추진해 나갔습니다.
1911년 9월에 범어사가 부산 초량,동래 포교당을 세운 것을 시작하여,
쌍계사, 옥천사 등의 경남 사찰이 연합하여 진주 포교당을,
1912년 은해사가 중심이 되어 대구 포교당을,
1912년 8월에는 백양사,구암사가 전주 포교당을 개원하는 등
도시 지역을 거점으로 지방 포교당 설립을 확대해나가고
이러한 세가 확대되어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이 건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당대 최고의 부자절이었던 통도사, 범어사를 설득하여 자금을 마련하여
서울 대사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조선 임제종 중앙 포교당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1912년 5월 26일에 드디어 개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당시 개교식은 한용운, 백용성이 주도하였으며
1300여명의 대중이 참가하여 임제종 운동의 대중화 및 위상을 높여 주었습니다.

(3) 임제종 운동의 좌절
그러나, 임제종 운동은 1911년 6월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변되는
임제종 탄압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일제는 1910년 10월 조동종 맹약 후
일본 조동종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이회광이 주도한 조선 원종의 총독부 설립 인가도
허락하지 않고 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후였으므로
일본 불교계의 도움을 받아 조선 불교계를 간접통치하는 방식에서
총독부가 자체적으로 사찰령이라는 법규를 제정하여
총독부에서 직접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총독부에 의해 <사찰령>이 반포되고 뒤이어 시행규칙이 발표됨에 따라
서울 원흥사를 비롯한 각도 30개 수사찰을 30본산으로 정하고 주지를 임명하게 됩니다.
총독부에서는 조선불교가 선교겸수(禪敎兼修)를 종지로 하고 있다는
<경국대전>의 내용을 들어
한국불교를 <조선불교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는 애매한 종명을 쓰게 하고
조선인들이 합방 전후 자체적으로 세운 "원종"과 "임제종"의 간판을 내리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이에 <30본산주지회의>는 사찰령을 수용하여
일본 총독부가 내세운 <조선 불교 선교 양종>을 채택하게 됩니다.
이 때 해인사 주지로 임명된 이회광을 비롯한 원종 측 주지들은
총독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원종을 폐종하고
서울 원흥사 안에 원종 종무원 간판을 자발적으로 내리고
1912년 6월에 서울 원흥사에 "조선불교 선종양종 각 본산주지회의원"으로 이름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제종의 총본산이던 해인사, 통도사에 임명된
친일승려 이회광, 김구하로 하여금 임제종의 간판을 내리게 합니다.
그래도 임제종이 범어사를 중심으로 간판을 내리지 않고
공문서에 "조선 임제종"이라 작성하며 버티자
1912년 6월 29일 총독부는 경상남도 도지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첩을 내리고 임제종 활동을 제지시키기에 이릅니다.
"조선 사찰의 종지와 칭호는 수백년 전 종문제도를 세울때
선교 양종으로 정하였고, 그 후 변함이 없었는데도
경상남도 관내의 사찰로부터 제출되는 서류의 절 이름 위에
"조선 임제종"이라고 적는 자가 왕왕 있다.
이와 같이 각자가 제멋대로 종지와 칭호를 만들면
일반 승려가 귀의하고 향상하는데 의혹을 낳고,
혹은 이로 인해 종지의 같고 다름을 다투게 되고,
나아가서는 종파를 나누고 합하는 다툼의 소인이 되는 등,
불편하기가 적지 않을 것이므로 종전의 규칙을 지켜
사사로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
이 통첩으로 임제종 종무원의 간판은 범어사에서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임제종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만해 한용운 선사에 대해
포교당 건립자금으로 모집한 4,000원에 대해
일제 당국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재판에 회부하여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한용운 선사와 함께
임제종 운동을 주도하였던 박한영 스님도
임제종 운동과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되고
30본산주지회의에서 채택된 내용에 서명치 않았던
범어사 주지 오성월 스님도 일제의 탄압에 결국 굴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원종의 친일 음모에 대항하기 위한
임제종 운동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만해한용운 선사는 "임제종 포교당"의 명칭을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이라고 바꾸고 포교당을 확충하면서
포교활동을 강화하고 임제종운동의 지속을 위한 노력으로
"조선불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회의 성격 및 운영의 방침의 문제로 인해
내부노선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사찰령에 구속되지 않으려 했지만,
사찰령의 저촉을 받지 않을수 없는 주지들은 한용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만해 한용운 선사는 조직의 명칭을 <불교동맹회>로 전환하여
조선불교회 당시의 승려 및 신도들을 중심기반으로 삼았던 데서 바꾸어
그 조직의 기반을 학생과 청년 등으로 불교진흥운동(불교동맹회 운동)을 지속하여
그의 의지를 구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동맹회 역시 일제 당국의 제재를 받아 성사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만해 한용운은 '유심(唯心)'이라는
불교 잡지 간행을 통해 계몽 활동을 펼치며 후일을 기다리다,
3.1 운동이라는 민족 운동을 맞이하여 그 최일선에 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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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만해 한용운 선사가 없었다면
한국 불교가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까요?
다음 시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만해 한용운 선사의 불교 개혁을 살펴보겠지만,
의협심과 활동성을 갖춘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만해 한용운 선사에 대해 한국 불교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 불교계의 승려의 주류는
대부분 일본 불교 세력이나 국가 권력에 기대어 교단을 운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난 것이 이회광의 "조동종 맹약"이었습니다.
국가의 인가를 받기 위해 한국 불교를 일본 종파에 매종하려 했던
굴욕적인 행동에는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불교계 다수가 무기력하게 굴욕적 상황에 대해 수수방관했던 것이 아니라
최소한 매종적 행위만은 막아야한다는데 공감하고 지방 강원들의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이 부당한 행위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제종 운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임제종 운동의 중심에는 청년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있었습니다.
임제종 운동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임제종의 조직화와 도시 포교를 위해
만해 한용운 선사가 얼마나 열의와 성의를 갖고
발로 뛰어다녔는가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직후,
자주적 불교 종단을 추구하고 조동종 맹약에 대항한
한국 불교의 자주화 운동이었던 임제종운동은
당시 불교계의 나약한 현실인식, 일제의 외압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회 현실에 대해 무감각하고 피해 의식에 젖어 있던 불교계가
최초로 불의에 항거하여 활동다운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있습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사라는 활동가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잠자던 한국 불교계를 깨운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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