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8) - 불교의 성질, 주의, 파괴와 유신>

<조선 불교 유신론>의 초반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자신의 불교관과 불교 유신의 당위성을 피력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해 스님은 불교는 세계의 진보와 장래의 문명에 적합한
종교와 철학이라고 불교의 성질에 대해 논한 다음
불교는 자유의 침탈에 반대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평등주의의 이념을 가진 종교이자
개인의 안위만 구하는 이기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구제하는 구세주의적 종교임을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성질과 주의에 비추어
1500년의 전통을 지닌 조선 불교는
이러한 불교적 성질과 주의를 잃어버리고
여러 가지 폐단이 쌓여 이에 대한 과감한 파괴를 통한
유신으로만 살아날수 있음을 섬뜩할 정도의 강한 어조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편에는 <유신론>의 초반에 나타나 있는
만해 스님의 불교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불교의 성질
만해 스님은 불교의 유신을 논하기 전에
불교의 성질(본질)에 대해 살펴보며
불교가 세계의 진보와 장래의 문명에
적합한 종교이자 철학인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만해 스님은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특출한 점이 있고,
미래 사회의 인류 문명에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불교의 '종교적 성질'과 '철학적 성질'이라는
2가지 대목으로 분류하고 논술하였습니다.
첫째는 불교의 '종교적 성질'에 대해 논술하였습니다.
만해 스님은 사람들이 종교를 신앙하는 것은
최대의 희망을 종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미신과 종교의 차이점을 명백하게 드러낸 다음
불교는 깨달음을 원칙으로 삼고
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의 바다에 들게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결코 미신적 종교가 될 수 없다고 설파하였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들의 가장 큰 희망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생존과 진화의 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면 방종하고 게을러서
그날 그날을 편히 넘기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이 없으면 사람과 사물 및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며
..........
이른바 문명인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목을 움츠리고 생존의 의욕을 상실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릇 중생의 희망이 크지 못할까 염려하여
임시로 무형의 세계를 설정하여 위안을 얻도록 사로잡고
또한 답답한 중생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어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모든 종교가 발생한 원인이다.
예수교의 천당(天堂)과 유태교의 봉신(奉信)과
마호메트의 영생(永生) 따위가 그것이다.
..............
대저 사람으로서 한가닥 목숨을
미신에 의지한다는 것은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생들이 미신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경전에 "깨달음으로서 법칙을 삼는다."고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고,
정각(正覺), 정변지(正遍智)의 설이 한결같이 그러하였으니
부처님께서야말로 중생이 미신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지극하였다.

둘째는 불교의 '철학적 성질'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만해 스님은 칸트, 베이컨, 데카르트 등
근세 철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다방면으로 불교의 성질에 대해 논하며
불교 경전이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적 학설과 사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철학에 대해 논하며
불교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소위 "진여(眞如)"라는 것이 있는데,
진여라는 것은 곧 칸트의 이른바 참된 자아이며 자유성을 가진 것이요,
소위 무명(無明)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명이란 곧 칸트가 말한 현상적인 자아로서
필연의 법칙에 얽매여 자유성이 없는 것이다.
................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기 하나의 자유스러운 참된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참된 자아와
각기 개별적으로 가진 참된 자아에 대해 언급하셨으나,
칸트는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본 것이 사실이라면,
부처님의 철리(哲理)가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만해 스님은 무릇 종교이면서 철학인 불교는
미래에는 도덕과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것이라고 말하며
불교가 인류의 문명과 철학이 더욱 높은 경지로 발전할 때
불교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지닌 불성이 같고 진리가 같기 때문에
진리를 찾는 방법은 다르나 같은 결론에 이르고,
만 갈래가 한 갈래이듯이 불교는 '철리(哲理)의 큰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중생계가 다함이 없기에 종교계가 다함이 없고
철학계가 다함이 없는 것이니,
다만 문명의 정도가 날로 진보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경지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은 또 다시 우리의 눈에 뛸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종교이면서 철학인 불교는
미래에도 도덕과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것이다.

2. 불교의 주의
만해 스님은 불교의 특징(주의)을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있다고 도도한 논진을 펼쳤습니다.
세상에는 주의(主義)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없으니,
어떤 일을 하든지 주의가 바로 서지 못하면
어지럽고 허망하며 방종하여
비록 성인의 지혜로도 일을 적절히 처리해낼수 없다.
그러나, 일단 주의가 바르게 정해지면
그 나아갈 방향을 잡기가 쉬운 것이
수레에 실린 땔감을 보는 것 같아서
앞날의 길흉, 성패를 대개 앉은 채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의논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그 주의를 파악하고 나서 갈팡질팡이 없어야 할 것이다.
대략 불교의 주의는 크게 둘로 나눌수 있으니,
첫째는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가 그것이다.
만해는 먼저 불교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면서
불교는 개인과 사회, 국가간의 자유의 억압과 침탈을 반대하여
진정한 평등의 진리를 가진 종교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근세 자유주의와 세계주의가 실은 평등한 진리가 낳은 자손"이라며
불교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불평등이란 것은 무엇인가?
선악(善惡),성패(成敗),강약(强弱) 등 사물의 현상이
이른바 어쩔수 없는 법칙에 의해 제한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평등이란 것은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얽매인 바가 없는
자유로운 진리가 그것이다.
...........
이른바 평등이란 진리를 말한 것이요
현상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불평등한 거짓된 현상에 미혹되어
해탈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신 까닭으로
이에 평등한 진리를 들어 가르치셨던 것이니,
불경에 "몸과 마음이 결국은 평등하여 여러 중생과 더불어
같고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라"고 하셨고,
........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는 사실은 평등한 진리의 자손이라고 하겠다.
자유의 세계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써 그 한계를 삼는다고 하였다.
.....
불교는 평등, 자유, 세계대동(世界大同)을 지향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금후의 세계는 불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해는 불교는 구세주의의 종교임을 이야기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불교를 자신만이 잘 살아보려는
이기주의, 독선주의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직도 불교의 참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며
화엄경의 대목을 들며 그의 주장을 증명해 나갑니다.
그리고, 원력과 자비의 깊음이 불교만한 것이 없고
부처님은 세상을 구제하는 구세주임이 분명하다고 설합니다.
그러면 구세주의란 무엇인가?
이기주의의 반대의 뜻이다.
사람들이 불교를 말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교는 자기 한몸만을 위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 한몸만 위하는 것은 불교의 정반대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화엄경>에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널리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세계와 모든 악취 중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으리라." 히시었고,
"나는 마땅히 저 지옥, 축생 등의 처소에서 이 몸을 볼모 삼아
모든 중생을 구하고 건져내리라."하셨고,
그 밖의 모든 말씀과 게송이 중생을 주제하려는 뜻에서 벗어남이 었었으니,
이것이 과연 자기 한몸만을 구하려는 종교인가?
.......
그 원력과 자비의 넓고 깊음이 불교와 같은 것이 없다.
진실로 자기 한몸을 위하는 죄를 따진다면
소부, 허유, 양주 등의 은둔자들의 무리와
신선의 도를 배우는 무리에게 바땅히 그 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실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구세주(救世主)이심이 분명하다.

3. 불교 유신은 파괴로부터
만해는 이러한 불교의 성질과 주의에 비추어
파괴를 통한 유신이라는 과감한 혁명적 논리를 펴기 시작합니다.
유신은 과감한 파괴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이론을
의사와 환자의 비유를 들어가며 전개합니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
파괴가 더딘 사람은 유신도 작게 이루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크게 이룬다.
........
유신의 정도는 마땅히 파괴의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유신을 해야 함에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파괴임에 틀림없다.
여기 크게 곪은 환부 때문에 몹시 앓고 있는 환자가 있다고 하자.
어떤 의사가 있어 스스로 곪아 터져서 환자가 죽을 때까지
손을 대지 않고 있다면 그는 아직 의사의 직책을 모르는 위인이다.
만일 또 다른 의사가 있어서 건성으로 곪은 데에만
약을 바르고 그 뿌리를 제거하기 주저한다면
그 환자는 곧 뿌리로부터 다시 더 크게 곪아 죽고 말 것이다.
이같은 의사는 서투른 돌팔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한 의사가 있어
대담하게 곪은 데를 칼로 째고 그 뿌리를 뽑은 다음
그 부분을 치료한다면 환자는 곧 깨끗히 나을 것이다.
이 같은 의사야말로 진짜로 의사의 사명과 직책이
무엇인지 똑똑히 아는 훌륭한 의사이다.

그리고, 조선불교의 폐단을 파괴하고
유신해야함을 강하게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맺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오랫동안 폐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가노라면
이상스럽게 여러가지 폐단이 생겨나고
그 폐단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점점 커가고 굳어져서
나중에는 폐단이 생기기 이전의 모습을 잃고 만다.
조선불교는 1,500년의 긴 세월을 내려오는 동안
여러 가지 폐단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그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다.
이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파괴의 대상이다.
파괴의 대상인 이 폐단을 파괴하기를 꺼려서 피상적인 개량만 하려고 하여서는
그 폐단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사람은
유신하지 않음을 두려워 말고 파괴하지 않음을 두려워하라.
----------------------------------

만해 한용운 스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청년기의 방황기를 제외하고 일관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국권의 침탈 속에서
자유의 억압과 굴종을 강요받고 살았을 때
만해는 여기에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일제의 위협과 회유 속에서도
일관되게 독립을 주장하며
바른 사회적 관점을 올곧게 견지해 나갔습니다.
산중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와 민초들을 각성시키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승속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보살적 삶을 살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만해 스님이 세운 불교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신론의 초반부,
특히 2번째 불교의 주의는 만해가 세운 불교관입니다.
그는 불교의 본질을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의 본질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명상과 사유와 삶을 통해 고뇌하며 굳건하게 세운
만해의 불교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남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팔정도의 출발은 정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견은 단순히 불교 교리적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보는 불교적 견해를 자신과 세상을 보며
명상과 사유와 고뇌를 통해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견은 '서원'이며 '주의'입니다.
만해 스님은 불교의 본질을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체의 억압과 비진리적 요소에
저항하는 삶을 지향했고 추구해나갈수 있었으며,
세상이라는 바다로 나와 바닷물 속에서 넓게 헤엄치며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바라본 불교의 주의(본질)에 비추어
한국 불교를 새롭게 바로 세우기를 바랬습니다.
만해 스님이 '파괴'와 '유신'이라는 강한 어구를 사용하며
한국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한국 불교가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라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그의 성찰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적 입장에서 한국불교가 바로서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갈망은 근대적 진보적 시대 조류와 맞물리며
안일한 잠에 빠져 있는 한국 불교와 스님들의 각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라는
불교의 주의(본질)에서 벗어나 있는한
만해의 유신론은 언제나 한국 불교의 폐단을 파괴할 뇌관으로
존재매김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불교 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10) - 참선과 염불의 유신 (1) | 2025.12.27 |
|---|---|
|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9) - 승려의 교육 (0) | 2025.12.24 |
|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7) - 유신론의 개요와 서론 (1) | 2025.12.18 |
|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6) - 심우장의 정절 (1) | 2025.12.16 |
|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5) - 설중매화 (1) | 2025.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