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해 한용운과 조선 불교 유신론(10) - 포교>

만해 한용운 스님은 불교의 쇠퇴와 불자 수준의 낙후성을 걱정하며
한국 불교가 구세주의에 입각하여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만해 스님이 <유신론>에서 주장한 '불교 포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포교는 종교의 의무
만해 스님은 한국 불교가 쇠퇴하게 된 까닭은 불교 세력이 미약하고,
불교 세력이 미약한 것은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포교는 종교의 의무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서양 속담에 공법(公法)의 천 마디 말이
대포 1문(門)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세력만 못하다는 말이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런 말이 문명화된 나라의 말에는
끼지 못하는 몹쓸 말인줄 생각하였으나,
오늘날과 같이 경쟁이 심한 세상 풍조를 보고
비로소 그말이 너더분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른바 문명화된 세상의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구나 여기게 되었다.
......................
오늘날 다른 종교의 세력이
도도하게 하늘에 닿을듯 하고,
다른 종교의 물은 점점 더 불어나서
머리에 넘칠 지경이니 조선의 불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조선불교가 유린된 원인은 세력이 부진한 탓이며,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가르침이란 종교의 의무의 선(線)과
세력의 선이 함께 나아가는 원천이다.
다른 외국 종교로서 조선에 들어온 것들은
한결같이 포교에 힘쓰고 있지 않음이 없는데,
그 누가 종교인의 의무가 이와 같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인의 의무란 본래부터 그런 것이다.

2. 한국 불교 포교의 문제점
이처럼 포교와 교세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 성질임을 지적하고,
재래 불교의 비포교성, 승려의 낙후성,
신도들이 소수의 여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등이
불교 포교의 나약성에서 온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가운데 소위 설법이 조금 포교의 성질을 띠고 있으나,
그 설법하는 바가 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취지가 야비하고 잡박하여 하나도 사람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없다.
이 밖에는 포교랄 것이 없으니,
이런 형편이 오래 지속되어 현재에 이르러
조선 승려의 총수가 3천분의 1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승려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가난에 쪼들리거나 미신에 미혹되고,
게으른데다 어리석고 나약하여
흩어진 정신을 집중할 줄 모르는 무리들이어서
불교의 진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류 가운데 하등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신도는 소수의 여자들뿐이요
남자는 봉화의 털이나 기린의 뿔같이 드물다.
......................
슬프다.
옛날부터 불교인들로 하여금 일찌기 포교하게 하였으면
오늘날의 승려가 반드시 다 3천명 가운데 하등에 드는 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며,
신도가 반드시 소수의 여인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의 결과를 알고자 한다면
지난날 지금 지은 원인이 지금의 결과라는 것일 뿐이요,
미래의 결과를 알고자 한다면 오
늘날 지은 원인이 미래의 결과라는 것을 알면 된다.
앞 시대의 일은 지나간 일이라 모두 흘러보내도
미래는 추구할 만하니 마땅히 좋은 인연을 지어야 할 것이다.

3. 열성, 인내, 자애의 기본자세로 포교하라
이에 만해 스님은 포교를 하기 위한 기본 자세로
열성, 인내, 자애의 3가지를 중요하게 지적하였고,
당시 서양에서 포교하던 예수교 선교사들의
예까지 열거하며 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하였습니다.
포교사는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첫째는 열성, 둘째는 인내, 셋째는 자애이다.
이 셋 중에 하나만 빠지더라도
완전한 포교사라고 볼 수 없다.
다른 교인들이 포교하는 모습을 보면
날씨의 춥고 더움과 길의 멀고 가까움을 관계하지 않고
모두 찾아가서 포교하며,
비록 어느 곳의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찾아가서 포교하며,
한 사람이 실패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 포교하고,
오늘 실패하면 내일 다시 하며,
이루지 못할수록 더욱 더 포교에 힘쓰니,
이것이 열성이 아니겠는가.
포교사는 이와 같이 더위와 추위와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포교하는 열성을 가져야 한다.
또, 포교하는 과정에서도
어떠한 비방과 모욕을 당하더라도
같이 상대하여 핍박함이 없으니
이것이 인내가 아니겠는가.
지혜로운 사람, 비천한 사람, 교만한 사람,
완고 몽매한 사람들이거나
매우 억세고 교화하기 힘든 사람일지라도
모두 환영하여 어루만지고 타이르니,
이것이 자애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인내와 자애를 가지고 포교하고서도
종교가 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
중국에 온 어느 서양 예수교 포교사는
7년 만에 겨우 신자 1명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들은 위인이라 그 뛰어남이 보통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만일 조선의 승려로 하여금 외국에서 전교하게 되면
아마도 한 명의 신도도 얻지 못하고
몇 달만에 실망해 버리고,
몇 달만에 돌아와 버리고 말 것이다.
5년, 7년, 10년이 지나도
오히려 초지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 어찌 그를 구가하고 떠받들지 않겠는가.

4. 포교의 현대화
그리하여 포교는 불교의 흥망과
승려의 생존을 담보하는 지름길로 보았으며,
포교의 방법론까지 제시하면서
당시 포교에 열중하던 기독교를 예로 들어 불교계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포교의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혹은 연설로 포교하고,
혹은 신문 잡지를 통해 포교하고,
혹은 경을 번역하여 널리 유포시켜 포교하고,
혹은 자선사업을 일으켜 포교하기도 하여
백방으로 가르침을 소개해 그 어느 하나라도 빠뜨릴까
걱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선의 불교는 이러한 포교가 전혀 없으니
이밖에 알수 없는 별다른 도리가 있는가.
원컨대 있다면 들려 주었으면 싶다.
얼마나 만해 스님이 불교의 포교에 대해 진지했고,
불교 포교의 미진함에 안타까워 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만해 스님은 불교 포교를 위해
경전의 중요한 부분을 항목별로 나누어
<불교대전>을 편찬하여 포교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잡지사를 만들어 불교 포교에 공을 들였습니다.
이처럼 만해 스님은 불교 포교에 공을 들였으며,
올곧은 만해 스님의 존재 자체가 불교 포교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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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스님은 불교의 본질을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세상의 고통과 미망을 구원하는
구세의 불교가 아니면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도 선언>처럼
진리의 길을 모르기 때문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열성과 인내와 자애로서 바르게 법을 설하는 포교야말로
이러한 구세주의를 실천하는 불교인의 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포교는 종교의 세력을 유지하고
종교를 번성하게 키울수 있는 힘의 원동력입니다.
만해 스님은 불교의 기반과 세력이 미약하고,
승려들의 자질이 낙후되고,
신도가 소수의 기복적 여성층이라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가 깨어나서
하루 빨리 포교에 힘쓸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교인의 자세는
열성, 인내, 자애의 3가지에 있슴을 일깨우며,
서양 선교사의 예를 들며 불교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교의 방법으로
불교의 틀에 갖힌 진부한 설법에만 머물지 말고
여러 가지 언론매체, 방송매체, 역경사업, 대중연설,
자선사업으로 확대해갈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즉, 현대 사회에 맞는 현대적인 언어와 전법의 방식을
고민해서 구체화하자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만해 스님의 시대에 비하면
불교 포교가 활성화되었다며 자위할 수 있을까요?
그런 면도 있겠지만,
진정으로 불자들의 열성, 인내, 자애에서
비롯된 포교의 활성화인지 묻는다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현대 사회의 눈부신 발전 수준과 타종교의 적극적 포교에 비하면
불교의 포교의 발전 수준은 정말 새발의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출재가의 포교사들이 출현해서
열성과 인내와 자애를 가지고 서로 합심해서
포교의 원칙, 정신, 방법 등에 대한 이론적인 재정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 및 그 변화에 걸맞은
변화된 포교 전략의 수립을 통해
포교에 힘써서 세상을 구제하고
교세를 키우려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복적 불교에 안주하는 불자들도 깨어나서
조그만 보시와 작은 선행이라도 게을리하지 말고
적극적인 포교 자세를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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