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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개항기 한국 불교의 동향(5) / 원종의 창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맹약 소동

by 아미타온 2025. 12. 6.

<개항기 한국 불교의 동향(5) / 원종의 창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맹약 소동>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 올라가는 길>

 

 

일본 불교에 기울어진 한국 불교의 친일 행각 중 대표적인 것은

1910년 불교연구회를 계승하여 범종단으로 발전한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연합 소동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불교를 일본 특정 종파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으로

'한국 불교의 한일합방'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자존심을 판 망동이었습니다.

 

 

<친일 승려 이회광>

 

(1) 원종(圓宗)의 성립과 친일승려 이회광 

 

원흥사 폐지 이후 불교연구회를 운영했던 불교계는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 정토종과 깊숙히 밀착되어 문제가 되었던 

불교연구회 및 명진학교의 홍월초, 이보담 체제를 대신하여

새롭게 제3대 불교연구회장 및 명진학교장으로 선출된

해인사의 이회광 스님은 '원종(圓宗)'이란 새로운 종단을 설립하고자 했습니다.

 

'불교연구회'는 비록 전국적 지부를 두고 있어 준종단적인 성격이 있었지만, 

명칭대로 교육과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단체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불교 교단을 통괄하는 기관으로는 부족한 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조직적으로 불교계를 통솔할

종단의 필요성에 대해 조선 불교계 내부에서 대두되었습니다.

 

또한,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어

세간에서는 "정토종 연구회"로도 불렸습니다.

 

그래서, 홍월초,이보담 체제에서 선승(禪僧)인 이회광 체제로 바뀌면서

일본 정토종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던 '불교연구회'의 성격이 

한국 전통의 선종 계통의 불교와는 맞지 않아 

여기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도 하나의 큰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한편, 원종 창설의 주역이었던 이회광(李晦光, 1862∼1931) 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이회광 스님은 1862년 강원도 양양군 출신으로

19세때 설악산 신흥사로 출가하여 정함(定含)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범해 각안(梵海 覺岸)이 우리나라 고승들의 행적을 기록한

<동사열전(東師列傳)> 에 의하면 이회광 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회광 스님은 28세의 나이에

보운 긍엽 선사의 법맥을 상속받은 뒤

강당을 개설하고 독자적으로 설법을 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양서(兩西,황해,평안), 삼남(三南경상,전라,충청)의

학인들이 풀덤불을 헤치며 몰려들었다.

 

그의 인품에 대해 하룻밤 그가 자고 가면

마치 사향노루가 봄바람에 노닐 적에

풀밭 위에 저절로 향기가 남아 있는 것과도 같았다."

 

또 한번만 이회광과 대화를 하면 마치 맑은 달이

정중승(定中僧=定中에 들어 있는 수좌)을 비치듯이 속이 자못 시원하였다.

 

이와 같이 이회광 스님에 대해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회광 스님의 경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푸레나무 꽃향기를 맡아 보았나       ( 聞木花香乎 )
매화의 열매가 무르익었음을 보도다.   ( 看梅子熟矣 )
네 거리 술집에서 흠뻑 취하여,            ( 滿醉於衢樽 )
돌아오니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도다. ( 歸家破問程 )

 

<동사열전>의 저자인 범해 각안의 입적 연대가 1896년이니,

이 해에 저자가 <동사열전>을 썼다 해도

이 당시 이회광 스님의 나이는 불과 34살이었습니다.

 

 30대 초반에 벌써 이와 같은 찬사를 들었던 것과

이 책을 쓸 때에 같은 연대에 고승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동사열전>에서 유독 당대의 고승으로 이회광을 수록하였다는 사실에서

이회광 스님이 당대의 유명한 선사로 이름을 떨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보담 체제를 대신하여 이회광이 불교연구회 및 명진학교장에 선임된 것은

이처럼 조선 불교계 내에서 당대 최고의 선승이자 강사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이회광 스님은 1908년 3월 6일 각 도의 사찰 대표 52명이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불교연구회'를 폐지하고 대신 드디어 "원종(圓宗)"이라는 불교 종단을 선포하였습니다.

 

원종은 행정적 실무를 총괄하기 위한 

종무원(오늘날의 총무원과 같은 기관)을 설립하였으며

대종정 이회광, 총무 김현암, 교무부장 진진응,

학무부장 김보륜, 김지순, 서무부장 김석옹,강대련 등의 임원단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국 13도 유명 사찰 대표 65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명실상부하게 조선 불교의 대표적 성격을 갖는 기관으로 출발했습니다.

 

종단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한 것은

불교 발전을 위해 원융무애하게 뭉친 종단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회광의 일본 임제종 연합 책동 관련 당시 동아일보 기사>

 

(2) 원종의 국가 인가와 관련된 일본 조동종 연합 책동

 

그러나, 원종 종정이 된 이회광 스님은 선의 경지는 높았을지 몰라도

올바른 민족 의식이나 사회적 문제 의식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불교의 발전은 일본 불교의 협력을 통해야만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통해

"조선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 불교의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설득을 받고

이를 수용하여 일본 조동종 계통의 정치 승려인 다케다(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영입하였습니다.

 

다케다는 메이지(明治)시대 천황주의 극우단체인

흑룡회(黑龍會)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정치 승려로서

구한말에 한국에 들어와 한국 종교계에 깊숙히 관여하며 

한일합방을 위해 아주 깊숙히 이면 공작을 벌이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경력은 대충 이렇습니다.

 

① 1863년(명치 3년) 출생, 한학을 배우다가 23세에 승려가 됨.

② 1889년 절을 떠나 한국에 입국하여 각처를 유랑함

③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남에 현양사(玄洋社) 일당들과 함께 각처에 출몰, 난동을 선동하고 다님.

④ 190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 히로시마 감옥에 하옥되어 1년간 복역.

⑤ 1906년 흑룡회(黑龍會) 주간 내전양평(內田良平) 초청으로 재차 내한하여 

 동학의 친일단체인 시천교(侍天敎) 고문 겸 일진회의 사빈(師賓)으로서

이용구의 추천으로 원종(圓宗)의 고문이 됨.

⑥ 1910년 원종의 조동종 연합을 종용하고 한일합방이 되자 귀국, 이듬해 사망. 49세.

 

다케다는 친일파인 이용구를 충동해서

<합방상주문(合邦上奏文)>을 지어 바치게도 한 인물이었고

일제 침략 정권의 기민한 앞잡이였습니다.

 

그런데, 이회광 스님은 이용구의 권고로

다케다를 고문으로 모시면서 후일 그의 설득과 지도로

조동종과의 연합소동을 일으키는 등 대표적 친일 행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원종은 서울 도성 안에 조선조 최초의 사찰인

각황사(覺皇寺,오늘날의 서울 조계사)를 창건하였습니다.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는

"부처님과 고종 황제의 은덕에 감사하여 지은 절"이라는

이름처럼 체제순응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원종은 여기에 임시종무소를 설치하고

교단 운영 및 서울 포교에 진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종은 창종된 1908년부터 꾸준히

조선 내무부와 일본 통감부에 원종종무원 및 각황사에 대한 승인을 신청하였습니다.

 

원종 측은 정부측 실세와 친분이 높은 이용구와

일본인 고문인 다케다까지 동원하여 당국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데도 

원종 종무원 및 각황사에 대한 당국의 승인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불교 교단이 정부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별도의 종단을 설치한데 대한 경계 심리가 있었던 것 같고

일본에 의해 통치권을 거의 상실한 상황에서

일본 통감부의 눈치만을 보는 형국으로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정치적 실세인 일본 통감부는 일본인의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종교 선포에 대한 규칙>을 두어 관리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인 및 외국인의 경우에는 종교단체와 포교소가

함부로 설치되는 폐단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통감부 자료에 의하면,

천도교, 시천교, 대종교, 대동교, 원종 종무원, 공자교,

경천교, 대성종교 등의 9개 종교 단체에 대해서는 종류가 너무 많고 잡다하며,

그 움직임도 종교와 정치가 뒤섞여 순수종교단체로는 불순하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민족 종교 단체에 대한 감시와 취제가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이들 단체의 종단 승인에 대해 미온적이었습니다.

  

원종 종무원은 시천교의 이용구 세력과 연계되어 있고

일본 조동종이 배후에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어 인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원종의 인가가 허가도 아니고 반려도 아니게 되어

고착에 빠지자 이회광 스님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이회광 스님이 생각한 것이 일본 종파의 도움을 받아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받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회광 스님은 그 연합의 대상과 방법,

그리고 조건 등을 다케다와 상의했는데,

다케다는 같은 선종(禪宗) 계통으로

조선 불교와 친연성이 있는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통한 인가를 권고하였습니다.

 

마침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이회광 스님은 일본 종파과의 연합을 통한 종단 허가를 이상적인 방안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이회광은 1910년 9월 전국의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 관장인 이시카와와 교섭하였습니다.

 

일본 학자 다카하시의 증언에 따르면, 

이회광의 연합 제의를 받은 조동종 관장 이시카와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조동종이 필요에 따라 조선의 불교를 응원해 줄수는 있으나

연합은 승낙할 수가 없다."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 불교는 아직 조동종과 연합하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것을 무시하고서 억지로 연합을 한다면 사회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기간 조선불교를 조동종의 부속으로 둔다면 곧 승낙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애당초 한국 불교를 자기네 종파에 예속시키고자 한 조동종이므로 

동등 자격으로 양국 불교가 연합한다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동종은 "일본사회의 비난을 받으며

정도가 낮은 조선불교와 연합할 수는 없지만,

부속이 되려면 되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회광 스님은 자기가 조선 사찰 대표 73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은 

연합이지 부속은 아니라고 이사가와의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이회광 스님이 강력히 연합만을 고집하자 이시가와는 주무관청의 내락을 받고자

연합에 찬성하는 7개 조항의 연합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때가 1910년 10월 6일, 한일합방이 된 지 불과 2개월 뒤의 일이었습니다.

조약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조선 전체의 원종 사원 대중은 일본 조동종과 원전하게,

     또 영구하게 연합 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한다.

2. 일본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 인가를 담당한다.

3. 조선 원종 종무원은 일본 조동종의 한국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제공한다.

4. 조선 원종 종무원은 일본 조동종에서 고문을 초빙한다.

5. 조선 원종 종무원은 일본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소 약간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찰(首寺刹)에 배치해서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을 맡기며,

    또한 일본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소를 파견할 때

    조선 원종 종무원은 일본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하는 곳과 사찰에

    기숙사를 정하여 일반 포교 및 승려교육에 종사하게 한다.

6. 본 연맹의 체결은 쌍방의 의견이 합치하지 않을 때는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한다.

7. 위 계약은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 인가일로부터 실시한다.

 

                                                                                1910년 10월 6일

 

조선 원종 대표자  종정 이회광                                               

일본 조동종 총무 홍진설삼

 

그러나, 마지막에 이회광과 조약을 체결한 상대방은

조동종 관장 이시가와가 아니라 조동종 종무원의 총무 히로즈였습니다.

 

일본 조동종은 조선 불교와는 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조동종 총무원 총무를 대표자로 하였으며,

이것은 조선 불교 원종 및 이회광에게는 종교적 굴욕이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조동종에 유리한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굴욕과 불평등을 감수하고서라도

이회광 스님은 원종에 대한 국가의 인가를 받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일합방 전후의 한국불교 분위기에 대해 

불교학자 이능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 승려들은 그때에 대체 어떤 종지(宗旨)를

써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토종(=일본의 淨土宗)을 표방해도 말이 없고,

……원종(圓宗)을 만들어도 무조건 따르며……,

또 혹은 임제종(=일본의 臨濟宗)에 부속을 해도 수수방관……,

기타 조동종(曹洞宗)과 맹약을 해도

그들은 그냥 보고만 있을 뿐 말이 없었다. ……

부화뇌동이라 할까,

손잡고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 할까,

어쨌든 그때의 동향은 모두가 일본 세력을 의지해서

일시적 구안(苟安)을 도모하려는 추세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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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해인사 산문>

 

한국 불교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한국 불교가 종단의 문제를 종단의 원칙에 의해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국가 권력의 힘이나 법원의 판단에 의지해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입니다.

 

이회광이 조선 불교를 일본 조동종과 연합해서라도

국가의 승인을 받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

한국 불교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서막을 올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조선 왕조 500여년간의 핍박에 대한 거부감과 피해 의식 속에

일본 불교에 호감을 가질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당대 불교계 최고의 선승이라는 칭송을 받은 스님의 민족적, 사회적 의식 수준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불교계의 실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 서글픕니다.

 

국가 권력에 종속적인  비굴한 습성은 종단의 문제를

비록 깨지더라도 주체적 힘과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자세와 노력을 갖지 못하고

국가 권력과 외부 여론에 의지하는 의타적 모습으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