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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근대사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10) - 참선과 염불의 유신

by 아미타온 2025. 12. 27.

<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10) - 참선과 염불의 유신>

 

<북한산 고양 흥국사>

 

2. 참선에 대해 논함

 

만해 한용운 스님은 참선의 요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참선의 요체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깨어있는 성성적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불교계는

성성적적의 날카로운 참선의 수행 정신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편안함과 적적함을 탐하면서 그릇되게 수행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구세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참선을 통한 깨어 있는 정신으로 중생 구제에 진력해야 하는데,

선방에서 참선하는 수행승들이 염세와 독선의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참선의 요체는

적적성성(寂寂惺惺)에 있다.

 

'적적(寂寂)'은 흔들리지 않음을 말하고,

'성성(惺惺) 은 매(昧어두움)하지 않음을 말한다.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에 어지럽게 일어남이 없고,

매하지 않으면 마음이 혼미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건만 이상하다.

옛날 참선인은 마음이 적적함을 말하였는데,

요즘 참선인은 있는 처소가 적적함을 말하고

또 옛날에는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오늘은 그 몸이 흔들리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처소의 적적은 곧 염세(세상을 싫어함)를 말하는 것이요,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큰 독선과 통한다.

 

불교는 본래 구세의 종교이고 중생을 제도하는 종교인데,

어찌 염세와 독선이 있을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의 선방과 참선인의 현실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렬하게 비판합니다.

 

오늘의 참선인을 가리면

십 분의 하나만이 겨우 진짜 참선인이고

십 분의 둘은 그저 배불리 먹기 위하여 앉아 있고

나머지 십 분의 칠은 어리석고 게으르나

배불리 먹을수 있으므로 선방에 앉아 있는 것이다.

 

선의 지혜를 모르는 자들이 우두커니 앉아서

옛 조사의 어록 몇 마디를 수작하며

원숭이의 잠으로 아까운 청춘을

백발 노인으로 화하게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조선 참선은 이름만이 겨우 참선이다.

 

 

이처럼 당시 참선계를 강타한 만해 스님은 

선방과 참선의 유신책을 다음과 같이 펼쳐 나갑니다.

 

모든 조선 참선실의 재산을 합하여

규모 있고 거대한 선학관 1~2개를 지은 다음,

훌륭한 선지식 몇 분을 스승으로 모셔놓고

참선하고자 하는 사람은 승속을 구별치 않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선지식의 법어를 듣던지

아니면 서로 토론하여 그동한 탐구한 정도를 시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토론하여 서로 교환한 지식을 

책으로 엮어서 출판하면 누구나 쉽게 참선에 친근할수 있을 것이다.

 

또, 사찰의 집무 때문에 전문적으로 참선할 수 없는 승려는

그 사찰에서 적당한 시간에 참선하면 되는 것이다.

 

구태여 특별히 선실을 꾸며놓고

그 안에 온종일 앉아 있어야 참선한다고 할 수는 없다.

 

물을 길어나르고 나무하는 일이 묘용이 아님이 없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나 푸른산이 모두 진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대로 된 참선을 하는 선방을 통일해서 만들고,

출재가 모두에 문호를 개방하고,

자신의 깨달음을 글과 책으로 세상을 향해 회향하라는 것입니다.

 

 

3. 염불당을 폐지하라

 

한편 만해 스님은 염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오늘 조선불교의 염불은 염불(念佛)이 아니라 호불(呼佛)이다."

 

이와 같이 지적한 다음 만해 스님은

'염불 (念佛) '과 '호불 (呼佛) '의 차이를 분명히 분별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진리를 피력하여 가면서 호불의 부당함을 역설합니다.

 

불신(佛身)이 법계에 충만하여 있고

또 원근(遠近) 내외(內外)에 불신 (佛身) 아님이 없다.

그러니 무엇을 부른다는 것인가?

 

또 내 마음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바로 내 마음이 아미타불인데,

남이 나를 부르면 몰라도

내가 어찌 나를 큰 소리로 부를수 있겠는가?

 

아미타불인 내가 아미타불인 나를 부른다면

누가 대답하겠는가?

 

대개 지극한 이치는 말이 없는데,

어찌 그다지 말이 많은가.

 

불도(佛道)를 큰 소리로 부름으로서 구할 수 있다면

천 번 부르고 만 번 불러도 좋다.

 

그러나 큰 소리로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조용한 마음으로 염불함이 좋을 것이다.

 

 

만해 스님은 '참된 염불'이란 다음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염(念)하여 나도 이것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행해서

비록 일어(一語), 일묵(一默), 일정(一靜), 일동(一動)이라도

염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진가(眞假)와 권실(權實)을 가려 

내가 참으로 이를 소유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염불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불교 현황은 큰 소리로 호불하는 것이

극락왕생하는 염불인 것처럼 꾸미고

순진한 부녀자들의 정신들을 호미하게 하니

하루빨리 시정해야 한다

 

 

즉, 만해 스님은 가짜 염불이 진짜 염불을 좀먹는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염불당'을 폐하라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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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스님은 '참선'과 '염불'의

당시 한국 불교의 중요한 두 수행을 비판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기한 것은 '참선'과 '염불당의 폐지'입니다.

 

먼저 참선부터 살펴보면

만해 스님 당시 불교계의 참선하는 부류들이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세의 가르침이요,

중생 제도의 가르침임을 실천하지 않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사찰은 선실(禪室,선방)이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선을 일으키는 본의에 있지 아니하고

선실로 절의 명예의 도구를 삼기도 하고,

선실로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선객의 총수 10명 중 진정한 선객은 1명에 불과하고,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2명이요,

어리석고 게으른 데다가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7명이나 된다고

질타하였습니다.

 

요컨대 만해는 당시 참선이 명목뿐이기에 선실은 영리에서,

선객은 호구지책의 목적에서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한용운은 참선의 본질을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폐단을 일소하고 올바른 규제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만해는 참선의 본질(요체)는

마음의 '적적성성'에 있는 것이지

몸의 적적함에 있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참선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우선 여러 사찰이

공동으로 선학관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식을 초빙하여 수행하고,

참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승속을 구별치 말 것이며,

입방시에는 시험을 보고,

참선을 하는 도중에 청강·토론·시험을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그밖에는 깨달음에 다달은 경우는

그 결과를 저서로써 세상에 공표하자는 합리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이러한 대안을 채택하면

참선 수행의 법도와 수행 정신이 바르게 설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유신론>에서 수행의 문제로 거론한 것은

'염불당의 폐지'입니다.

 

'염불당의 폐지'는 <유신론>의 파격성에서도 가장 과격합니다.

 

유신론에서 제기하는 염불당의 문제는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보편적으로 행하였던 염불은

극락 왕생 정토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통해 개인적 기복만을 구하는 승려들과 부녀자들의 신앙행위가

부처님의 교리상에서 불가함을 설파하였습니다.

 

만해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인 인과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단정하였습니다.

 

만해가 주장하는 참다운 염불은

부처님의 근본사상, 불교 정신을 생각,궁리, 체득하여 

이를 실제의 삶의 현실에서 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님의 사상에 대한 공부와 구체적 실천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부처님을 부르는 '호불'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함에 있어 방편이라는 차원은 필요하지만,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는 지적인 것입니다.

 

만해 스니믄 그 폐단을 통렬히 지적하며 

거짓 염불을 할 바에는 차라리 염불당을 폐지하자고 이야기합니다.

 

해탈과 자유를 추구하는 만해의 올곧은 양심으로 보자면

거짓 염불은 참다운 수행이 아니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해 스스로도 

“참다운 염불이 아님을 두려워하여 이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된 염불의 모임을 겨냥한 발언일 뿐이라고” 개진한 것을 본다면

염불 자체를 무조건 없애자는 주장은 아닌듯 싶습니다.

 

이러한 만해의 염불에 대한 견해는 염불 기도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깊이 경청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불 기도는 무엇인가?

나는 왜 염불 기도하는가?

 

이 문제의식을 선명히 갖고 염불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참된 염불 정신에 입각하여

바른 염불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언제나 수행시에는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