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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4) - 제2결집과 근본 분열

by 아미타온 2023. 11. 8.

<불교의 역사(4) - 제2결집과 근본 분열>

 

<제2결집이 일어난 바이샬리의 대림정사>

 

1. 계율의 논쟁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100년이 지나자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는

생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1결집에서 제정된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도

이제는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여러 세대를 거쳐 전달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회적 변화나 지역적 차이에 의해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고,

부처님의 교설에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수행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도 갠지스강 동부의

큰 상업도시인 바이샬리에서

계율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갠지즈강 서쪽 지방에 살고 있던 

"야사"라는 장로 스님(나이가 많고 덕망 높은 스님)이 바이샬리에 와 보니

바이샬리의 젊고 진보적인 승려들은 10가지 계율의 내용에 대해

상당히 융통성 있는 해석을 내리고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바이샬리 대림정사의 아쇼카 석주>

 

2. 이지정, 염정, 금은정

 

문제가 되었던 10가지 계율 중에는

 ‘이지정(二指淨)’이 있습니다.

 

출가 승려는 오후불식(하루에 한끼만 오전에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식사하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에

정오가 지나면 물을 제외한 음식을 다음 날 아침까지 먹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에 정오가 되었는지를

땅에 막대기를 꽂아 놓고 손가락으로 해 그림자로 재곤 했습니다.

 

이지정은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사이를

지나기 전까지는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오가 조금 넘었다고 해서 다음 날까지 굶는다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이므로 조금 융통성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염정(鹽淨)"이 있습니다.

 

출가자들은 하루 한번 탁발하여 한끼의 공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한 집에서 잘 요리한 것이 아니라

너무 싱거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소금이 필요했고,

소금은 상하는 것이 아니니까

한꺼번에 많이 얻어다 놓아도 된다는 생각에

소금을 비축해 놓고 먹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그날 먹을 음식만을 탁발하는 것을 철저히 지켜왔습니다.

 

물론, 인도가 무덥기 때문에 여러 집에서 탁발하여

이것저것 섞인 음식을 남겨두면

잘 상한다는 것도 이런 계율이 생겨난 조건이었습니다.

 

아무튼 출가 수행자가 무소유적인 생활을 지켜나가려면

음식이든 옷이든 어떤 재물도

비축하지 않는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에 살던 승려들은 이러한 계율적 문제에 대해

융통성 있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철저히 지키던 농촌과 산간의 승려들은

부처님 당시의 계율을 그대로 지켜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10가지 계율 중에 가장 논란이 심했던 것은

 '금은정(金銀淨)'이었습니다.

 

출가수행자의 생활은 무소유의 삶이므로

금, 은과 같은 돈은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되면서

돈으로 보시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보수적인 스님들은 원칙대로 하자는 주장이었고,

진보적인 스님들은 융통성 있게 돈을 보시로 받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상업도시가 꽤 많아졌고

도시에서 포교하며 수행하는 스님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바이샬리처럼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화폐로 보시하는 경우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돈을 받으면 음식으로 바꿀 수도 있었고,

보시물이 돈이라고 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3. 제2결집

 

보수적인 야사 스님은 바이샬리 젊은 스님들의

계율 해석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이샬리에 700여명의 스님들이

제2결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10가지 중 9가지는 모두 비법(非法)이고

한 가지는 경우에 따라 인정될 수 있다고 하는

판정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모인 700여명의 장로들이

함께 제1결집의 내용도 검토하였습니다.

 

이때, 아난존자와 제1결집 당시에 참여한 장로들도

듣지 못했던 부처님 말씀도 상당 부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통도사 금강계단 현판>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700명의 장로들이

검토하여 그 가운데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법으로 인정하여 첨가하였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비법으로 거부하는 과정을 거쳐

이 제2결집은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결집 이후 장로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10사(事)를 인정한 진보적인 승려들이 반기를 들고

바이샬리 출신의 "밧지풋타카"라는 비구 승려를 중심으로

1만명의 지지자들을 모아 자신들의 주장에 합당한 것들을 모아

게송 형식으로 부처님 말씀을 결집('일만송'이라 한다)하였으며,

이들이 제2결집에 참여한 장로들과 제2결집을 따르는 승려들과는

구분되어 새로운 분파인 대중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교 교단은 처음으로 진보와 보수의 두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고,

보수적인 입장을 상좌부(上座部: 상좌는 나이 많고 높은 위치에 있는 장로 스님이란 의미)와,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대중부(大衆部)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100년경에

불교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부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뉜 것을 근본 분열이라고 합니다.

 

<법의 불을 밝히는 석등>

 

4. 지말 분열

 

근본 분열 이후 불교 교단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견해에도 차이를 보여 더 많은 부파로 분열해 갔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경에는 상좌부에서 약 10개 부파,

대중부에서 8부파 등 모두 20여 부파로 분열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근본 분열 이후 20여개의 부파로 나뉜 것을

 "지말 분열(支末分裂)"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십사 논쟁은 결론적으로

출가 승려들의 금욕적인 계율 항목을

시대 변화에 따라 완화하자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불교는

이러한 논쟁 끝의 부파 분열의 나뉨 속에서도

살육과 전쟁과 같이 이단을 혁파하는

역사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의 제1계율이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불살생’에 기반하고 있고,

서로 다른 견해와 주장을 포용하는 역사로 나아갔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채로운 형태의 불교 형태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포용되고 있는 것도

같은 연유라고 생각합니다.