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불교 근대사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1) - 파란 만장한 만해의 청년 시절

by 아미타온 2025. 12. 11.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1) - 파란 만장한 만해의 청년 시절>

 

<만해 한용운 스님 동상>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입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항일 투사이자

<님의 침묵>을 쓴 시인으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청정한 양심입니다.

 

아울러 만해 스님은 승려로서

조선조 이후 쇠락해 가던 불교계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구세주의'와 '평등주의'라는 불교의 가치에 입각하여

불교계의 혁신적인 변화를 갈망했던 불교 개혁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간부터 만해 한용운 스님의 일생과

그가 지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만해가 개혁하고자 했던 조선 불교의 모습과 비젼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한말과 일제 시대라는 풍운의 시절을

올곧은 양심으로 살아간 그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홍성군 결성면 만해 생가지>

 

(1) 출생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만해 스님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습니다.

어린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9살이 되던 해에 <서상기 (西廂記)>와 <통감 (通鑑)>을 독파하고

<서경(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한응준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기백이 있는 강직한 선비로서

자주 어린 자식들을 불러 앉혀 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해 스님는 후일 아버지의 교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결사의 언행을 가르쳐 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에 대해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그런 말씀을 한번 두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나도 저 의인 결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하였다."

  

이 대목에서 훗날의 만해 스님을 이해하는데,

아버지의 가정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버지로부터의 감화와 함께

당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도

만해 스님으로 하여금 시대 정신과 역사 의식에 눈뜨게 했습니다.

만해가 살던 시절은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과 함께

안으로는 변혁을 바라는 민중의 요구가 분출된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만해 스님이 태어난 홍성 홍주읍성 조양문>

 

(2) 홍성 홍주성 전투

 

만해의 나이 16세인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으며,

동학군의 기세는 삽시간에 정읍,태인,김제, 전주를 함락시켰습니다.

 

동학군의 기세에 당황한 조정은 청나라의 출격을 요청했고,

이에 반발한 일본군이 함께 출격하여 청일전쟁의 참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한학에 정진해오던 만해는

14세 때 '전정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였고

16세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등

당시 풍속에 따라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 때 고향 홍성 땅에서

직접 마주 대한 전쟁의 참혹한 실상 속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해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집을 떠나 방황했습니다.

그는 무작정 집을 나와 전국을 방랑하고 자신의 갈 길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궁리 끝에 그는 인생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름난 선지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오대산 월정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식은 만나지 못하고

허기와 실망을 안은채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인생의 고뇌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뜻을 품고 내가 서울을 향하여

고향을 떠나기는 내 나이 열 여덟 때의 일이었다.

 

'큰 뜻을 이룬다니 한학의 소양밖에 없는 내가

무슨 지식으로 큰 뜻을 이루나! '

 

이런 생각 끝에 나는 9살 때 읽었던

서상기(중국 전통 희극)의 통곡 일장에 마음이 쏠려졌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열심히 살자 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다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이 되고 무색(無色)이 되고

무형(無形)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나의 회의는 더욱 커져갔다.

나는 이 회의 때문에 머리가 혼란해짐을 깨달았다.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

라는 결론을 얻고 나는 서울 가는 길을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에 이름 높은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갔다."

 

<백담사>

 

(3) 백담사행과 세계 여행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70리 대관령 굽이길을 넘고 넘어 당도한 곳이 내설악 백담사였습니다.

이렇게 만해는 처음으로 설악산 백담사로 첫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년간 승방(절) 생활을 하였으나,

조선 이외에도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담력이 크고 모험심이 강했던 만해는

드디어 세계 일주의 장도에 오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만해는 행장을 차려 하산하였습니다.

 

"내가 입산한 동기가

단순히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만큼

유벽한 설악산에 있은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무전 여행으로 세계 유람을 떠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세계의 사정과 지리를 너무나도 모르는 바이므로

세상의 사정을 그래도 대강이라도 알려면

서울로 가야 하리라는 생각으로 백담사를 떠나 서울로 향했는데....."

 

만해는 서울에서 지도와 책을 구했고,

러시아,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리라고 생각하고 원산에서 배를 탔습니다.

 

원산에서 배를 타고 떠나 연해주 블라디보스톡(海參威)의 신항구에

도착하자말자 뜻하지 않던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스러운 중의 옷차림을 수상히 여긴 블라디보스톡 동포들이

그를 친일파인 일진회(日進會) 회원으로 오인하여

다짜고짜 죽이려 들이려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일진회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세력과 일본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다시 러시아 세력이 대치해 들어왔을 때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양 세력 중에 일본을 지지한 무리들이 규합한 단체였습니다.

 

당시 블라디보스톡의 동포 중에는 의심이 가는 조선 사람만 보면

일본의 첩자(일진회원)로 알고 잡아 죽이려 들던 때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봉변 앞에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면서

당당히 맞서서 기지와 담력으로 담판을 벌였습니다.

 

죽더라도 뼈만은 조선 땅에 묻어달라는 요청에

오히려 그들이 당황하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만해는

세계 여행을 포기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만해는 두만강을 건너 고국땅으로

다시 돌아와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 수업을 쌓았습니다.

 

<영환지략>

 

(4) 비구 출가와 일본 여행

 

1904년, 26세 되던 해에 만해는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정식 승려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이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 만해 스님은

1970년대에 소실되어 지금은 없어진

설악산 오세암 장경각에 쌓여있는 불교경전은 물론

외전과 내전을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이 들춰본 뒤로

먼지 속에 묻혀있던 귀중한 고서들을 꺼내

오랫동안 지식에 굶주린 사람처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세속에서 배웠던 한학이

그의 경전 공부에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오세암 장경각의 경전들은 그동안 쌓여있던

만해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아울러 학암(鶴庵) 스님을 모시고

《기신론》, 《능가경》, 《원각경》과 같은 불교 경전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백담사 연곡 스님에 의하여 또 다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연곡 스님은 당신의 셋째 상좌인 만해의 뛰어난 한학 실력에

큰 기대를 가지면서 뒷바라지를 정성껏 해 주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금강산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며

유학승들의 왕래가 많았던 백담사의 본사인 건봉사에서

그때 널리 읽히던 두 권의 책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이 곧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과 <영환지략 瀛環之略>이었습니다.

 

이 책을 받아본 만해는 새로운 충격에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음빙실문집>은 청나라 말기 구국의 뜻을 품은

변법자강파의 대학자 양계초(梁啓超)의 계몽서적이자 혁명서적입니다.

 

이 책을 통해 칸트와 루소, 베이컨 등 서양철학에까지 접하게 되었고,

우승열패, 약육강식 등의 사회개조론과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보며 

사회 개혁과 진보에 대한 현실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환지략>은 세계의 지리와 풍습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지리서였는데,

이를 통해 넓은 세계와 문화에 대한 만해의 지식욕과 탐구욕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만해는 세계 정세와 신문물을 더 널리 알기 위해

1908년 4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에 다서 만해는 교토(京都), 도쿄(東京) 등을 시찰하며

신문물을 접하였습니다.

 

일본인 아사다 교수가 동경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도록 배려하여 주었고,

당시 메이지 법대에 유학 중이던 3.1운동 33인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이 될 최린을 만나 사귀게 되었습니다.

만해는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를 수입하고

이를 익혀 조선 땅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측량 기계가 들려 있었고

조선 땅으로 들어가는 측량 기계가

토지 수탈의 도구로 쓰여질 것을 생각하니 만해는 한없이 안타까웠습니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측량술을 공부한 일본인들이

조선땅으로 와서 하는 짓은 바로 토지 수탈이었기 때문입니다.

 

농본사회이면서도 토지개념이 희박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지은 것이니까

그대로 내가 지으면 된다는 생각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측량해 주겠다고 해놓고는

3000평 땅을 2500평으로 기록해버리고

2∼3년 후쯤 다시 와서는 국가의 땅을 허락도 없이 500평 더 경작해 왔으니

세금을 내라는 식으로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 부족했던

우리 민족은 눈 뜬 채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땅덩어리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본인의 수중으로 다 넘어가겠다고 생각한 만해는

일본에 갈 때에 마음 먹었던 일들을 그만두고 측량술을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서둘러 측량술을 배워 일본 생활 6개월을 청산하고,

그 해 가을(10월) 손에 측량기계 하나를 사들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2월 10일 그는 서울 청진동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측량 기술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사찰이나 개인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는데 앞장서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항일 의병이 일제에 대항한 홍성 홍주성 전투>

 

(5) 만주행과 피격 사건

 

이듬해인 1909년 서울을 떠나 만주로 향했습니다.

이회영, 이시영, 김동삼, 박은식 등의 독립운동가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 등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밀정으로 오해받아

통화현에 있는 굴라재를 넘다가 독립군 청년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총을 맞은 긴박한 생사의 기로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종교 체험을 통해 

더욱 강한 불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있는 신앙은 그때에 실체를 드러냅니다.

죽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아름답다! 기쁘다!

눈 앞이 부시게 환하여 지며

내 앞에 절세의 미인이 섬섬옥수에 꽃을 쥐고

나에게 미소를 지운다.

 

그러나, 나는 이때 생각에 총을 맞아 누운 사람에게

미소를 던지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감상이 설레였다.

 

그녀는 나에게 꽃을 던진다.

그러면서 "어찌 네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그대로 가만히 있느냐?"하였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그러나, 뼈 속에 박힌 탄환은 아직 꺼내지 못한 것이 몇 개 있으니, 

신경이 끊어져서 날이 추우면 아직도 고개가 휘휘 돌린다."


피투성이의 혼수상태 속에서 여인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겨우 깨어나

마을까지 기어온 만해는 수술을 받아 겨우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받으면서

나라 잃은 슬픔이 이 육신의 아픔에야

비교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견디었다고 합니다.

 

훗날 자신들의 오해로 잘못된 일임을 안

독립군 청년들이 찾아와 만해에게 사죄했을 때

그는 담담한 어조로 조선의 혼을 간직한 청년들의 기개를 오히려 칭찬하며

만주의 많은 동포들을 잘 조직하고 교육시키는데

온 힘을 다해 달라고 격려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사의 기로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만해는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

 

<홍성 홍주 의사총>

 

만해 한용운 스님의 청년 시절을 살펴보면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살았슴을 알수 있습니다.

 

절에 틀어박혀 참선만 하는 일반 스님 이미지와는 달리

세상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길을 찾아 만행하는 스님의 삶이었습니다.

 

대승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갖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법의 깨달음과 자신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수행자가

바로 대승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의 모습입니다.

 

만해 스님의 청년기를 보면 

세상과 인생의 고뇌 속에서 

자신의 확장과 세상의 구제를 위해

발로 뛰는 치열함과 성실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바탕 속에서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만해 스님의

보리심을 엿볼 수 있는 청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