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한국 불교의 동향(4) / 불교연구회, 명진학교의 창립과 일본 불교 관리청원>

1895년 일본인 스님의 도성 해금 건의를 계기로
일본 불교의 한국 침투는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조선 왕조에 의한 불교 관리인 사서관리서가 폐지되고
원흥사의 기능이 축소된 상황에서 일본 정토종의 영향 하에
불교연구회가 원흥사에 조직되면서 준종단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연구회는 불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에도 관심을 보이는 등 불교 근대화에 공헌한 부분도 있었지만,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많이 받아 친일적인 색채가 농후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한국이 외교적으로 일제의 보호국이 되고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이 되면서 국권이 상실한 위기에 처하자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화되면서 반일의 분위기가 드높아졌습니다.
이와 동시에 의병들의 근거지로 산간의 사찰이 활용되면서
일본군 수비대의 사찰 방화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의병 전쟁의 와중에서 수탈과 방화로부터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자구책의 하나로서
일본의 여러 종파 불교의 말사로서
관리를 청원하는 굴욕적인 형태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1) 일본 불교의 조선 침입
1895년 일본 일련종의 승려 사노의 주청으로
승려의 입성 금지가 해제된 것을 계기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도성 해금이 되는 형국을 되어
일본 불교의 한국 진출은 더욱 급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울러 수백년간 억불정책 하에 신음하던 조선 스님들도
일본 불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1900년에 쓰여진 가토 분쿄(加藤文敎)의 <한국개교론>은
한국 포교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팽창하는 선진국의 명예를 안고 우리 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세계 불교의 중심인 우리 일본 제국의 불교도로서
이웃 나라 한국을 포교할 필요가 있음을 일반 식자들은 인정하는 바이다.
한국은 일본에게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불교 문물·미술·기술·예술·건축 등을 전해주어
일본을 이익하게 한 은혜의 나라인만큼
그 당시 불교가 땅에 떨어지고 외교도(外敎徒 : 기독교)에
탈취되기 직전의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해내기 위해
일본의 불교도가 포교책을 강구해야 된다."
일본 불교는 개항(1876) 초기에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오타니파(大谷派) 본원사와
일련종(日蓮宗)이 주로 활동하였습니다.
중기에는 청일 전쟁(1894) 직후로서
정토진종 혼파(本派) 본원사와 정토종이 활동한 시기이며,
말기에는 러일전쟁(1905) 후에 진언종(眞言宗)과
조동종(曹洞宗), 임제종(臨濟宗)이 개교(開敎) 활동을 벌이며
각 종파들이 한국 불교 포교를 더욱 활발히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들이 한국 불교에 들어와 어떤 방식으로 포교했는지는
정토종의 예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98년 개교부사 이토오(伊藤祐晃)가 정토종의 명에 따라
서울 일본인의 집에 투숙하며 조선포교소를 시작하였다.
1900년 정토종은 일본공사관의 소개로 고종을 알현하여
정토종을 한국에 전도할 의사를 개진하여 이를 허락받았다.
1901년에는 고종 황제의 재가를 얻어
고종 황제 및 황태자의 존패(尊牌)를 포교소에 안치하였고
황태자의 생일에 맞추어 축원제 행사를 거행하고
고종으로부터 권선금을 받고 황태자의 송덕문을 읽었다.
그리고, 정부의 고관대작들을 대대적으로
법회에 참석시키기 위해 노력하여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토종은 황실과 고관 대작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일본 종파로 사람들은 인식하게 되었다.
1900년 4월에는 한국어 연구생 쓰루타니(鶴谷誠隆)을
주석시켜 한국어를 습득시켰다.
그리고, 교회소 소속에 여러 개의 일본어 학당을 만들어
한국인들의 일본어 습득을 가능하게 하였다.
1901년 한국인 포교를 개시한 이래 한국인의 왕래가 빈번하자
상시 통역사를 둠으로써 한인 포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1902년에는 <정토종 강요>라는 일본 정토종의 역사와 교리를 번역한
한국어 교본을 반포하여 포교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아울러 정토종 경성교회 내에서 <동양교보(東洋敎譜)>라는
한국어 및 일본어로 된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한국 포교의 활성화에 전력하였다.
(동양교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잡지였다.)
1901년 8월에는 경성교회 안에 부인회(婦人會)를 두어 여성불교를 활성화하였고,
지방 포교에도 관심을 둠으로써 경성,인천,개성,수원 등의 경기 지역과
부산,마산,대구 등의 경상도 지역, 군산,강경 등의 전라도 지역,
평양, 남포와 황해도 해주 등의 조선 주요 도시에 포교소를 설치하였으며
한국인 회원이 약 3만 2천명에 달했다."
이처럼 정토종은 조선 황실과의 밀착을 통해
포교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으며,
포교에 방해가 되는 언어 장벽 해소를 위해
어학당 설립을 통해 통역사 양성을 통해 포교능력을 확대화시켜나갔습니다.
한편, 일련종의 경우에는 포교를 위해
신규 포교당을 설립하면 비용이 많이드니
한국 사찰을 이용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일본 일련종의 가토오(加藤文敎)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한국 팔도에 대한 포교의 보급을 도모하려면
국내 주요 장소 30여 개소에 회당을 개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신축하는 데는 재정적 난문제가 따르게 되니,
차라리 한국 사찰을 이용함이 어떠할까?
즉 한국 현존 사찰 1,600개사 가운데 편의한 사찰을 선택,
일·한 승려 공동의 회당으로 쓴다면
한국 승려도 또한 후의로써 그것을 승락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미 10여 개사의 내약(內約)을 받은 바 있거니와
이것은 매우 편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사찰은 매우 견고하니 조금도 부자유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1900년경에는 일련종에서도
한국 사찰과의 절충을 감행,
10여 개사의 내약을 받고 ‘공동회당으로 쓰기로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계(戒)를 받는 한국 스님들이 생기는가 하면,
또 일부에서는 통감부를 움직여
‘사재보호(寺財保護)에 관한 법령’을 내리도록 종용한 예가 있었습니다.
이와 깉이 일본 각 종파의 적극적인 한국 포교로 인해
한일합방 후인 1911년 1월말까지 일본 불교의 포교소 설치 현황은
정토진종 대곡파 23, 정토진종 본파 22, 정토종 25, 진언종 11,
조동종 7, 일련종 9개소 등의 6개파 97개소에 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 불교의 활발한 한국 진출에 대해
당시 불교계는 이러한 일본 불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억압 상태에서 해방감을 느낀 조선 불교계는
자존심을 망각할 정도로 굴욕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2) 불교연구회와 명진학교의 설립
구한말 불교를 국가적 통제 하에 두려 했던 '사서관리서'의 폐지와 함께
대법산인 원흥사가 유명무실화되자
원흥사는 수사찰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을 가진 일개 사찰로 전락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원흥사의 넓은 건물은
자연히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국내에 침투한 일본 불교계도 원흥사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근거지로 사용하려고 여러 모로 탐을 내고 있었습니다.
1906년 2월, 이보담(서울 봉원사), 홍월초(서울 화계사) 스님 등 9인은
일본 정토종 개교사 이노우에(井上玄眞)의 제안과 충고에 따라서
"일본 정토종에 참여한 스님들이 신학문의 교육방침을 연구하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신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불교연구회'를 원흥사에 창설하였습니다.
불교연구회는 '정토 신앙'을 종지로 삼았으며,
연구회원에게 50전의 회비를 받고
8각형 모양의 금도금에 '정토종교회장"이라는 6자로 된 회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불교연구회'는 조선에 건너와 가장 왕성하게
포교 및 교육 활동을 하던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회장으로 선임된 홍월초(1858~1934) 스님은
1892년 남한산성 승군대장인 팔도도총섭을 역임했고,
1902년에는 원흥사의 내산섭리(서울 근방의 절을 관리하던 직책)를 역임한 권승(權僧)으로서
황태자가 병을 앓았을 때 고종의 부탁으로 100일 기도를 올렸을만큼
조선 황실의 신임도 두터운 스님이었습니다.
홍월초는 일본 정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원흥사의 고위직책을 역임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연구회의 조직력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전국의 27개 사찰을 수사찰(首寺刹)로 두어 관리하고
회원들에게 연50전의 회비를 거두어 연구회를 운영하는 등
근대적 준종단의 형태로 불교연구회를 확대시켰습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원흥사에 명진학교(오늘날의 동국대학교)를 세워
승려 교육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홍월초 스님은 불교연구회 회장이면서
1906년 3월에 명진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홍월초 스님은 각도 수사찰에
명진학교로 학생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1달만에 약 100여명의 승려들이 명진학교로 운집하였고,
학부에 명진학교 인허가를 보내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에 정부는 원흥사를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불교연구회 및 명진학교 명의로 원흥사 부지를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명진학교는 13세에서 20세에 해당하는
젊은 승려들을 모집해서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불교 관련 과목 이외에 역사, 지리, 산수, 외국어(일본어) 등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불교연구회는 명진학교의 분교 형태로
지방의 주요 사찰에도 보통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습니다.
1906년에 해인사가 명립학교, 통도사가 명신학교,
범어사가 명정학교, 대흥사가 대흥학교 등 8개 사찰이 학교를 개교했습니다.
1907년에는 전주 위봉사가 봉익학교,
경북 대승사,김용사,남장사 등 6개사찰이 협력해 경흥학교를 세워 나갔습니다.
그래서 일본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승려 교육을 통해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계의 학교 설립은
불교 재산을 지키려는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계나 기타 공립, 사립 학교가 설립되면서
사찰의 토지가 학교 부지로 빼앗기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905년 평안도 의주군 남산사의 건물을
기독교인이 점령해 교회당으로 사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906년에 음성 성주사에서는 지방 관청이 근대식 학교를 짓기 위해
사찰 소유의 토지를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사찰이 헐리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등
이러한 의도를 막고자 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찰의 토지는 서울을 중심으로 공적 소유라는 개념이 있어서
불교계의 의견을 듣거나 허락을 받아 결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학교 재정으로 삼으려는 계획이 있어
불교계에서도 불교 재산을 지키려는 측면이 강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홍월초,이보담 등의 불교연구회는
일본을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일본 불교 포교 방식을 모델로 하여
조선불교를 근대화시키려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 불교를 일본 정토종에 편입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습니다.
이무렵 일본 정토종 승려가 교사로 통도사에 들어가 실권을 거머쥐고,
통도사를 정토종 말사로 편입하려다 쫒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 일본 정토종의 이노우에가
내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원흥사를 15년간 무상으로 임대하여
한국 황실축원 및 일본 정토종의 부속 교사로 사용하기를 원한다고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되어 일본 정토종의 영향으로
정토종을 종지로 삼아 설립된 불교연구회는
"정토종을 종지로 삼는 것은 조선 불교가 정토종 일색이 되어
일본불교에 예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1907년 6월에 각도 사찰 대표자 50여명이
불교연구회에서 총회를 열었는데,
이때 불교연구회장 및 명진학교장이었던 이보담이 사임하면서
해인사 주지 이회광을 그 대표로 추대하였습니다.

(3) 의병 전쟁과 사찰 방화
이 무렵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1904년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1905년 7월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보장받았습니다.
국제 관계를 정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조선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 보호 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면서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실질적으로 한반도가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산 속에 위치한 사찰들은 의병들의 아지트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05년 일제는 강원도 두타산 삼화사가 의병들의 근거지라고 해서
200칸의 당우를 모조리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06년에는 경북 문경 천주사 주지 창교 스님이
의병을 절에 유숙시키고 비호했다는 구실로
일본 군인들이 천주사를 방화하고 창교 스님을 총살하였습니다.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전북 임실의 이석용 의병 부대는
임실 내원사와 상이암 등의 사찰을 근거지로 움직였고,
상이암의 봉수,덕홍,계화 스님이 의병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일본군은 상이암을 불태워버렸습니다.
1907년 9월에는 금강산 유점사에 의병 700여명이
약 11일간 은둔하다가 고성읍으로 진격한 사건을 문제삼아
일본은 유점사를 "적의 소굴"이라 하고 주지 금담화상을 비롯해
21명의 승려를 구속하고 절을 불태우려 하였습니다.
이 때 주지 스님의 지혜와 설득으로
산문을 닫고 하산하는 조건으로 겨우 방화를 피했습니다.
이듬해 봄 유점사에 일본 헌병분대가 주둔하고 나서야
유점사는 다시 산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금강산 건봉사도 같은 이유로 방화하려 하였는데,
마침 일본 조동종에서 수계를 받은 승려가 나서서 애걸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1907년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도 일본군이 들이닥쳐
의병이 부근에 모인다고 무자비하게 불을 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해 세종대왕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각,
나한전,노전,범종루 등 유서깊은 당우가 불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용문사에서 서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상원사도 방화하여
종각과 종만 남기고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지리산 법계사(1600m)도 참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1908년 의병장 박동의가 법계사에 은거하며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패해는데 일본군은 법계사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1907년 7월, 강화도 전등사에서 일제의 군대 해체 압력으로
해산 군인과 기독교인 수백명이 대규모 반일집회를 갖고 반일집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일을 빌미로 의병의 소굴이라며 일제가 전등사를 불태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주지 국창환 선사가 단신으로 극구 변명하여 천신만고 끝에 절을 지킬수 있었습니다.
1908년 4월에는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일제 헌병대가
수색 과정에서 동암과 보조암에 불을 질렀습니다.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에 대해 일제는
잠재적인 근거지를 모조리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여
수많은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일제는 변변찮은 무기로 맞선 의병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하여
전사자가 1만 7천여명, 부상자가 3천 여명으로
부상자보다 전사자가 훨씬 많은 참혹한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 속에 위치해 의병들의 아지트가 된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의 피해 또한 엄청나게 큰 것이었습니다.

(4) 불교계의 일본 불교 편입 관리 청원
한편, 교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일제의 사찰 방화의 만행을 피하려고 자구책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찰이 일본군의 만행으로부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일본 불교 종단에 관리 청원을 한 것이었습니다.
관리청원은 이러한 불안한 정치 상황 외에도
일본 불교에 대한 호감 내지는 의타심에서 발생하는데,
1906년을 전후하여 '일본OO종파와의 연합' 또는 '말사 가입'을 뜻하는
'관리 청원'을 요청하는 굴욕적인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찰의 일본 불교 종파에 대한 '관리청원'의 배경에는
단순히 의병들의 피해로부터 벗어나고
일본 불교에 대한 호의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설치된 통감부의 종교 통제 정책도 한몫을 차지했습니다.
1906년 11월에 통감부는 부령 제45호로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공포하였습니다.
그 제4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선 사찰 보호 병합 규칙을 명시하였습니다.
불교 종파의 관리자 또는 포교자와 기타 일본 신민으로서
한국 사원 관리의 위촉에 응하려고 할 때에는 필요한 서류를 첨부하여
그 사원 소재지의 소관 이사관을 경유하여 통감부의 인가를 얻어야 한다.
이 관리 규정이 발표되자 일본 불교 각 종파는 앞다투어
조선 사원 관리를 통감부에 신청하였습니다.
사찰(예 : 통도사)에 따라서는
일본 측의 말사가입 공작을 단호히 거부한 예도 있으나,
예를 들어, 당시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에 다음과 같은
여러 사찰이 관리를 청원하고 있었습니다.
① 통감부로부터 허가까지 얻은 사찰 :
김천 직지사, 철원 사신암, 박천 심원사, 과천 연주암
② 청원은 냈으나, 허가를 얻지 못한 사찰 :
안주 대불사, 영변 보현사, 영변 법흥사, 영동 영국사, 고산 화암사,
합천 해인사, 서울 화계사, 진주 대원사, 용담 천황사, 회양 장안사,
전주 학림사, 서울 봉국사, 동래 범어사, 구례 화엄사
충격을 주는 것은 김천 직지사, 영변(묘향산) 보현사,
합천 해인사, 동래 범어사, 구례 화엄사 등
이름만 들으면 알수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큰 사찰들이
일본 정토진종의 말사로서 관리 청원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 사찰이
일본 종파와 부화뇌동하여 친일 성향을 노출하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정토진종 본파에 청원한 사찰은
'말사 대장에 등록한 것이 약 100개사'이고,
기타 청원 중인 것도 많았다고 한다 라는
일본측 자료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진출한 여러 일본 불교 종파까지 감안한다면
엄청 많은 수의 한국 사찰이 관리청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 사찰들의 동요는,
때로는 일본인 승려 자신에게까지도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자못 시끄러운 현상들이었습니다.
일본의 각 종파가 한국 사찰 획득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본
일본 조동종의 승려 다케다는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지난번 통감부 초기에 선포한 종교에 관한 포고령 가운데에
“일본 승려로서 한국 사찰를 관리코자 하는 자는,
피차가 연서청원(連署請願)을 해서 윤허를 얻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이에 각 종파에서는 다투어 그 관리권을 얻어내고자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들은 한국 승려들의 우매함을 악용,
기를 쓰고 사약(私約)을 맺는 경우가 허다히 있었다.
그리하여 그때 나는 이를 보고서 이렇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우리의 포교승들이 조선 민족을 위해서 들어와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가람을 약탈코자 해서 그 틈을 엿보고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어떤 일본 스님은
동족인 일본 불교의 발호함에 개탄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요컨대 ‘입성해금’ 이후
불교 교단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주체성이
얼마나 박약했던 것이었던가를 나타냅니다.
===============

구한말 특히 1900년대에 사회 사상에
큰 영향을 발휘한 것은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은 각 민족이 생존 경쟁하고
제국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다윈의 진화론처럼
우열성패,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으로서 설명하고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화론은 제국주의가 팽배하고
국권이 위태로운 당시 현실에서 국민들에게 쉽게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애국계몽주의 운동의 입장에 선 지식인이나 단체들은
<사회진화론>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정, 해석하여 민족주의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학회운동, 민족사관 정립, 산업발전을 강조하며
우리 민족의 지식과 실력을 증강하자는 자강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구체적 방책으로 지식과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교육 구국 운동과
산업 발전을 통한 세력 증강을 해야 한다는 실업 구국 운동 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입성 해금'을 계기로 불교계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
불교계 내에서도 진화론을 수용하여
조선 시대 이후 낙후되었던 불교계의 사회적 위상을 만회하고
불교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 불교계의 일부는
일제의 후원 하에 한국에 침투하고 있는
일본 불교 종파 세력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진화론의 현실 인식 하에 힘있는 일본 및 일본 불교에 대해
지나치게 우호적이고 의지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민족 운동 단체들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민족을 발전시켜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데 반하여
당시 불교인의 주류들은 대사회적인 인식 없이 불교의 틀 속에서만 갇혀
힘있는 일본 및 일본 불교의 힘을 빌어 한국불교를 유지하겠다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불교계의 활동들을 살펴보면
민족의 독립이니 자존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은 찾을 수 없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한 묵인 내지는 적극 협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 불교의 도움으로 학교 설립이나
불교 선진 제도를 받아들인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행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일제에 의지하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불교계의 활동이 일본 식민 통치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이에 벗어났을 때는 일제에 의한 간섭이나 통제를 받게 되고
여기에 대해 항상 깨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활동의 폭 밖에는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한말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는 일제 시대 36년간
많은 부분 한국 불교의 친일적 한계성을 노출시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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